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구스 반 산트의 걸작 <라스트 데이즈> [1]
2006-05-0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커트 코베인이 죽은 지 12년이 지났다. 그의 죽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시대의 상처로 남아 있다. 94년 같은 해에 절친한 친구이자 배우인 리버 피닉스를 이미 죽음의 신에게 빼앗긴 적이 있던 구스 반 산트는 <게리> <엘리펀트>에 이어지는 삼부작 마지막 작품으로 커트 코베인을 다룬 <라스트 데이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존했던 커트 코베인에 관한 전기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는 지금 누구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포착하려 한다. <라스트 데이즈>는 놀라운 영화다.

이렇게 시작해보자. 만약 누군가 김광석의 죽음과 그 직전의 며칠간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는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일견 제기되었던 타살 의혹에 기대어 김광석이 죽음에 이른 과정을 치밀하게 재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서른세해 동안의 일생을 숭고하게 기억할 것인가 또는 다른 무엇을 담을 것인가. 구스 반 산트가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나날을 소재로 만든 영화 <라스트 데이즈>는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다름 아닌 심정을 선택한다. 그 심정을 시공간으로 끌어내 한편의 아포리즘을 만든다. 그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흥미로운 점이다.

커트 코베인은 1994년 4월5일 세상을 등졌다. 재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와 짐 모리슨이 그랬던 것처럼 27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청년이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전기기술자가 경보장치를 설치하기 위해 그의 저택을 방문한 4월8일 오전이었다. 그의 죽음은 곧 자살과 타살 가능성으로 얼룩졌다. 부인이자 뮤지션인 코트니 러브가 유력한 타살 의혹의 배후자로 떠올랐고, 코트니 러브에게 살인청부를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한 LA의 어느 뮤지션은 그 발언 뒤에 갑자기 사고로 죽었다. 사건 의뢰를 맡았던 사립탐정 역시 러브를 의심했고, 러브의 아버지도 동의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둘러싼 의문은 끊이지 않고 불거져나왔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여기서 길게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라스트 데이즈>에는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구스 반 산트는 이러저러한 논란에 주석을 달지 않는다. 대신 다른 눈으로 본다.

<게리> <엘리펀트>를 잇는 ‘라스트 모멘트’ 3부작

구스 반 산트가 <라스트 데이즈>를 처음 구상한 것은 1996년이었다. <게리>와 <엘리펀트> 이전에 먼저 구상되었다는 말이다. 초안은 한 소년이 하루종일 혼자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소일한다는 내용이었다. <라스트 데이즈>에서 주인공 블레이크의 행동들은 거기에서 확장된 것이다. 그것에 커트 코베인의 상황이 결합된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마이클 피트와는 1997년 처음 만났고, 그 뒤로 의견을 교환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이클 피트는 영화 속에서 블레이크라는 이름으로 커트 코베인의 재림을 구현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게리>와 <엘리펀트>에 참여했던 프로듀서 대니 울프,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스, 사운드디자이너 레슬리 샤츠를 빼놓으면 안 될 것이다.

애초에 구스 반 산트는 <라스트 데이즈>를 전통적인 전기영화로 만들 생각도 했었다. 1967년 2월20일 워싱턴주 에버딘 근교에서 태어나 8살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충격을 받은 바 있고, 학창 시절에는 외톨박이로 지냈고, 1987년 20살 때 너바나의 전신 피컬 매터를 결성한 뒤 1989년 첫 앨범 <블리치>를 발표하고, 1991년 11월 발매된 <네버 마인드>로 넉달 만에 300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우며 일약 언더 뮤지션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뛰어올랐고, 결혼과 함께 불행의 새장에 갇혔다고 커트 코베인을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너바나의 음악을 단 한곡도 영화에 넣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이 영화는 평범해졌을 것이다. 그런 경우 짐 모리슨의 음악적 일생을 다룬 올리버 스톤의 <도어즈>와 얼마나 차이점을 가졌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구스 반 산트는 인물 탐구에 그리고 미궁에 빠진 실제 사건에 예민한 감독이다. “대부분의 내 영화들은 <카우걸 블루스>와 <파인딩 포레스터>를 제외하곤 실제 사건에 기초한다. <아이다호>도 내가 알고 있던 실제 어떤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도 실제로 그런 마약 집단의 멤버였던 남자에 대한 내용이었고. <굿 윌 헌팅>도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스 반 산트가 인물 탐구와 실제 사건에 기초한 영화의 예로 든 전작들은 <라스트 데이즈>와 성격이 다르다. 그 영화들은 서사와 캐릭터의 다면성에 기대고 있다. 예를 들어 <투 다이 포>의 야망에 불타는 여주인공을 그려내는 방법은 마치 <시민 케인>의 고전적 방법을 다각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같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실험영화에서 영화적 자양분을 얻은 구스 반 산트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길은 아니었다. <굿 윌 헌팅>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관습적인 매끄러움 그 이상이 없는 영화다. 구스 반 산트는 오히려 비주얼과 사운드라는 영화의 모든 것 혹은 그 양날의 한계만을 갖고 도전할 때 훨씬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일종의 삼부작 형태를 띠게 된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다.

실재가 남긴 잔영을 구조화하다

세 영화를 구스 반 산트는 모두 신문 기사를 읽고 나서 소재로 결정했다. 두 청년이 사막을 가로질러 가길 시도했으나 둘 중 한명만 사막을 건너 집으로 되돌아왔다는 <게리>의 내용. 어느 날 컬럼바인고등학교의 남학생 두명이 난데없이 총기를 난사해 급우들을 죽였다는 <엘리펀트>의 내용. 그리고 며칠간 실종되었다가 갑자기 주검으로 발견된 커트 코베인의 사망 내용. 그들은 모두 죽기 직전 한정된 세상의 공간(사막/학교/집)을 잠시 떠돌았고, 영화는 그 시간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연작을 ‘라스트 모멘트 삼부작’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중요한 건 이 기사들이 그에게 어김없이 동일한 단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누락된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게리>의 경우 사막으로 들어섰던 두 청년이 있지만 한명만 돌아왔다. 이야기의 오직 한쪽만 있는 것이다. 컬럼바인 총격사건 역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질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커트 코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그가 죽기 며칠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다 알지 못한다.”

컬럼바인 총격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다뤘던 마이클 무어는 정치적 호소를 위해 “그 아이들이 아침에 친 볼링의 손맛을 잊지 못해 총을 쥐어든 것”일 거라고 추정했다. 그리하여 부시와 아이들과 컬럼바인 사건을 갖은 루트를 동원하여 연계한 뒤에 정치적으로는 투철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잡다한 수준의 결론에 도달한다. 마이클 무어는 이 사건의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투다. 그건 역으로 누구도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마이클 무어만이 주장할 수 있는 진실이 되었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모두가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삼부작의 공통 출발선으로 잡았다. 그가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이었을 거다. ‘도대체 나는 무얼 알고 있고, 무얼 모르는 걸까.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캐내려하기보다 그냥 아는 것만 모아 영화를 만들 순 없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어떤 미학이 필요한 걸까.’

구스 반 산트는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와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에 그의 삼부작이 영향을 받았다고 줄곧 고백해오고 있다. 벨라 타르의 회고전 뒤풀이에서 평론가인 수잔 손택(벨라타르의 열렬한 지지자)과 대화하다, “나도 벨라 타르 무비를 하나 만든 게 있다”고 말하곤, 그 영화를 다음날 보여줬고, 그녀의 지지를 얻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물론 벨라 타르와 샹탈 애커만의 영향을 눈여겨볼 수도 있다. 하지만 창작자가 누군가에게 영향받았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떠들고 다니는 건 좀 거슬리는 일이다. 차라리 이건 그냥 참고했다는 정도로 듣자. 대신 이 세 작품 사이에 있는 연계와 단절을 주목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구스 반 산트는 <게리>를 “반-점프컷(Anti-Jumpcut)의 영화”라고 부른다. 그건 시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현한 자신의 롱테이크 촬영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분명한 것은 <게리>가 시간을 물리적으로 보존하는 데 우선한 것에 반해,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는 이제 시간을 해체하여 재조립하는 입방체로 성격을 바꾼다는 점이다. 롱테이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섞여들어 역할을 부여받는다. 예컨대 <라스트 데이즈>에서의 한 장면이 그렇다. 저택 안에서 연주하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집 바깥에 놓인 카메라는 긴 롱테이크로 잡고 뒤로 빠지며 한참을 응시한다. 그 순간 프레임 안의 동작과 바깥의 사운드는 불일치하며, 그걸 보고 듣는 자는 자꾸만 블레이크에게서(커트 코베인에게서) 멀어진다. 거기에 무한한 슬픔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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