[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오시이 마모루의 <다치구이시 열전> 도쿄 시사기
2006-04-06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오시이 마모루가 감독과 각본을 맡은 신작 <다치구이시 열전>이 오는 4월8일 시부야의 시네 퀸토극장 등을 시작으로 일본 전국에 순차 개봉한다. 2년 전 <이노센스>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제작비와 개봉 규모이다. 하지만 오시이는 새로운 형식으로 호기롭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았다. 게다가 스즈키 도시오, 히구치 신지, 가와이 겐지 등 한자리에 모으기 쉽지 않은 일본 대중문화계의 인물들이 대거 ‘배우’로 얼굴을 내밀었다. 104분 상영시간 내내 수다를 떨어대는 이 영화의 기이한 매력을 시사회를 통해 미리 맛보았다. 오시이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와 각 매체와의 인터뷰 또한 참조했다.

실사와 3D의 결합, ‘슈퍼 라이브메이션’

먼저 물어보자. 이것은 애니메이션인가? 오시이의 파트너 프로덕션 IG의 이시카와 미쓰히사 대표는 “절대 오시이의 실사 작품은 찍지 않겠다”고 공언해온 바 있다. 하지만 이 작품, 실사인지 애니메이션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제작진은 ‘슈퍼 라이브메이션’이란 이름을 붙여놓았다. 쉽게 말하면 실제 사람들의 디지털 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3D의 판에 붙여놓아 움직이는 형식이다. 이를 위해 닷새 동안 출연진들을 모아놓고 찍은 사진만 3만장 이상이다. 파닥파닥 앞뒤로 뒤집혀지는 종이인형 같은 느낌의 캐릭터들은 에도시대 전통 종이인형극을 차용한 것이라 한다. 오시이는 “지금도 이시카와는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이라 생각한다. 난 실사라 생각하고. 제멋대로 해석해 서로 부딪치지 않고 넘어가는 거지”라고 웃었다. 더 기괴한 건 시침 뚝 떼고 뻥치는 이 작품의 말투다.

‘다치구이’는 말 그대로 음식을 서서 먹는 걸 뜻한다. 주요 메뉴는 소바, 우동 등등. 고속도로 휴게소를 떠올린다면 별 낯설 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일본의 다치구이 음식점이 주는 이미지는 좀 다르다. 땀 냄새 나고 허름한 옷차림의 아저씨들이 둘러서서 후루룩 음식을 먹는 곳. 혼자 전철역 앞의 다치구이 음식점에 들어갔다가 뻘쭘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 내게 주변의 일본 아줌마는 “그런 델 들어가봤냐?”고 되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고 ‘다치구이시’라는 직업이 있냐 하면, 물론 여기서부터 뻥이다. 오시이가 생각한 다치구이시는 바람처럼 나타나 음식을 먹고,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내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다치구이의 프로’다. 우리말로 한다면 ‘서서 먹기 도사’쯤 될 터. 이를 위해 오시이는 가공의 인물인 이단의 민속학자를 등장시킨다. 작품 속엔 그가 남겼다는 학술서 <어둠의 계보/다치구이시의 세계> 등 일련의 책들이 진지하게 인용된다. 사실 오시이에게 이 작품은 오랜 세월 익혀왔던 기획이었다. 이전 작품들에도 가끔씩 등장하던 이 다치구이시들의 ‘열전’을 언젠가는 만들리라. 심지어 그는 가공의 민속학자 이름으로 일련의 책들을 출판할 계획까지 꿈꿨다 한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단관 나이트 프로그램으로나 가능”했던 마니아 취향의 이 기획이 영화화될 기회는 좀체 오지 않았다. 시작은 <이노센스>의 DVD 부록 제작이었다. 칸영화제로 출발하는 공항에서 이시카와 대표가 “이번 영화제에서 상을 하나도 받지 못하면 오시이가 원하는 영화를 다음에 만들도록 하겠다”고 카메라 앞에서 공언했고, 오시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잠자고 있던 다치구이시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일본 현대사 속의 다치구이시들

패전 뒤 부흥을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던 60년 전 도쿄. 막 문을 닫으려는 한 음식점에 은색 긴 머리와 흰 수염 날리는 도사 같은 풍모의 인물이 나타난다. 혹시 ‘쓰키미 소바’를 아는지. 국물에 계란 하나를 띄우는 단순한 메밀국수다. 주문부터 심상치 않다. ‘쓰키미… 소바로.’ 계란은 국물을 붓기 전에 얹어달라고 말한다. 경건하게 국물을 한입 들이마신 뒤 하는 말은 “좋은 경치다…”. 그 모습을 보던 주인은 “뭔 헛소리! 그냥 국수일 뿐이잖아∼”라고 소리지른다. 도사의 이름은 쓰키미 긴지. 그의 예술에 가까운 기술은 ‘설교’를 통한 ‘계몽’이다. 다치구이 음식을 놓고 그가 건네는 인생에 대한 철학적 말 한마디 한마디는 결국 주인을 손들게 만든다. 악마설, 테러리스트설, 군인설 등등 그를 둘러싼 소문은 아직까지 무성하다.

다시 세월이 흘러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으로 뜨거웠던 그해 데모대가 국회에 난입해 여학생이 사망하기도 한 그때다. 국회가 있는 나카타초의 역 앞 음식점에 바바리코트 날리며 절세미인이 나타났다. 섹시한 외모와 사람 홀리는 말솜씨가 무기인 그의 이름은 게쓰네고로케 오긴. 뭐 그가 사망한 여학생이라느니 등등의 풍문도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다. 1960년대 중반 일본의 중소도시에 출몰한 ‘우는 이누마루’는 특기가 눈물로 읍소하기, 줄행랑치기 등이다.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적군파가 요도호를 납치하던 1970년엔 히야시 다누키 세라는 다치구이시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눈치챘겠지만 다치구이시들의 역사의 뒤로, 때는 전면으로 펼쳐지는 건 일본의 현대사다. 패전, 안보투쟁, 도쿄올림픽, 오사카 만국박람회 등을 거칠 때마다 일본은 굵직굵직하게 변화했다. 일본 좌파들이 서로 비판할 때 쓰던 ‘총괄’이란 말을 동원해서 오시이는 히야시 다누키의 세라는 ‘과도기’를 거쳐 일본의 전후는 종결되었다고 한다. 이후 등장하는 고기덮밥 규고로, 햄버거 데쓰 등은 ‘대량소비’의 시대에 그저 먹는 걸로 대항하던 게릴라 또는 아나키스트 같은 존재다.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넘나드는 풍자와 유머

길가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다치구이는 결국 오시이에게 ‘길가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깨끗한 거리’를 만든다고 정부는 길거리의 야생 개들을 일소하고 비둘기들을 새장 속에 가둬버렸다. 오시이는 “도쿄올림픽 때 국가가 씻어버리려 했던 건 전후의 흔적, 냄새였다. 그렇게 길가에서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살던 서민들의 삶 또한 지워졌다. 요즘 사람들에게 짧았지만 그 뜨거웠던 시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건 단순히 가난한 일본의 옛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게 아니다. 길가에서 음식을 먹는 행위의 쾌감 또한 전하고 싶었다 한다. “길에서 음식을 먹는 건 버릇없는 일이라 말하지만, 어느 순간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한다.” 물론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오히려 다큐 느낌의 영상을 일부러 CG로 재현하고 가공의 인물들, 사실과 어긋난 묘사를 하며 오시이는 이것이 ‘허구의 세계’임을 의식시킨다. 시뮬라시옹의 세계에 무조건 몸을 내던지지 않는 것, 그것이 학생운동 마지막 세대쯤 해당하는 오시이와 젊은 세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심각한 의도를 품고 점잖은 내레이션이 깔리지만, <다치구이시 열전>은 유머 감각 가득한 오시이만의 코미디다. 개? 이번에도 나온다. 아니, 아예 중반부는 ‘죽은 개들을 위한 진혼곡’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다. 스즈키 도시오 지브리 대표, 음악감독 가와이 겐지, 영화감독 히구치 신지, 이시카와 미쓰히사 프로덕션 IG 대표, 가미야마 겐지 TV판 <공각기동대> 감독, 가와모리 쇼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사랑, 기억하십니까> 감독, 디자이너 데라다 가쓰야 등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제 전문배우는 몇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오시이의 30년 창작지기들의 ‘노 개런티’ 출연으로 채워졌다. 오시이는 “움직이는 연기가 필요없는 역이었고 거꾸로 그들의 이미지와 존재감이 필요했다. 들인 돈? 닷새 동안 내놓은 도시락 값뿐이다”라며 웃었다. 현실의 일본사회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풍자 또한 재치있다. 업계1위의 고기덮밥 체인 요시노야를 연상시키는 요치노야, 디즈니랜드를 가리키는 게 뻔한 ‘뭐든지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꿈의 나라’ xxx랜드, 주가조작으로 주저앉은 라이브도어를 빗댄 라이브모어 등의 대목에선 일본인이라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사실 <다치구이시 열전>은 전세계인보다 일본인을 향해 강한 메시지를 발신하는 작품이다. 번역이 쉽지 않은 대사들과 이질적 문화배경은 외국의 관객에겐 분명 장애물일 테고, 때로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살았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오시이의 뜨거움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생각하기보다 즐겨라. 무엇보다 어깨에 힘 빼고 뻥치는 감각 그 자체만으로도 즐기기는 충분하니.

<다치구이시 열전> 스토리의 기원

다치구이시 4반세기 역사의 ‘총결산’

“다치구이라는 테마는 일본의 현대사를 그리기 위한 소재인가?” 오시이 마모루는 딱 잘라 대답한다. “일본의 현대사를 그리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건 지금의 일왕이 들어선 1989년 헤이세이 이후. 하지만 다치구이는 25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내 일생의 테마다.” 허풍이 아니다. 실제 오시이가 감독 또는 각본에 손댄 수많은 작품엔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다치구이시’들이 조각처럼 흩어져 있다. 이야기는 오시이가 그림 콘티를 맡았던 <타임보칸>(한국에선 <이겨라 태극호> <날아라 승리호> 등으로 소개됐던)의 5번째 시리즈 <얏토데타망>(ヤットデタマン, 1981년 방영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12화의 앞부분에 다치구이 소바집에 나타난 4명의 인물들이 음식점 주인의 솜씨를 칭찬하며 정신을 홀린 뒤 돈을 내지 않고 홀연히 사라지는 얘기가 그 기원이다. <시끌별 녀석들>(うる星やつら, 1984년 방영분)의 122화 ‘필살! 다치구이 전쟁’이란 에피소드에선 이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학술적(?) 고찰을 겸비한 이 에피소드에서 다치구이의 ‘프로’인 ‘다치구이시’엔 연기파, 잔류파, 방랑파 등등이 있다고 소개됐다. 또한 이 에피소드에선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다치구이시들- 고기덮밥 규고로, 햄버거 데쓰, 중간 매운맛 사부 등등이 구체적으로 선을 보였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탐문했던 실사영화 <붉은 안경>(紅い眼鏡, 1987)에서는 대흉악범죄 특수부대 ‘케르베로스’의 멤버였던 주인공이 불법화된 다치구이 소바집에서 쓰키미 긴지와 접촉했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첫 번째 OVA 5, 6화(1988)와 두 번째 OVA 10화(1991) 등에도 다치구이시가 속속 등장한다. 이 밖에도 OVA 작품인 <조상님 만만세>(1990)의 제6화 ‘호접지몽’에선 ‘조상 모르는 소바집’이라는 별난 이름의 음식점에 눈물을 흘리며 넋을 빼놓는 다치구이가 모습을 드러내 주인과 기싸움을 벌인다. 오시이가 원작의 만화책 <늑대개 전설>(2000)엔 <인랑>에도 등장하는 수도권치안경찰기구의 대원이 다치구이 소바에서 ‘히야시타누키 겐’을 살해하는 사건이 그려져 있다. 이 사건은 이번 영화에 스즈키 도시오의 열연(?)과 함께 삽입되어 있다. 이번 영화는 실로 4반세기에 걸친 다치구이시 역사의 ‘총결산’인 셈이다.

제작 뒷이야기

‘다치구이시’가 된 크리에이터들!

일본의 쟁쟁한 크리에이터들이 출연한 영화인 만큼 뒷이야기도 많았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이노센스>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스즈키 도시오(사진 왼쪽)는 ‘전라’로 등장하는 장면에 도전. 하지만 찍는 도중에도 프로듀서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내내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주문을 늘어놓았다. 영화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다치구이시 역을 그에게 맡긴 오시이는 “스즈키는 정말 죽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 꿈을 영화에서 이룬 거다”라고 싱글싱글. ‘고기덮밥 규고로’로 등장하는 이는 <로렐라이>의 히구치 신지(사진 오른쪽) 감독. 올 여름 공개 예정인 <일본침몰>을 만들고 있던 그는 규고로 휘하의 소고기 마왕 대군단의 출연진들로 자신의 스탭들을 대거 끌고 나타났다. 덕분에 촬영의 쉬는 시간은 <일본침몰>의 스탭 회의였다고 한다. 평소 쿨한 이미지의 <공각기동대 스탠드얼론> 가미야마 겐지 감독은 만화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뜨거운’ 연기로 영화 속 가장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 제작진을 놀라게 했다. 내레이션을 맡은 야마데라 고이치는 <이노센스>의 도그사 역으로도 잘 알려진 성우. 이 영화에서 그가 선보인 목소리는 무려 9가지다. 베테랑 성우이지만 대본 제작소가 비명을 지를 정도의 엄청난 분량의 대본을 받고나선 “사전에도 실리지 않은 단어가 잔뜩이라…”며 울상을 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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