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근대의 사슬을 끊고 탈주하다, <쇠사슬을 끊어라>
2006-05-2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서부극의 관습 전복하고 자율적 개인 찬미하는 이만희의 <쇠사슬을 끊어라>

이만희 역시 동시대 한국 감독들처럼 다작의 감독이었다. 1967년에는 <귀로>와 <원점>을 포함해 한해 동안 11편이라는 믿을 수 없이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갑자기 중단된다. 그리고 1971년에 단 한편의 영화 <쇠사슬을 끊어라>를 내놓는다. 이 영화는 그의 영화 이력에서 유일하게 긴 휴지기를 거쳐 태어난 영화다.

이 영화를 범주화하는 건 간단하다. <쇠사슬을 끊어라>는 정창화가 1960년부터 개척했고 임권택, 신상옥 등 당대의 감독들이 가담하며 번성한 만주액션 혹은 대륙활극이라 불리는 장르에 속한 영화다. 이 장르의 요체는 미국 서부극을 한국적으로 번안하면서 개척기 서부를 일제시대의 만주 벌판으로, 서부 사나이를 민족 영웅으로 대체하는 것이다(드문 예외가 주인공의 지역성을 탈색한 신상옥의 <무숙자>다). <쇠사슬을 끊어라>의 주인공도 결과적으로 민족 영웅이 된다. 여기에다 오토바이 추격, 말 위의 결투, 설원 전투 등의 볼거리도 곳곳에 배치돼 있다. 이 영화는 노골적인 오락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쇠사슬을 끊어라>에 감동받은 이유와 관계없다.

이만희의 작품을 연도순으로 놓을 때 이 영화의 자리는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가장 어두운 <휴일>(1968)과 <생명>(1969)이 바로 앞에 놓여 있으며, 긴 공백 끝에 그의 가장 명랑한 <쇠사슬을 끊어라>가 등장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과도한 감정의 비약에는 절망을 껴안고 굴욕을 필사적으로 버텨내려는 이만희의 안간힘이 숨어 있다. 폐쇄공포증을 운명으로 짊어진 위대한 시네아스트가 기어이 빛의 광야로 나서려는 안간힘, 그리고 그것이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주인공을 신화의 시공간으로 떠나보내는 자의 비애가 거기 있다. <쇠사슬을 끊어라>는 걸작이 아니지만 이만희의 7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다.

대조되는 두 계열의 결합으로 구성된 서사

당대엔 돋보였을 이 영화의 스펙터클은 오늘의 눈으로 보기엔 대단한 게 아니다. 주인공들은 1930년대의 만주에 있을 법하지 않은 매끈한 오토바이로 격렬한 추격신을 벌이고, 난데없이 눈덮인 산을 스키로 통과하며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지프도 추격장면에 종종 등장하지만 대체로 어설프다. 달건과 일본군이 말 위에서 벌이는 액션신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어색하다.

이만희는 액션 연출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규모와 소재의 차이가 있다 해도 정창화가 이미 1960년대 중반에 예컨대 <나그네 검객과 황금 108관>에서 보여준 매끈한 액션 편집을 여기서 찾기는 힘들다. <귀로>가 웅변하듯 폐쇄 공간에서 더욱 빛나는 이만희 특유의 다양한 앵글 숏 몽타주나 반응 숏과 풍경 숏들의 예민한 편집 솜씨도 이 영화에선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다른 데 있다.

<쇠사슬을 끊어라>

<쇠사슬을 끊어라>는 티베트 불상에 관한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만주 마적이 소유하고 있는 이 불상은 특수처리를 하면 독립군 명단이 표면에 나타난다. 곧이어 세 사내가 각기 한 장소로 몰려드는 장면이 몽타주된다. 일본군 마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도적으로 불리는 사내(장동휘), 지프를 타고 달려오는, 독립군의 청부를 받은 전문 절도범 철수(남궁원), 그리고 말을 타고 달리는 일본군 앞잡이 달건(허장강). 도적은 불상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며, 철수와 달건은 도적을 이용해 불상을 찾은 뒤에 탈취하려 한다. 세 인물은 모두 도둑 혹은 무법자이며 목적은 하나다. 불상을 찾아 원하는 이에게 넘기고 돈을 버는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빤한데, 우여곡절 끝에 셋은 불상을 찾아 결국 독립군에 넘겨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티베트 불상일까. 혹은, 왜 고려 불상이 아닐까. 그리고 왜 독립군의 명단이 꼭 불상에 새겨져 있을까. 혹은 왜 그냥 종이에 특수 잉크로 씌어져 있지 않은 걸까. 여기서 <쇠사슬을 끊어라>가 대륙활극 장르의 관습과 교섭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작위적으로 설정된 이 불상에는 이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내는 두 계열이 결합돼 있다. 하나는 독립군 명단으로 환유되는 지역적, 역사적 시간/집단/정신의 계열이다. 다른 하나는 티베트 불상으로 환유되는 탈지역적, 신화적 시간/개인/육체의 계열이다. 전자가 독립군과 일본군을 움직이고, 후자가 도둑과 마적을 움직인다.

대륙활극의 관습과 서부극 클리셰의 전복

이 영화는 그 자체가 대륙활극에 대한 논평이다. 대륙활극은 이를테면 전자의 계열이 후자의 계열을 흡수한 장르다. 만주의 떠돌이 혹은 범죄자 주인공은 고통받는 혹은 영웅적인 동족을 만난 뒤 그들 편에 서서 헌신한다. 하지만 <쇠사슬을 끊어라>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대륙활극의 관습과는 반대로 전자의 계열을 사소화하고 후자의 계열을 찬미한다.

세 주인공은 전자의 계열에 연루돼 있지만 후자의 계열에 속한 인물들이며 끝내 전자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들은 “불상을 발견하면 서로 죽여서라도 혼자 차지하려는 놈들”이다. 도적은 처음부터 단독자이며 누구도 믿지 않는다. 달건은 일본군 앞잡이지만 그의 모토는 ‘배신’이다. 독립군과 연관된 누군가의 청부를 받았으며 가장 건전해 보이는 철수마저 한 독립군이 불상을 넘겨달라고 하자 “남의 영업 방해하지 마라”고 대꾸한다. 그들은 “최후의 배신을 위해” 건배한다. 재미있지만 가장 어처구니없는 장면. 바로 곁에서 포위당한 독립군이 일본군과 불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도적은 달건에게 “어차피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우리는 여기서 결판을 내자”고 말하고는 둘이서 주먹다짐을 벌인다.

<쇠사슬을 끊어라>의 교섭에는 물론 타협이 있다. 도적과 달건은 “저 사람들이 어려운 것 같으니 도와주자”며 나서 일본군 대장을 가볍게 생포하고 독립군은 전투에 승리한다. 그런 뒤 도적은 독립군 여장군에게 “우리에게 국적을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투항처럼 보이는 이 말은 본심이 아니다. 도적과 달건은 그렇게 말하고 그들끼리 떠난다. 철수 역시 대오각성하여 독립군에 합류하기는커녕 두 도둑의 여정에 합류한다.

이 결말은 서부극의 클리셰를 전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클리셰가 놓인 맥락은 좀 다르다. 서부 사나이는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한 뒤 문명화된 공동체를 등지고 황야로 달려간다. 그는 문명에 속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 자체가 일종의 신화인 서부극에서 공동체는 특정한 역사적 시간대의 특정 지역이 아니라 문명 일반 혹은 추상화된 문명을 표상한다. 서부 사나이는 문명을 등지고 황야로 떠난다(물론 이것은 순진한 문명비판이나 자연예찬이 아니라 양자와 연관된 질서와 가치의 대립항들 중에서 한쪽을 택하는 것이다. 예컨대 서부 사나이는 타협-조화가 아니라 제거-회복을, 가족의 유대보다 남성들의 연대를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대륙활극에서의 독립군 혹은 조선인 마을은 국가간의 적대행위가 깊이 개입한 특정한 역사적, 지역적 실체다. 하지만 세 도적이 독립군을 도운 것은 민족주의적 각성이 아니라 곤경에 빠진 타인에 대한 연민이자 개인적 명예율에서 비롯했다. <쇠사슬을 끊어라>의 세 도적이 마지막에 향한 곳은 역시 황야이지만 따라서 서부 사나이의 윤리를 부분적으로 공유하지만, 등진 것은 국적이라는 기표의 구속 혹은 집단주의로서 내셔널리즘이다. 그들은 각성하는 척하지만 실은 각성을 거부하고 탈주한다. 이것은 서부 사나이의 선택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서부 사나이는 레이건의 영웅이 될 수 있지만 이 세 도적은 박정희의 영웅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전근대적 집단주의를 희롱하고 자율적 개인을 찬미

<쇠사슬을 끊어라>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들이 극중에서 스스로 역할수행자로 의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서 일본군에 끌려가는 도적을 철수가 구출하자, 도적은 철수에게 “넌 고용된 배우지? 이런 유치한 연극은 단막으로 끝내는 게 좋아”라고 말한다. 일본군은 철수가 자백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일부러 구출을 방임한 뒤 그 뒤를 쫓아 불상을 찾으려 하며, 곧이어 달건은 그 감시자로 둘과 동행한다. 도적은 “1막2장에는 왜놈 앞잡이까지 등장하는군”이라고 내뱉는다. 달건이 불상을 독차지하려다 발각돼 쫓겨난 뒤에는 “너 이번에도 연극이지”라며 의심한다.

일본군이 작성한 연출을 처음부터 거부하면 그들은 바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도 죽는다. 일단 그들의 역할은 불상을 찾는 것까지다(그러나 불상이 찾아진 뒤 일본군은 새로운 연출을 시작한다). 불상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인물인 도적은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으므로, 일본군의 연출은 독립군이 원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불상이 발견되는 순간, 양자는 연기자들을 버리고 불상만을 취하려 할 것이다. 세 도둑은 배당된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거역해야 한다. 이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무서운 게임이며, 운명과의 자의식적 유희다.

세 도둑에게 부과된 역할 수행의 이중성(극중 일본군이 직접 연출한 연극, 그리고 인생은 연극이라는 은유로서의 연극 혹은 이 영화 자체)은 앞서 말한 두 계열과 조응한다. 그들은 전자의 계열, 즉 지역적 역사적 시간과 그 지배집단이 배당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것을 거역함으로써 자신의 개별적 운명과 육체를 자신이 관장하는 후자의 계열로 이행한다. <쇠사슬을 끊어라>는 이렇게 전근대적인 집단주의의 역할 수행론을 희롱하고 근대적인 자율적 개인의 성립을 찬미한다.

쇠사슬은 일본군의 구속이며, 동시에 전근대적 집단주의다. 세 도둑은 마침내 이중의 쇠사슬을 끊고 탈주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문명의 상대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무시간성의 광야다. 그곳은 어둠은 사라지고 빛만이 영원히 지속되는 공간이다.

그때까지 이만희의 영화는 오랫동안 밤을 살았다. 가부장제와 군국주의의 가옥에 갇혀 죽어가는 여인을 지켜보거나, 자신의 정한 계율에 처단당한 깡패를 응시하거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일요일 밤에 멈춰버렸거나, 광부를 구출하고 나서도 한없이 지하로 추락하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밤이 멈춘 광야를 비춘다. “밤은 이제 싫다. 밤은 외롭다. 태양은 쫓아 계속 달리면 밤은 없을 것이다.” 이 더없이 순진하고 쾌활한 낭만주의는 결국 실패할 운명이지만, 그래서 더 깊이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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