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먼저 손은 행위를 나타낸다. 손은 계약서에 사인해 결정을 완료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손가락 한 번의 클릭 실수로 한 국가의 경제나 국방 시스템이 마비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 처음 나누는 육체적 접촉도 상대의 손을 잡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몽정을 경험했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의 1965년산 제품으로선 너무 빠른 신체적 조숙이었다. 그러다보니 피도 안마른 어린 초딩 녀석이 벌써부터 밝힘증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호통재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4학년 바로 그 즈음에 담임선생으로 온 분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초등학교 선생 일을 시작하는 23살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외람되지만 수업시간 내내 담임선생이 칠판의 좌우를 오갈 때마다 따라 파동치는 가슴에 온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밤마다 담임선생에 대한 환상으로 몽정을 하는 횟수가 더욱 잦아진 반면, 성적은 육중한 물체가 낙하하듯 빠르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갔다. 이렇게 나의 초딩 4년 시절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야릇하고 은밀한 쾌감, 그러면서도 왠지 불결하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감정의 혼돈 상태에서 유쾌하지 못하게 끝났다.
5학년 무렵, 주말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던 외화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진 시몬즈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0년 작 <스팔타커스>였다. 당시 흑백 화면에서 그녀를 처음 보고 나도 모르게 화면을 향해 뻗는 내 손을 발견하게 되었다. 경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온몸으로 진동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행위였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여선생에 대한 성적인 호기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듯한 그런 순수함이 가슴 쏙에 “쏴~”하고 퍼지는 듯했다. 진 시몬즈는 어린 나에게 성적 매력을 초월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스크린 속의 내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한 동네에 전화가 있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시절인 만큼 이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고교시절까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빅 컨트리>(1958), 리차드 버튼 주연의 <성의>(1953), 버트 랭카스터와 함께 전도사 샤론 역으로 나왔던 <엘마 갠트리>(1960), 그리고 전혀 의외의 캐릭터로 등장했던 <검은 수선화>(1947) 등등 여러 작품들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봤다. 진 시몬즈가 나오는 영화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고1때였다. 등교길이면 언제나 같은 버스에서 마주치던 여고생이 있었는데, 옆모습이 진 시몬즈와 흡사했다. 무언가 멋진 프로포즈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고민하고 또 했다. 당시 문화방송 장학퀴즈에 출연해 장원을 하고 소감을 밝히는 과정에서 공개적인 사랑 고백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결국 장학퀴즈 445회에 출연(당시 차인태, 조일수 진행)했지만 공개홀의 수많은 조명과 방청객들을 보자 너무 떨고 긴장한 나머지 작전은 100%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며 이성에 대한 취향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진 시몬즈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신부와 소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가시나무 새>에서도 열연했고, 근래에는 저 유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늙은 소피의 영어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비록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목소리만 들려주는 것이었음에도 그리고 그것이 70대의 할머니가 된 진 시몬즈였음에도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게 만드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여준 진 시몬즈는 내겐 영원한 스크린 속의 첫사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