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식의 리얼리즘, 아이러니
크리스의 욕망과 갈등, 선택과 결과에 집중하는 <매치포인트>의 내러티브는 흔할 뿐 아니라 매우 단순하다. 매 순간 매치포인트에 운명을 맡긴 크리스가 결정적 한점을 얻는, 이 영화 최고의 반전(?)을 제외하면, 종횡무진 장르를 이동하며 파격을 시도했던 우디 앨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처럼 단순해진 구조와 전형적인 캐릭터를 향한 입장은 다소 갈리는 편이다. “밥 딜런이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던지고 전자기타를 택했듯 우디 앨런 역시 변했다. <매치포인트>는 그가 40년 동안 만든 영화 중 최고작”이라는 평가와, “<범죄와 비행>이 궁극적으로 우주적(cosmic)이라면, <매치포인트>는 결론적으로 장식적(cosmetic)이다”라는 비아냥이 공존한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다. <애니홀> <젤리그> <맨하탄> <한나와 그 자매들> <범죄와 비행> 등 그의 팬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뽑은 그의 최고작은 매우 다양하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돈을 갖고 튀어라> <맨하탄 미스테리> 등 앨런 특유의 코미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심각한 이야기를 덤으로 여기고, <또다른 여인> 등 간간이 그가 선보였던 진중한 영화에 애정을 품은 이들은 그의 코미디가 더이상 새롭지 않다고 말한다.
<매치포인트>가 전혀 새로운 우디 앨런의 사유를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될 것이다. 우디 앨런이 ‘문득’ 심오한 철학의 세계로 눈을 돌린 것도 아니다. 클로에에게 충격을 주게 될까봐 자신의 불륜을 고백할 수 없다며 궤변을 늘어놓지만 실은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노라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크리스는 여전히 ‘우디 앨런의 남자’다. 그들은 언제나 여자들을 쫓아다니고, 전반적으로 무력하며 때때로 바보스런 선택을 내린다. 크리스를 연기한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는 여타 앨런의 남자들에 비해 월등히 멀끔하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녔으며, 영국을 배경으로 한 탓에 앨런식 말투를 구사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삶은 불공평하고, 앨런의 말마따나 “잘해야 무관심할 뿐인 우주”는 그저 감내하고 살아내야 할 대상이다. 우디 앨런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이제야 비로소 유머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냉소를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매치포인트>에서 타락하지 않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의를 불러일으킬 만큼 천진난만한 클로에는 아버지의 부를 통해 크리스를 구매한 셈이다. 노라의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렸던 톰은 끝내 자신의 세계로 노라를 끌어들이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는다. 크리스의 교양에 매료됐다는 클로에, 톰의 아버지는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며, 노라의 직업을 천박하게 여기는 어머니는 노골적인 모독을 서슴지 않는다. 하나같이 악한 개인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관통할 만한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다. 크리스는 간절하게 아이를 원하는 부인 클로에가 아니라 일시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노라를 임신시킨다. 크리스의 불륜은 그로 하여금 상상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들었지만, 수사과정에서 불륜은 그의 엇갈린 증언에 대한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무자비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차마 밝힐 수는 없지만, <매치포인트>에서 우디 앨런이 준비한 메가톤급 농담은 최고의 아이러니 감이다. 우리는 이제 크리스가 지닌 일말의 죄책감을 향한 기대를 거두고, 농담처럼 무심한 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러니는 우디 앨런식 리얼리즘의 다른 이름이다.
우디 앨런 필모그래피의 강조점이 될 영화
네트에 걸린 테니스 공의 정지화면 위로 “삶은 운에 의해 좌우되기에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네트에 걸린 테니스 공처럼 순식간에 득점 실점으로 갈린다”는 크리스의 내레이션이 흐르면서 <매치포인트>는 시작한다. 여타 우디 앨런의 영화들과 달리 노골적인 비주얼 메타포를 사용하는 이 영화의 제목은 역시 그 자체로 커다란 은유다. <사랑과 죽음> <멜린다와 멜린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러브 유> 등 여타 직접적인 그의 영화 제목과 구분된다. 성실하게 채워온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확연한 강조점이 될 이 영화에서 앨런은 익숙한 공간과 화법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에서, 잊고 있던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나는 여교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그의 영화 <또다른 여인>에 인용된 릴케의 시가 겹쳐진다. “이곳에는 당신이 숨을 곳이 없으니, 당신은 삶을 바꾸어야 한다.”
우디 앨런이 <무슨 일이야, 타이거 릴리>로 첫 영화를 만든 이후 정확히 40년이 흘렀다. 그간 40편의 영화를 만들어온 그는, 크리스 못지않은 행운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그는 비교적 제작비와 흥행에 대한 근심없이, 좋은 배우 및 스탭들과 영화를 만들어왔다. 우디 앨런이 길이 남을 위대한 작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매우 성실하게 괜찮은 작품을 만드는 좋은 작가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착하거나 능력있는 사람(Good)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크리스의 결심은 앨런의 진심이다. 그가 <매치포인트>를 통해 현대 도시인의 허위와 욕망을 향한 농담 섞인 조롱을 멈추고 존재론적인 스릴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 역시 일종의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저 웃어넘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것들과 투쟁하느니 차라리 영화와 투쟁하겠다”고 중얼거리는 이 노인네의 투덜거림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우리의 작은 운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캐릭터의 상황을 대변하는 맞춤 음악
<매치포인트>에 흐르는 오페라 아리아
잼 세션 연주를 연상케 하는 수다스런 배우들의 연기가 숨가쁘게 전개되는 우디 앨런의 영화와 즉흥성을 생명으로 하는 재즈, 특히나 수선스러운 빅밴드의 발랄한 사운드는 운명적인 파트너처럼 여겨져왔다. 앨런은 <슬리퍼>에서는 1920년대 재즈 스코어를 사용했고, <애니 홀>에서는 다이앤 키튼에게 <It had to be you>를 부르게 했으며, <맨하탄>의 타이틀 시퀀스 배경음악으로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택했다. 그러나 영국을 배경으로 하며 한껏 말수를 줄인 <매치포인트>와 재즈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앨런은 <매치포인트>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음악을 오페라 아리아로 채웠다. 물론 클래식은 우디 앨런이 재즈와 함께 즐겨 사용하던 음악이다. 그는 이미 <한 여름 밤의 섹스 코미디>에 멘델스존을, <사랑과 전쟁>에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범죄와 비행>에 슈베르트를, <셀러브리티>에 베토벤 <운명교향곡>을, <또다른 여인>에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삽입한 바 있다.
<매치포인트>에 사용된 아리아들은 절반 이상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테너가수 엔리코 카루소의 목소리로 녹음된 것으로, 각각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말해주며 영화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등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크리스가 클로에의 집에서 노라를 맞닥뜨리기 전에는 친동생과 연적 관계에 놓이게 되는 주인공의 비극을 다루는 베르디의 <일트로바토레> 중에서 선곡된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크리스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전체에는 베르디의 <오셀로> 중 데스데모나를 응징하겠다고 벼르는 오셀로와 이아고의 격렬한 이중창이 깔린다. 한편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운이라는 크리스의 내레이션을 비롯해서 영화 곳곳에 반복, 삽입되는 노래는 도니체티의 희극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다. <사랑의 묘약>의 주인공은 싸구려 포도주를 사랑의 묘약으로 알고 사서 마신 청년으로, 그 역시 반전을 거듭한 끝에 결국은 우연의 힘으로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