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549호 이종도 기자의 반론 덕분에 지면관계상 충분히 설명치 못한 내용을, 재반론의 기회를 통해 설명할 수 있게 된 데 감사한다. 아울러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의 이름을 신성시하는 지식인 남성의 반론으로 말미암아, <달콤, 살벌한 연인>과 나의 ‘읽기’가 얼마나 남성 중심주의와 지식인의 자의식을 건드리는지 저절로 입증된 듯하여 기쁘다.
1.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어린 그녀는 “남성 중심 성관계를 역이용하는 영리한 여자”가 아니다. 남자친구는 그녀를 놓고, “한번 하게 해주겠다”며, 가방모찌와 동생을 싸움 붙이고, 동생이 우세하자 “1학년한테도 지냐?”라 한다. 남자친구는 그녀의 포주 역할을 하면서, 남자들을 줄세우기한다. 그녀도 그것을 알면서 은근히 즐긴다. “네가 이겼다며?”란 말은, 슬쩍 상대의 우위를 승인해주며 ‘사실 난 너랑 하고 싶다’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관계 속에서 꼬리를 치든 말든, 그건 ‘이미 분배된 뒤 교환되는’ 정도의 문제이다. 남자친구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동침은 언제나 그의 권력의 장 안에서 훤하게 드러난다(“했냐?”). 영리한 여자는 그런 관계를 즐기지 않는다.
2. <달콤, 살벌한 연인>의 그녀는 연애에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어렵게 데이트를 청하는 소심남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흔쾌히 수락하고, 연락처를 주고받는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과 반말하는 것, 혼자서 즐거웠다 선언하는 것에 단호하게 “노”라 말한다. 남자가 자신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것 같자, 과단성있게 철수한다. 그녀가 살인자로 도피하는 것이 ‘자기 긍정’이 아니라, 살인자로 도피 중임에도 적극적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며, 내숭과 집착이 없는 솔직담백한 연애의 태도를 지닌 것을 ‘자기 긍정’으로 보았다.
3. 이종도가 “본명도 사연도 다 숨기고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책임감이 없다”고 평한 그녀를 영화와 황대우는 ‘용서’한다. 왜? 사랑하니까. 이 영화의 재밌는 점은 로맨틱코미디의 외피 속에 연애의 ‘살벌’함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연애의 시작은 언제나 달콤하다. 그러나 상대를 알아갈수록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상처받는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그 진실이 영화에선 강도 높게 살인이다(“사람만 안 죽였으면 돼”). 그러나 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투명한 연애는 없다. 하지만 사랑이 시험대에 오르는 고비들을 넘어 상대를 어렵게 이해하게 되면서, 기존의 잣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달콤…>은 소심한 지식인 남자가 살인자 여자를 만나 엄청나게 자아가 부서지는 영화이다. ‘혈액형 설’의 계보학을 읊던 그가 “A형이라서 그래”라 말할 때, 그는 이전의 그와 같다고 볼 수 없다. 사랑은 그의 인식체계와 가치관을 (부분적이나마) 바꾼다. 본명과 사연을 몰라도 그들이 사랑한 게 모두 거짓이었을까?
4. 살인자가 되는 전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렸다’고 말할 수 없고, 대사로 처리되는 사연들은 영화적 사실이 아니며, <달콤…>에서 살인자 설정은 “미미한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이종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녀의 네번의 살인이 “짤막한 전언과 누가 현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정당방위의 순간이 전부”라는 말로 요약되지 않는다. 왜 행간을 읽지 않는가? 첫 번째 ‘가정폭력에 의한 정당방위’도 적극적인 법정투쟁을 거쳐야만 인정될 수 있는 유의미한 ‘사건’이다(현재 수감 중인 133명의 남편살해범 중 82.9%가 가정폭력을 경험했지만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두 번째 노인의 죽음도 혐의점을 남기지 않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 번째, 맥주캔을 던지는 옛 애인(옛 애인이 행패 부리는 장면들은 많다. <파란 대문> <너는 내 운명> 등. 여자는 불행을 내면화하며 항거하지 못하고, 자해를 하거나 도망친다)을 그녀는 죽여버린다. 이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가 현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실수”에 비슷하게라도 맞는 사건은 네 번째인데, 그것도 “누구나”는 아니다. 어찌나 굉장했던지, 그녀를 질시하던 장미도 단번에 꼬리를 내려버린다(“말로 들을 땐 몰랐는데… 어쩜 그렇게 빨라?”). 네번의 살인 중 만만한 것은 한건도 없었다. 그녀가 운이 나빠서 “실수로” 살인을 하게 된 게 아니라, 그녀가 강하기 때문에 넷을 죽이고도 사법체계와 계동이, 장미, 변호사 등 앞길을 방해하는 이들을 제압하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살인의 과정에서 점점 능력이 많아진다. 첫 번째는 우발적인 살인을 하고 사체유기도 하지 않은 채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두 번째는 살인을 위장하고 기소받지 않는다. 세 번째는 남의 차와 힘을 빌려 사체유기도 감행한다. 네 번째는 부하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사체를 유기한다. 그녀의 실력이 점점 느는 이유는 누구를 만나든 꼭 뭔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말하는 그녀에게 책은 책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된다. 계동에게선 땅파는 법을, ‘가방끈’에게선 <죄와 벌>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목하고픈 ‘자기 긍정’이다. 이종도가 그녀의 살인이 풍문이거나 정당방위 혹은 실수에 불과하다며 애써 그녀의 죄목을 축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넘어선 금기를 차마 인정할 수 없기 때문 아닌가?
5.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나 죄의식없는 살인은 트렌디한 장르적 실천으로 보는 게 온당하다”는 말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과연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나 죄의식없는 살인이 트렌드가 되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마초이즘과 순결이데올로기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가 트렌드가 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창작자와 관객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각성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를 우리 시대의 트렌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잘 드러난 작품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죄의식없는 살인’이 아직 트렌드인지는 모르겠다.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 공주> <6월의 일기> 모두 죄의식이 넘치는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장차 트렌드를 선도하는 영화가 되리란 예감은 든다.
6. <몬스터>가 “그녀를 하소연이나 늘어놓는 멍청하고 추한 몬스터로 그렸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에일린 워노스의 실제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공판기록만큼도 그녀를 변호하지 못한다. 김경욱의 지적처럼(<씨네21> 460호 ‘멜로드라마의 틀로 포획된 괴물’) 그녀는 현실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한 여자로 그려져 있다. 연쇄살인범을 옹호하려니 살인을 정당화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멜로드라마로 도망친 결과 (착취-피착취의) 기괴한 레즈비언 커플만 남았다. 대사로는 그녀를 이해해달라 말하면서도, 화면으로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태로 내모는 역설의 영화가 된 것이다. 성판매여성으로 7명의 남자를 죽이고, 남자들의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킨 정당방위였다는 주장을 펴는 그녀에게 법정은 ‘그녀가 창녀이기 때문에 성폭행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녀의 무죄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적 논리는 ‘그녀가 성판매여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구매남성들의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았다’가 되어야 한다. 성판매자의 영업행위와 성폭력을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영업행위를 빌미로 남자들을 유인해서 죽였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의 부당함을 고발했어야 옳다. 그러나 영화는 쟁점을 놓치고, 신파와 멜로 사이를 헤맸다.
7. <망종>은 아주 훌륭한 영화라 생각한다. ‘너무 유별나다’는 말도 맞다. 몇년에 하나 나올까 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립스틱> <성냥공장 소녀>는 과문한 탓에 보지 못했지만, 이종도의 식견으로 보건대 필적할 만한 걸작일 것이다(나도 걸작 여성살인자 영화 한편을 추천한다면, <시리얼 맘>을 꼽고 싶다). 그러나 언급한 영화들이 ‘주류’ 상업영화는 아닐 것이다. 내가 여성살인자를 그리는 방식을 유형화한 것은 “트렌디한 장르적 실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대중 상업영화에 한한 것이다.
8. “그녀가 살인을 하게 되는 배경도 라스콜리니코프적 상황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이 왜 중요한지 모를 일이다. 영화 속 <죄와 벌>의 인용이 적확하다는 나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라스콜라니프적 상황에 합치된다는 뜻이 아니라, ‘관념과 실천의 차이’를 절묘하게 보여준다는 뜻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굉장히 위험한 도덕관념을 지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대단할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인물이다. 19세기엔 그것이 신의 율법에 도전하는 금기의 상상이었지만, 20세기엔 실제로 떡 벌어진 역사이다. 생각이 무서운 게 아니라, 힘, 의지, 조직이 무서운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 뒤후 신열에 시달리다가 죄의식에 자수한다. 그러나 그녀는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가치한 자’의 ‘유가치한 유산’을 잘 쓸 생각이다. 누가 그 관념을 끝까지 실천(체현)했는가? 그녀는 <죄와 벌>을 읽은 사람보다 <죄와 벌>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더 가깝다.
9. “그녀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어지럽히기 위해 다 알고서 저지른 일처럼 과도한 사후 해석”을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해체’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다 알고서 저지른 일”이 당연히 아니다. 그녀에게 앎은 사후적이다(반면 황대우에겐 행동이 사후적이다. 데이트 뒤에 “아까… 라 말하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통해 행동할 뿐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평론가)의 몫이다. <죄와 벌>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니체 역시 알지 못하지만, 니체 책도 꽤나 읽었을 법한 황대우보다 니체적인 정신과 태도에 훨씬 근접해 있다.
10. <달콤…>에서 “신경질적이고 괴팍하고 고고하며 허약한 남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종도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른바 ‘정상적인’ 독법이요, 특히 지식인 남성관객이라면 자연스럽게 그에게 눈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영화읽기의 정답은 아니다. 누군가는 장미나 계동이 캐릭터에 열광할 수도 있다. ‘소수적 읽기’가 가능한 것이다.
언제나 대중 상업영화들 속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발언하려는 나의 노력이 어쩌면 “줄없는 줄넘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줄이 있어도 보고자 하지 않는 이에겐 안 보이는 법이요, 설사 줄없는 줄넘기라 할지라도 운동의 효과는 거의 같다(그리고 “니코틴 없는 담배” 등 지젝의 비유는 ‘위험성을 제거한 수용’의 의미로, 그 용법이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