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구스 반 산트의 걸작 <라스트 데이즈> [2]
2006-05-0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시간의 조립과 공간의 은유와 소리의 불일치

<엘리펀트>에서 인물들은 여러 번 같은 순간을 다시 지나친 뒤에야 최종에 도달한다. <라스트 데이즈>에서 주인공 블레이크의 시간은 더 현란한 방식으로 재조립된다. 시간적으로 어떤 한 장면이 앞에 있는 것인지 혹은 뒤에 오는 것인지는 반드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나서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것도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시간은 왜 뒤섞여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구스 반 산트는 그걸 통해 블레이크의 몸에 관객의 감각을 입히려고 한다. 뒤죽박죽으로 시간을 느끼도록 하는 이 장치는 관객이 망가진 블레이크의 몸의 상태로 들어가 그 시간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과도 같다. 혼몽의 어지럼증은 그렇게 생긴다. 시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순간을 어떻게 연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는 <게리>와 비교하여 더 정교하게 진전된 미학적 차원을 갖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엘리펀트>에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회적 논평이 필요할 만한 사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태도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스트 데이즈>는 거기에 대한 대답이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는 실제 사건에 기초하지만, 더 정확히 말해 그저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영감은 본능적으로 실재를 수정할 권리를 갖는다. 게다가 영감이 어떤 미완의 사실로만 알려진 사건에서 비롯되었을 경우, 그리고 창작자가 그걸 방점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이후라면 더더욱 논리적인 해명으로 끌리지 않는다. 그 순간 그런 해명의 욕구에 끌리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어떤 나름의 시각으로 형상화할 것인지가 더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 구스 반 산트는 <라스트 데이즈>에서 혹은 <엘리펀트>에서 실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남긴 잔영을 다룬다. 다들 보고 떠드는 신문의 한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 미처 적히지 않은 인상을 잡으려 한다. 인과율이 없다느니, 무책임하다느니 하는 말은 그래서 성립이 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풍문과 반쪽 사실로만 전해진 그 ‘실재의 잔영을 구조화’하는 작업이며, 그 문제에 대한 구스 반 산트식의 해석 방법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이 바로 구스 반 산트가 취한 윤리적 자세이기도 하다.

<라스트 데이즈>의 스토리 라인을 설명하는 것은 그래서 부질없는 짓이다. 영화가 요구한 보기의 방법을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라스트 데이즈>는 스토리의 구조에 기대고 있지 않다. 영화 속에는 전화번호부 광고 직원과 모르몬교도들과 음반사 중역과 사립탐정이 번갈아가며 블레이크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블레이크는 그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술래잡기하듯 피해다니기 일쑤다. 이들의 방문은 실제와 상상의 뒤섞임인데, 커트 코베인의 생전의 인간관계들을 캐릭터의 관계 내지 영화의 플롯 안에 녹여넣은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면 시간과 캐릭터의 조립만 있는 게 아니라 공간적 은유도 있다. 첫 장면에서 블레이크는 마치 약에 취한 듯 숲속을 헤매고, 계곡에서 미끄러지고, 늪을 허우적거리며 걷는다. 우리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건 실제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왜 블레이크는, 커트 코베인은 저기 저러고 있는가, 라며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구스 반 산트는 말한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관객은 그가 어디서 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가 등장하는 방식 그대로 그를 표현하고 싶었다. 누구이고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 등을 모두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 내내 이런 불친절함에 시달려야 하지만, 그건 흥미로운 수고다. 숲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망설이고 있는 블레이크는 더도 덜도 아닌 커트 코베인의 불행한 마지막 나날에 대한 묘사이며 공간적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블레이크가 집으로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그가 살고 있는 음산한 대저택과 그 옆에 달린 조그만 별채. 블레이크는 자신의 휴식처로 혹은 마지막 장소로 허름한 그 별채를 선택한다(이건 실제로도 그랬다). 이 장면들 안에는 불친절함에 몸을 맡기고 보아야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형상의 영화 혹은 시네마토그래피

시간과 공간이 마음대로인데 소리라고 현실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사운드의 활용은 <라스트 데이즈>와 그 이전의 두편을 가르는 가장 큰 요소이며, <라스트 데이즈>의 가장 아름다운 면면이다. 블레이크가 혼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특정한 소리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된다. 이때 우리는 눈이 아니라 귀를 열어야 한다. 종이 울리고, 풍금이 울리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떠들고, 새가 울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온갖 종류의 문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닫히는 문소리… 그건 블레이크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도, 멍하니 앉아 텔레비전을 응시할 때도 들려온다. 이때 들려오는 것의 실체는 힐데가르트 베스테르캄프의 구체음악 <지각의 문들>(Doors of Perception)이다. 그러나 그게 누구의 음악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소리가 문을 여닫는 연쇄라는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문소리들은 아무리 화면을 들여다봐도 그 안에 소리의 진원지가 없다. 그것은 블레이크의 머리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디제시스 공간(스토리가 진행되는 프레임 내의 공간) 내에 있을 리가 없다. 텔레비전에서는 보이즈 투 맨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블레이크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위험스러운 지각의 문소리들을 들어야만 한다. 이 소리가 어디서, 왜 들려오는지 느끼려고 할 때 우리는 블레이크와 커트 코베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시간의 조립과 공간의 은유와 소리의 불일치. 그것이 예고한 불운의 끝은 알다시피 죽음이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예고없이 찾아왔듯, <라스트 데이즈>에서 블레이크의 죽음도 그렇게 조용히 도착한다. 블레이크의 영혼은 육신을 벗고 천천히 일어나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알게 된 비겁한 친구들은 거기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어디론가 부리나케 도망친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킹스 싱어즈의 (원래는 발랄하게 들렸던) 음률의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온다. 구스 반 산트는 커트 코베인에 대한 생각을 그걸로 끝낸다.

<라스트 데이즈>는 삼부작 중에서도 구스 반 산트의 창작력이 도달한 어떤 봉우리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합으로만 이를 수 있는 희귀한 ‘형상의 영화 혹은 시네마토그래피’다. 형상을 추구하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중에서도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정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 난 건 <라스트 데이즈>다. 그런 영화는 일단 만들기가 어렵고, 잘 만들어도 그걸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구스 반 산트는 <파인딩 포레스터>도 만들고, <굿 윌 헌팅>도 만든다. 어쩌면 <라스트 데이즈>를 보는 관객은 불평을 할 수도 있다. 커트 코베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훌륭한 영화에는 언제나 자기만의 이미지 교육학이 있음을 믿자. <라스트 데이즈>에 있는 그것은 눈과 귀를 본능적으로 사용하라, 이다. 때문에 보고 들으며 영화가 끄는 대로 집중하면 되는 일이다. 기복이 심한 구스 반 산트가 오드리 니페네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다음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도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 거라고 장담하긴 힘들다. 그러나 <라스트 데이즈>는 경지에 도달한 작업이며, 한마디로 걸작이다.

<라스트 데이즈>의 숨은 주역들

컨셉, 영상, 소리의 신세계를 비추다

대니 울프(왼쪽)와 해리스 사비데스

컨셉과 영상과 소리. 이 세 가지가 독창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라스트 데이즈>다. 그 때문에 프로듀서 대니 울프,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스, 사운드디자이너 레슬리 샤츠를 제외하고 <라스트 데이즈>의 성과를 말하기는 힘들다. 세 사람은 모두 <게리> <엘리펀트>에도 참여한 바 있다. 바로 구스 반 산트의 삼부작 완성을 가능하게 한 3인방인 셈이다. 프로듀서 대니 울프는 단편에서 뮤직비디오, 상업광고까지 두루 걸쳐온 전문 프로듀서다. 96년에 구스 반 산트와 상업광고 및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처음 만난 뒤, 97년에 단편 <해골의 발라드>, 98년에 장편 <사이코>를 같이 한 바 있다. 한편,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스는 전형적인 뉴요커로서 패션 사진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상업광고와 뮤직비디오를 거쳐 촬영감독으로 거듭났고, 마돈나, REM, 피오나 애플 등의 뮤직비디오 그리고 구스 반 산트의 <파인딩 포레스터>를 거쳐 삼부작을 함께하게 됐다. 제임스 그레이, 존 터투로,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와 왕가위의 BMW 상업광고를 찍은 바 있는 감각적인 장인이다. 아마도 <라스트 데이즈>의 가장 뛰어난 협력자는 레슬리 샤츠가 아닐까 싶은데, <미이라>로 99년 아카데미 베스트 사운드 부문에 노미네이션되기도 했던 그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 밥 라펠슨의 <블러드 앤 와인>을 작업한 경력이 있다. “결국 구스 반 산트는 화가다. 캔버스에 무엇을 그릴가 하는 것은 구스 반 산트에게 달려 있다. 그의 창조적 비전보다 우선하는 건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그것을 완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프로듀서 대니 울프는 그렇게 말했지만, 한편으로 이들의 협업이 아니었다면 <라스트 데이즈>라는 명작의 탄생은 요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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