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클루조 경감. 위대한 프랑스의 지성을 물려받은 남자다. 마침 핑크 팬더 다이아몬드도 무사히 주인의 손에 돌려줬으니 당분간은 니스 해변에 발 담그고 바캉스나 즐기면 될 일. 그런데, 뉴욕 한가운데서 또다시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이번에 나를 부른 것은 번번히 사건을 미해결인 채 방치하는 무능력한 뉴욕경찰. 물론 살인마, 은행강도, 심지어 외계인이나 방사능에 오염된 거대 괴물 사건도 해결해야 하는 뉴욕의 경찰들로서는 위대한 프랑스의 지성이 필요할 법도 하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은 좀 흥미로운데가 있다. 자칭 ‘인사이드 맨’이라는 강도 일당이 월스트리트 한가운데 위치한 은행을 장악하고는 도망칠 점보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강도들이 인질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뉴욕 경찰로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을 할 수도 없는 모양. 그런데 이거 참 이상하다. 냄새가 난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은행 금고의 돈이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냄새 말이다. 어쨌거나 2시간 뒤면 뉴욕행 비행기가 출발할 예정이다. 그동안 모아둔 강도사건 보고서를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자. 이걸 보면 뭔가가 떠오르리라. 다시 말하지만, 위대한 프랑스의 지성을 물려받은 내 사전에 해결 못할 사건이란 없다.
<오션스 일레븐>
연도/ 2001년
피해자/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황제 테리 베네딕트
피해물/ 카지노 지하 금고에 보관된 약 1억5천만 달러
용의자/ 강도 대니 오션과 10명의 동지
사건경과/ 라스베이거스 경찰의 부탁을 받고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대니 일당이 한탕하고 달아난 뒤였다. 성깔 사나운 카지노 사장 베니틱트씨는 늦었다며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댔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퇴역한 이후로는 대서양을 넘는 데도 한참이 걸리니 말이다. 그쪽 경찰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오션 일당 사건은 완벽한 공동작업의 산물인 듯하다. 도둑질에 참여한 인원만 모두 11명. 대니 오션은 카드의 달인인 러스티, 천재 소매치기 라이너스, 폭파 전문가 배셔, 중국인 곡예사 옌, 현역에서 은퇴한 사기꾼 사울 등 각자 특이한 능력을 가진 놈들을 모조리 불러모았고, MGM 카지노 체육관에서 레녹스 루이스의 헤비급 복싱경기가 열리는 날을 거사일로 골랐다. 게다가 대니 일당이 카지노 사장에게 금고에 설치된 폭탄을 CCTV로 보여주며 여차하면 다 폭파하겠다고 협박한 모양인데, 알고 보니 그건 금고와 똑같이 생긴 가짜 세트에서 미리 녹화한 영상이었다. 대니 일당은 경찰이 (대니 일당이 타고 있을 거라 생각한) 무선조종 자동차를 쫓는 동안 S.W.A.T(경찰특공대)인 양 유유자적 카지노로 들어와서 임무 완료.
결론/ 이들에게는 범행의 기본수칙이 세 가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인명을 해치지 말것. 둘째, 무고한 사람의 금품을 털지 말 것. 셋째, 이판사판의 정신으로 도둑질에 뛰어들 것. 테리 베네딕트가 무고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내 알 바 아니나, 왜 이리 늦게 도착했냐며 눈알을 부라리는 걸 보니 절대 유고한 놈인 듯하다. 대니 오션, 잘했다.
<이탈리안 잡>
연도/ 2003년
피해자/ 에드워드 노튼을 닮은 전직 강도 스티브
피해물/ 3500만 달러어치 금괴
용의자/ 금고털이 고수인 존 브릿저의 외동딸 스텔라와 존의 후배인 찰리 일당
사건경과/ 이 사례는 내부 분열의 결과인 듯하다. 이들은 이미 베니스에서 금괴를 강탈한 전력이 있는데, 이때 스티브라는 놈이 동료들을 배신하고 혼자 금괴를 독식한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범죄는 스티브를 응징하려는 전 동료들의 협동작전인 셈. 어쨌든 이들이 베니스에서 벌인 금고 강탈 작전은 그야말로 오션 일당 저리 가라였다. 이들은 2층 건물에서 거대한 금고를 통째로 도둑질하기 위해 건물 곳곳의 거리를 세밀하게 측정한 뒤 금고가 놓인 바닥과 천장을 함께 폭파시켰다. 게다가 똑같은 방법을 반복하는 대담함까지 보여준다. 찰리 일당은 러시 아워로 붐비는 거리에서 대형금고를 실은 트럭 밑부분을 폭파해 트럭과 금고를 동시에 보도 지하로 떨어뜨렸다. 물론 이처럼 인상적인 도둑질 실력은 라스베이거스의 대니 오션 케이스처럼 단합된 팀워크의 결과로 것으로 보인다. 폭파 전문과 짝귀, 자동차 운전의 귀재인 롭, 타고난 전략가 찰리. 특히 자동차 노선을 마음대로 조작함으로써 경찰의 추격을 피하게 만든 컴퓨터 전문가 라일의 해킹 실력도 일품이다. 게다가 좁은 길을 자유자재로 달리기 위해 영국 자동차 미니 쿠페를 이용한 것도 칭찬할 만하다. 미국 경찰들은 만날 커다란 포드를 몰고 추격을 벌이지만, 이제는 기름도 적게 들고 신속한 소형 자동차를 애용할 때도 되었다. 우리 프랑스인처럼.
결론/ 자랑스런 프랑스인인 나로서는 이탈리아 금괴가 어느 도둑의 손에 들어가건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로마 시절 땅을 아직도 파먹고 사는 이탈리아 친구들이 금괴를 잃건 말건, 나로서는 알 거 없다.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연도/ 1999년
피해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인 줄 알았으나 결국 피해자 없음)
피해물/ 모네의 그림 ‘저녁놀에 쌓인 베네치아 궁전’
용의자/ 제임스 본드를 닮은 억만장자 토마스 크라운
사건경과/ 돈 많은 부자 장난에 걸려든 뉴욕 경찰들이 딱하기 그지없었던 케이스. 경찰은 오랫동안 모네의 그림 <저녁놀에 싸인 베네치아 궁전>을 훔친 혐의로 억만장자 토마스 크라운의 뒤를 밟아왔다. 이건 아마도 사실인 모양이다. 문제는 토마스 크라운이 훔친 그림을 감쪽같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반환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모두 얼굴을 아는 억만장자 토마스 크라운이 어떻게 해서 경찰들이 득시글거리는 한낮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훔친 그림을 돌려놓았단 말인가. 알고 보니 별거 아니다. 그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인 <중절모의 남자>와 똑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을 박물관에 잔뜩 풀어놓고 자신도 똑같은 복장으로 잠입해 경찰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는 감쪽같이 그림을 돌려준다. 잠입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림을 되돌려놓는 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고? 알고 보니 크라운은 이미 오래전에 훔친 그림을 돌려준 상태였다. 그는 솜씨 좋은 위조범에게 부탁해 모네의 유화 위에 수채물감으로 다른 작품을 덧입혀서 박물관에 이미 기증했다. 크라운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다시 잠입한 이유는 일부러 화재경보를 울리게 하기 위해서다. 화재경보가 울려 천장에서 자동 스프링쿨러가 물을 쏟아내면 모네 그림 위에 덧입혀놓은 수채화가 녹아내리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림은 이미 돌려준 상태였고, 크라운은 훔친 그림으로 재미와 스릴을 만끽했고, 경찰은 완벽하게 농락당한 케이스다.
결론/ 우리 위대한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라면 이런 억만장자 도둑놈 따위에게 놀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인들이란 때때로 지나치게 아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