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곤 감독은 2000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35만원짜리 비디오영화 <너무 많이 본 사나이>로 명성을 얻었다. <너무 많이 본 사나이>는 우연히 살인장면을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하게 된 청년이 그 테이프를 비디오 가게 반납기에 넣은 다음 살해당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살인자는 미친 듯이 비디오를 빌려다가 문제의 테이프를 찾으려 하지만, 영화를 정말 좋아하게 되어 히치콕의 숭배자를 자처하기에 이른다. 히치콕을 인용하며 코미디와 스릴러를 혼합한 <너무 많이 본 사나이>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지지를 받았지만, 아마추어의 서툰 솜씨라는 비판에도 직면해야 했다. 그 이후 <너무 많이 본 사나이>의 속편인 <감독 허치국>을 만들고 <재밌는 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손재곤 감독은 첫 번째 극장용 HD 장편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나게 됐다. 서른이 넘도록 키스도 못해본 남자와 여러 번 살인을 저지른 여자의 연애 이야기인 <달콤, 살벌한 연인>은 난처한 상황을 이용한 유머와 비상식적인 대응으로 웃음을 주는 영화다. “<너무 많이 본 사나이>처럼 친구들과 함께 보며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VIP 시사회에도 친구들을 초대했다”는 손재곤 감독은 어느덧 다음 영화의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살인자의 죄책감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살인 그 자체도 해프닝처럼 다루는 영화다. 코미디라고 해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추리소설의 서브 장르 중에 도서추리라는 것이 있다. 범인의 시점에서 소설을 전개하면서 범죄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장르다. 영화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는 문제가 있겠지만 <달콤, 살벌한 연인>은 그런 추리소설보다 정도가 더하지는 않다. 살인을 하는 장면도 잔인하거나 폭력적으로 묘사하지 않았고. 미나(최강희)도 도서추리소설인 <탐정을 찾아라>의 여주인공을 보며 떠올린 캐릭터였다. 노트북 한쪽에 묻혀 있는 아이템이었는데, 남자가 주인공인 로맨틱코미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코미디가 나오지 않을 듯한 상황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 것 같아 스릴러를 더했을 뿐이고, 스릴러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내겐 조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설정이 필요했다. 미나가 <죄와 벌>을 인용하며 자신의 살인을 변명하는 장면이 있지만 그것도 이어지는 농담 때문에 집어넣었다.
-<너무 많이 본 사나이> <감독 허치국>도 코미디와 스릴러가 섞여 있었지만 굳이 스릴러의 성격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변화가 있었나.
=원래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 영화들을 만들 때는 히치콕 이야기를 많이 했고,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히치콕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우디 앨런을 가장 좋아한다. 스릴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도 있다. 흔히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의 게임이라고 하지만 나는 거기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궁금하지만, 그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달콤, 살벌한 연인>을 만들면서는 스릴러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전까지 스릴러영화를 만들겠다고 말로는 열심히 떠들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일시에 흥미를 잃어버린 듯하다.
-스릴러보다 범죄에 관심을 가진 영화치고는 살인과 폭력의 묘사가 무난한 편이다.
=관객 40명 정도를 모집해 모니터 시사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1/3쯤 되는 부분에서 미나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마지막엔 웃지도 않을 정도였다. 내가 몰랐던 건 마케팅이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연쇄살인이 중요한 반전은 아니어서 그 사실을 드러내며 영화를 홍보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트리트먼트나 시놉시스를 보여주면서도 장르를 가르쳐주지 않고 툭 던져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겠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갑자기 스릴러로 가는 듯하다가 로맨틱코미디로 돌아오는 방법을 쓰고 싶었지만, 관객이 미나의 정체를 알고 있어서 원했던 반응을 얻지 못했고, 다음 영화부턴 이야기 구성이 달라질 것 같다.
-영문과 강사인 대우(박용우)는 책을 읽지 않는 세태에 분노하지만, 인터넷 유행어도 알고 옛날 TV드라마 제목도 대번에 알아맞힌다. 그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삽입한 장면이었는지.
=대우는 그런 인물이다. 성(性)이나 포르노에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책꽂이 뒤에 남성 잡지와 에로 비디오를 숨겨놓고 본다. 하지만 사람은 대부분 그렇지 않나. 가십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인터넷을 하다보면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연예뉴스를 클릭할 거다. 연애를 하지도 않고 관심없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연애를 의식하고.
-최강희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선택이었던 반면 박용우는 뜻밖의 캐스팅이었고 연기도 뛰어났다. 그의 어떤 점에 주목했던 건가.
=박용우는 <혈의 누>가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연기자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다. 사실 나는 대우를 어떤 톤으로 연기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지나치게 과장하는 코미디 연기에는 거부감이 있어서 사실적으로 연기했으면 했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박용우는 어느 정도 장르적인 연기를 하면서도 과장하지 않는 연기를 해주었다. 발음도 또렷해서 많은 대사를 소화할 수 있었고. 최강희는 신기한 케이스인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 최강희를 좋아하고 그 매력을 안다고 믿는다. 게다가 멜로 연기를 해왔기 때문에 영화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최강희가 아니었다면 <달콤, 살벌한 연인>은 멜로가 아예 빠져버린 코미디가 되었을 거다.
-마지막 장면은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연애의 끝이지 싶기도 하다. 그런 결말을 두고 주변에서 반대하지는 않았나.
=<너무 많이 본 사나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달콤, 살벌한 연인>도 패러디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패러디라고 할 만한 장면은 거의 없다. 미나가 대우의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은 나중에야 <우디 알렌의 부부일기>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의식적으로 <데미지>와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물론 <봄날은 간다>가 표현을 더 잘했지만, 아무리 대단한 연애사건이 벌어졌던 것 같아도 지나고 보면 그때 가졌던 애틋한 감정이 살아나는 정도가 아닐까. 사람은 연애하는 상대보다 연애감정에 더 충실하고, 사람을 계속 바꾸며 그 감정만을 간직하는 것 같다. 앞부분에 조크가 너무 많아서 느낌이 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슬쩍이라도 집어넣고 싶었다.
-<너무 많이 본 사나이>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감독 허치국>은 반응이 좋지 않았고 그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2000년에 <너무 많이 본 사나이>를 부천영화제에서 상영한다기에 깜짝 놀랐다. 부문이 ‘영화광장’이었던가, 그래서 광장에 사람들 모아놓고 공짜로 보여주는 줄 알았다. (웃음) 그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찍지 못해서 자막으로 2부를 예고했는데 뜻밖에 반응이 좋아 <감독 허치국>을 찍었다. 결말로 주인공이 사설영화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장면을 찍고 싶었지만, 내가 다니기도 했던 모 영화학교에서 강의실을 빌려주지 않았다. (웃음) 그때 아마추어적이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상처를 받았다. 밴쿠버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그곳 관객은, 외국어여서 아마추어의 연기라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이디어를 더 많이 봐주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왔더니 누구도 나를 감독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주눅 들었던 시기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많이 본 사나이>는 내가 만든 이야기 중 가장 독창적이었던 듯하다. 이제야 그 영화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한겨레 영화학교를 다닌 걸로 아는데 혹시 강의실을 빌려주지 않은 영화교실이….
=그건… 강의 스케줄도 중요하고 하니까…. (웃음으로 넘기며) 스물다섯살에야 비디오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줄곧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학 다닐 때 이미 감독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도 혼자 써봤고. 사실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때도 썼었다. 모 스포츠 신문이 시나리오 공모전을 했는데, 두면에 개재된 글이 별로 길지 않아 보였고, 상금도 1천만원이었다. (웃음)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썼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지금까지 써본 시나리오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만든 영화는 모두 현실에서 소재를 찾기보다는 머리로 지어낸 이야기에 가깝다. 몇년 동안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면서 상상력이나 창조력에 한계를 느끼지는 않았나.
=누구도 감독으로 생각해주지 않아서, 방송사 코미디 대본을 쓰기도 했고 <재밌는 영화> 시나리오도 썼는데, 한동안 돌파구를 찾지 못한 적이 있다. 그 시기에 영화에 대한 취향이나 생각이 많이 변했다.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걸 돌파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운 건 내가 예전에 썼던 시나리오들이 결코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때 떠올랐던 영감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거니까. 아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생각해보면 한국 영화계에 큰 손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웃음)
-감독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달콤, 살벌한 연인>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싸이더스FNH에서 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친구가 이곳에서 신인감독을 찾고 있다며 소개시켜주었다. 그 친구는 <너무 많이 본 사나이>를 찍을 때 편집 시스템을 빌려주었고, 문제의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하는 손님 역할도 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뻔한 설정으로 가려는 것 같다가도 다시 농담을 하곤 한다. 로맨틱코미디라고 해도 결말은 진지하게 가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식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는 유혹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원래 기대와 다르게 가는 걸 좋아한다. 대우가 미나의 호텔방으로 찾아오는 장면에선 마지막까지 농담을 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짜증이 나서 그럼 울려보자 했지만, 그래도 대우의 웃기는 대사 하나를 빼지는 못했다. 언제나 지적을 받으면서도 로맨틱코미디가 같은 패턴으로 가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중가요도 언제나 사랑 타령을 한다고 욕먹지 않나. 그건 작사가나 작가가 어느 정도 자기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굉장한 연애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여 그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하고, 사실 그렇게 남다른 경험도 아니었을 거다. 나도 그런 감정을 느껴봤지만 관객이 받아들여줄 것 같진 않았다.
-대부분 실내에서 찍었고 나오는 인물도 적다. 당신의 스타일인가.
=무슨 일이 생길까봐 야외촬영을 무서워하는 편이다. 실내에서만 찍다보니 나름대로 해결책은 찾았다. 실내장면은 독창적인 컷보다는 편집의 문제가 중요해서 빠르게 변화를 주고 장면을 전환하곤 한다. 인물이 적은 것도 취향일 수 있겠지만, 내가 통제를 못할까봐 걱정해서였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떻게 하면 엑스트라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다음 영화는 마당까지는 자주 나가보려고 한다. (웃음) 아, 다음 영화는 범죄자가 주인공이고 코미디가 나오고 <달콤, 살벌한 연인>처럼 스릴러로 오해받을 수 있는 영화다.
-미나의 조력자인 민 변호사(이희도)는 장르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인 듯하지만 이 영화에선 실체가 잘 잡히지 않는다.
=비중이 축소되었지만 할리우드영화에 나올 법한 퇴물 변호사를 생각했다. 한탕 하고 사라지려는 그런 사람 있지 않나. 농담처럼 가려고 했는데, 이희도 선생은 걱정을 많이 했다. 벽지에 묻은 피를 지우는 방법을 인터넷 지식인에 묻는 장면이 그랬다. 이희도 선생은 이 타임에서 조크는 좀 그렇지 않느냐고 말했고,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그게 맞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설정 자체가 세기 때문에 조금 쉬운 조크를 넣을 필요가 있었다. 심각하지 않게. 그런데 솔직히… 농담이 제어가 안 될 때가 있다. (웃음)
-<달콤, 살벌한 연인>은 야심이 있다기보다 재미있게 만들어보자는 소망이 있어 보이는 영화다. 혹시 야심이 있었나.
=음…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낄낄대게 만들 거야, 이 영화가 내 카드빚을 구원해줄 거야, 정도? (웃음) 야심있는 영화도 중요하지만 모든 영화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모든 신인감독에게서 패기를 찾으려는 시도가 극단적인 것처럼. 내가 영화와 문화에서 유일하게 믿는 게 있다면 다양성이다. 내 영화는 좀 달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