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그녀의 무한한 자기 긍정에 경배를! <달콤, 살벌한 연인>
2006-04-19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죄의식도 모성애도 없는 여성킬러 탄생시킨 <달콤, 살벌한 연인>

<달콤, 살벌한 연인>의 장르는 독특하다. 로맨스, 코미디, 스릴러가 결합된 영화는 드물다. <베리 배드 씽>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 <그래서 난 도끼 부인과 결혼했다> 정도인데, 그중 <달콤…>의 로맨스가 가장 살아 있으며 코미디, 스릴러와의 배합도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정한 특이점은 여성살인자를 그리는 방식이다. 섹스나 폭력장면이 거의 없는데도 18세 관람 등급을 받은 건 순전히 이데올로기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죄의식도 모성애도 없는 여성킬러가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처벌도 받지 않는 이 영화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위협하는지 생각해보면 자명한 일이다. 여성살인자의 존재는 낯설다. 흔히 폭력은 남성의 것으로 성별화되며, 여성은 ‘피해자다움’의 성역할로 고정된다(<살인의 추억> <여자, 정혜> 등). 그러나 여자도 살인을 한다. 2005년 현재, 여성 살인재소자는 249명이며, 그중 133명이 남편/애인 살해범이라 한다. 영화는 이들을 그리되, 그녀들이 자신을 변호하거나 보호하도록 그리지 않는다. <인디안 썸머>의 그녀는 무죄 주장을 포기하며, <소름>의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살해된다. 오직 <개 같은 날의 오후>나 <돌로레스 클레이븐> 같은 여성주의영화나, <시카고>처럼 사법체계 자체를 비웃는 영화만이 그녀들을 변호한다.

한명의 남자를 죽이는 것도 이러한데, 여러 남자를 죽인 여자들은 어떻게 재현될까? 여성 연속살인자를 재현하는 허용된 방식은 첫째, 과도하게 성애화된 악녀로 표상하거나, 둘째,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여자로 그리거나, 셋째, 모성애의 발현이라야 한다. 첫 번째 방식은 <원초적 본능>처럼, 변태성욕이거나 과잉성욕의 일환으로 그녀를 전시하고 소비함으로써 오히려 안심하는 책략이다. 두 번째 방식은 <몬스터>처럼, 그녀를 하소연이나 늘어놓는 멍청하고 추한 ‘몬스터’로 그려 그녀의 변론에 귀기울지 못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세 번째 방식은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 공주> <6월의 일기>처럼, 그녀들의 살인을 죄의식과 모성애에 의한 것으로 정당화함으로써 모성이라는 성역할을 강화하는 술책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위험성은 탈각되고,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는 온전히 보존된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그녀는 4명의 남자를 죽였다. 첫 번째는 폭력남편을 살해하고 정당방위를 인정받는다. 두 번째는 늙은 남편에게 심장마비를 유발했다. 세 번째는 옛 애인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자 죽이고, 네 번째는 칼 들고 덤비는 남자를 죽인다. 그녀는 셋째, 넷째 살인에 대해서도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다”라고 말한다. 즉 정당방위라는 것. 두 번째 살인에 대해선 <죄와 벌>을 인용한다. 네번의 살인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지만, 죄책감이 없으며 심지어 유산으로 행복해지고자 한다. 그녀는 자신이 “저 여자랑 똑같이, 인생을 즐기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녀는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도망을 염두에 둔 상황에서도 사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데이트, 키스, 동침 제안에도 훨씬 능동적이다. 옛 남자의 출현에 대해서도 “변명하기 싫다”고 말하며, “기다려달라”고 요구한다. “용서한다”는 남자 말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네가 사과해야지”라고 말하며, “사랑하면 같이 떠나자”고 제안한다(<로망스>의 “나 같은 여자가 행복해지면 불공평하다”는 병적인 대사와 비교해보라). 사람 죽여놓고도 매 순간 행복해지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과 자기 긍정은 <원초적 본능>이 전시하는 변태적인 성욕과도 다르고, <몬스터>의 이해해달라 구걸하는 태도와도 전혀 다른 ‘윤리’이다.

영화 속 그녀는 평범하고 매력적인 여성이며, 살인이나 사체유기 역시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그저 “성실한 일처리”를 요하는 노동이자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볼 만한 일상사로 그려진다. <죄와 벌>의 인용은 적확하다. 19세기 라스콜리니코프는 특이한 도덕관념에 몰입하지만, 그 관념을 체현하지 못했다. 머리는 살인자의 것이어도, 가슴은 새가슴이라 죄의식에 시달렸던 것. 그러나 20세기 인종주의자들은 그 사상을 조직적으로 구현했다. 문제는 관념이 아니라, 힘/의지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죄와 벌>을 읽지 않고도 그 관념을 실천적으로 선취하며, 지식은 사후 인용된다.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소심한 지식인 황대우가 그녀에게 매혹되는 건 당연하다. 그녀가 떠난 아파트엔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란 제목의 책이 꽂혀 있었다. ‘도덕’과 ‘금기’를 뽑아 줄넘기를 할 발칙한 영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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