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액자를 부수고 나온 21세기형 비너스, 스칼렛 요한슨 [1]
2006-04-18
글 : 박혜명

리즈 위더스푼, 커스틴 던스트, 내털리 포트먼, 키라 나이틀리, 린제이 로한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21세기 할리우드를 책임질 여배우 군단이라는 점이다. 한명이 빠졌다. 스칼렛 요한슨이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등에 이어 지난해 마이클 베이의 블록버스터 <아일랜드>를 찍으면서 이른바 ‘작은 영화’와 ‘큰 영화’의 영역을 모두 흡수하기로 한 스칼렛 요한슨은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뜨거운 기대주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5명의 무리에 스칼렛 요한슨을 탁 끼워넣기가 어딘가 석연찮다. 국내 개봉하는 우디 앨런의 신작 <매치포인트>를 본다면 이 석연찮은 느낌은 굳어질지도 모른다. 대체 스칼렛 요한슨이 지금 할리우드를 달구고 있는 또래 여배우들과 차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천진하면서도 깊고 복잡한 눈빛 뒤에 있는 스칼렛 요한슨의 개성을 뜯어보기로 했다.

우디 앨런의 신작 <매치포인트>는 인생의 유혹과 운에 관한 섬뜩한 예화다. 이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그 유혹이자 운의 대상이다. 프로 테니스 선수를 은퇴한 영국인 크리스(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는 제 약혼녀의 친오빠의 애인이라는 미국인 여자 노라 라이스(스칼렛 요한슨)에게 한눈에 반한다. 크리스는 대담하게 노라와 불륜의 연애를 시작한다. 노라는 고혹적인 눈빛과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금발 미녀. 한 남자의 인생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가버리는, 신비하게 살아 움직이는 팜므파탈이다. <매치포인트>의 노라는 스칼렛 요한슨의 특징 하나를 선택해 일백배 확장해놓은 캐릭터다. 1984년생, 올해 스물두살에 불과한 요한슨은 육체와 표정으로 관능미의 절정을 과시한다. 그녀가 생긋 웃고 몸을 한번 움직여주면, 뭇 남성들은 탄성을 쏟지 않고 못 배길 것이다.

이 시대의 유행에 맞지 않는 독특한 관능미

버디: 아저씨는 열정적인 사람이에요. 고마워요. (운전 중인 에드의 뺨에 키스를 한다)
에드: (약간 당황해하며)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버디: 아니에요. 아저씨 때문에 피아노 연주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아저씨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에드의 무릎을 매만진다)
에드: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버디를 쳐다본다)
버디: 아저씨를 정말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에드의 바지 지퍼가 있는 쪽으로 상체를 숙인다)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중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가진 관능미는 그가 십대 시절 출연한 코언 형제의 블랙코미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1) 때 이미 드러났다. 요한슨의 캐릭터 ‘버디’는 금발을 곱게 말아넣고 얌전한 자태로 피아노를 치는 소녀. 알고 보면 아빠 몰래 담배를 피우고 아빠의 단골 이발사 에드(빌리 밥 손튼)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은 대담한 아이다.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했던 에드를 버디는 은근슬쩍 유혹해내고 만다. 코언 형제가 이 인물을 집어넣은 의도는 뻔하다. <매치포인트>의 노라와 마찬가지로 버디는 남자의 인생을 우습게 만드는 헛발질이다. 요한슨은 열여섯살이던 당시 인터뷰에서 버디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롤리타적인 특징을 가진 캐릭터예요. 아주 관능적인 사람이죠.”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매치 포인트>

요한슨의 관능미는 안젤리나 졸리 혹은 할리 베리 등 동시대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미국 월간지 <베니티 페어>는 최근 3월호 표지로 키라 나이틀리와 스칼렛 요한슨의 전신 누드사진을 내세워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 표지가 아찔한 까닭은 배꼽 피어싱과 복부 근육을 드러낸 키라 나이틀리의 현대적인 몸매 때문이 아니라 백옥처럼 하얗고 언덕처럼 풍만한 스칼렛 요한슨의 육체 때문이다. <베니티 페어>는 스칼렛 요한슨이 뽐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유행과 맞지 않는 요한슨의 육체다. 1940년대 은막스타 로렌 바콜을 연상시키는 갸름한 얼굴과 의상으로 가려지지 않는 작고 탐스러운 몸. 요한슨의 생김은 복고 패션에 잘 어울릴 법하게 고전적이고 요한슨의 몸매는 현대 운동과학과 식이요법으로 관리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자연의 몸상태에 가깝다. 여기에 요한슨의 두눈은 약간 사시여서 시선의 끝이 모호하게 감춰져 있고, 목소리는 평생 줄담배 피우고 산 것마냥 묘하게 허스키하며, 폴란드인과 덴마크인의 피가 반반씩 섞인 혼혈답게 북구인의 분위기도 풍긴다. 스칼렛 요한슨의 외모에는 자연성과 관능미, 모호함과 이국적인 느낌이 한데 뒤섞여 있다.

내면의 성숙함을 표현할 줄 아는 공인된 연기력

레베카: 너 저 남자 진짜 좋아하니?
이니드: 잘 모르겠어. 좀 좋아하긴 해. 저 사람은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들하고는 죄다 정반대이거든. 어떻게 보면 그냥 멍청이 촌뜨기이지만, 사실 멋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레베카: 그래, 네 말대로 저 사람은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볼 수 있겠지만 절대 멋있지는 않다.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 중에서

사실 코언 형제가 어린 스칼렛 요한슨에게 신비로운 팜므파탈 역을 주문한 전례만 빼면, 요한슨의 성숙한 매력이 외적으로 드러나기는 <매치포인트>가 처음이다. 그전까지 요한슨의 성숙함은 내적으로만 표현됐다. 요한슨은 주로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소외됐거나 스스로 일탈하려고 하는 조숙한 소녀의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성숙함을 표현했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연출, 주연한 <호스 위스퍼러>(1998)의 그레이스는 사고로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잃은 뒤 마음이 빗나간 열여섯살 소녀였고, <아메리칸 뷰티>의 도라 버치가 주인공 이니드 역을 맡았던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레베카는 이니드보다 현실적이긴 해도 역시 너무 조숙한 탓에 세상을 무심하고 외롭게 사는 열아홉살 소녀였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그리트도 비슷하다. 샬롯은 결혼생활 2년째에 삶이 지독히 외로워져 대낮에 우는 여자, 총명한 하녀 그리트는 자기 주인인 화가 베르메르의 예술세계에 관심과 이해를 보여주는 그 집안의 유일한 여자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캐릭터의 조숙한 내면에 다가서는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력은 이미 10년 전에 공인받았다. 양부모에게서 도망친 두 자매의 이야기 <매니와 로>(1996)에서 요한슨은 임신한 언니를 돕기 위해 무모한 범죄를 꾀하는 11살짜리 소녀 역을 맡아 그해 인디스피릿어워드 여우주연상을 탔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 수상자를 기억해두었다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오디션없이 주인공 역을 맡겼다. 이 때문에 애초 내정자였던 케이트 허드슨이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상대역 콜린 퍼스는 베르메르가 그리트의 귀를 뚫어주는 장면을 예로 들면서 요한슨의 연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장면은 베르메르와 그리트의 관계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보통의 여배우들은 그 순간의 감정을 눈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스칼렛은 그 복잡한 감정을 얼굴에 담아냈다. 그 순간의 확신, 망설임, 품위 등을 모두 표현했다.” 영화를 찍는 내내 여배우가 상대 남자배우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귀하고 신비한 존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그리트의 깊은 감정이 진짜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변해, 요한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촬영현장에서 베르메르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가 서로 애무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요한슨은 가슴 한구석이 실제로 아파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열살부터 시작된 꼬마 요한슨의 연기 열정

심사위원: 요한슨네 4남매의 CF 오디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모두 긴장) CF 오디션 합격자는 막내 헌터 요한슨!
스칼렛: 뭐야! 왜 내가 안 된 거야!
요한슨 부인: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렇게 이 일이 하고 싶었니?
스칼렛: 당연하죠! 너무나 하고 싶어요!
요한슨 부인: 평소에는 내색 한번 안 했으면서.
스칼렛: 엄만 내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
-1991년 미국 뉴욕의 어느 오디션장.

스칼렛 요한슨은 열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이란성 쌍둥이 막내 스칼렛과 헌터를 포함해 요한슨네 4남매는 어릴 때부터 생김새가 예쁘장했다. 주위에서 말들은 많았지만 이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의 진로로 배우나 모델 분야를 생각하지 않았다. 지인의 간절한 권유로 4남매를 일제히 CF 오디션장에 데리고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디션이라는 걸 치러본 적 없는 4남매 중 제일 깜찍한 막내 헌터만 오디션에 통과했다. 언니와 오빠는 군말이 없었는데 스칼렛 혼자 신경질을 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엄마는 스칼렛을 데리고 CF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딸은 단 한번도 CF 오디션에 통과하지 못했다.

<호스 위스퍼러>

요한슨의 엄마는 영화광이었고 스칼렛 요한슨은 엄마가 보여준 <양들의 침묵>에 열광하는 꼬마였다. 주디 갤런드와 로잘린드 러셀을 만나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딸을, 엄마는 영화 오디션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발레스쿨과 뉴욕 리 스트라스버그 연기학교에 등록했다. 2년간 오디션만 보러 다녔다. “나는 어릴 때도 정말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내가 연기를 하고 싶다는 걸 알았고 그것만 쫓고 싶었다. 허구한 날 오디션에 낙방하는 것은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큰 좌절이고 상처였다.” 요한슨은 롭 라이너 감독의 <노스>(1994)를 통해 비로소 영화배우로 일을 시작했다. 2년 뒤 그는 인디스피릿어워드 여우주연상(<매니와 로>)을 타고 다시 2년 뒤 영스타어워드 연기상(<호스 위스퍼러>)을 탔다. 이 해에는 영아티스트어워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연기학교는 3년 뒤 그만두었다. 짧은 시간 무섭게 성장하는 딸의 모습을 지켜본 엄마 멜라니 요한슨은 딸의 어른스러운 생각과 판단을 존중하면서 지금까지 매니저 일을 맡고 있다. “우리 엄마의 가장 멋진 점은 내가 가진 이상한 개성을 매니저로서 완벽히 존중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내린 어떤 결정이라도 다 지지해준다.” 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엄마를 ‘영화 역사가’라 부르며 엄마의 취향과 지식을 신뢰하고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진정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요한슨 모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간 믿음을 쌓는 데 성공했다. 딸이 어렸을 때는 두 사람은 종종 촬영장 바깥 먼 곳까지 산책을 다녀오곤 했다. 오래된 팝송을 번갈아 부르며 길을 걷고 있으면 갑자기 엄마가 걸음을 멈추고 딸을 불렀다. “저기, 장교님!” 엄마는 짓궂게 물었다. “우리 속도를 좀더 높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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