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붉은 악마, 가공할 재난에서 생존하기 [2]
2006-06-06
글 : 박혜명

미션 3: 지축을 뒤흔드는 아찔한 혜성 충돌 견디기

6월24일 토요일 오전 4시33분
G조 예선 6차전 스위스 VS 한국

토네이도가 서울 시내를 휩쓸고 간 며칠 뒤, 혜성이 지구에 충돌할 것이라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1년 전 발견된 이 혜성은 현재 지구와 충돌궤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직경 1.5마일, 길이 6마일로 뉴욕시 크기에 무게는 5천억톤입니다. 충돌 예상일은 6월26일, 지점은 대서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나사에서 발표한 이 뉴스는 전세계 유수 언론을 통해 “독일월드컵 중단 위기”라는 헤드카피로 연일 보도됐다.

광화문 앞 광장이 개박살난 까닭에 붉은 악마의 집결지는 양재동 시민의 숲으로 정해졌다. 야외음악당 주변의 나무를 100여그루 잘라내고 전광판을 세우는 대형 공사가 4일 만에 끝났다. 월드컵 응원에 대한 집착은 광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P씨에게는 자신이 속한 붉은 악마의 파시즘이 혜성 충돌 뉴스보다 소름끼쳤다.

참, 프랑스전은 1 대 1로 비겼다. 프랑스는 예선전적 3무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2002년 때와 같은 치욕을 다시 겪은 프랑스는 국가대표팀 영구해체설에 대답하지 않고 독일을 떠났다.

새벽의 찬이슬을 맞으며 붉은 악마들은 전광판 앞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야외음악당 주변으로 드러난 60미터 반경의 맨땅은 소갈머리가 빈 사람의 머리통 같았다. 악마들은 1 대 1 상황의 전반전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혜성 충돌 예정일이 이틀이나 남았다는 게 그래도 응원할 정신을 남겨놓는 모양이었다. 박지성과 교체된 박주영이 안정환으로부터 공을 받았다. 남에게 공을 줄줄 모르던 안정환이다. 골문 앞에서 저러는 걸 보면 지구 멸망이 눈앞에 오긴 왔나보다.

달려가는 박주영! 박주영! 박주영! 수비수 제치고, 박주영!

그 뒤의 일이 P씨는 기억나지 않는다. 괴물의 신음소리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리고, 이틀 전에 세운 최신 전광판이 무너지고, 붉은 빛들이 좁쌀마냥 흩어지던 모습들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다. 꺄아아악-! 꺄아아악-! 사람 죽어요! 밀지마! 으아아악! 다리! 내 다리! 엄마아!!!! 엄마아!!!! 검은 하늘을 쪼개는 새벽빛은 일정을 앞당기고 지구에 닥쳐드는 혜성을 반갑게 맞았다. 대서양이 아닌 태평양 서쪽가에 착륙한 불청객으로 인해 코딱지만한 남한은 네 조각이 났다. 그중 세 조각이 주륵주륵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딥 임팩트>(1998)

감독 미미 레더
출연 로버트 듀발, 테아 레오니, 엘리아 우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모건 프리먼, 제임스 크롬웰

뉴욕시 크기에 달하는 혜성의 지구 충돌을 가상한 재난영화. 혜성을 파괴하기 위해 미국은 소련과 합작으로 우주선 메시아를 제작하는 한편 100만명의 인원을 2년간 수용할 수 있는 미주리주 지하요새를 가동 준비한다. 메시아는 혜성의 핵폭발에 성공했지만 궤도 변경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국은 3시간 뒤 지구에 혜성이 충돌한다는 뉴스와 함께 최후의 인류생존 계획을 발표한다.

혹독한 눈보라·우박·폭풍 속에서 살아남아라!

6월27일 화요일 오전 4시58분
16강전 사우디아라비아 VS 한국

한국전이 있을 때마다 재난이 터진다고 이것은 국제적 음모라고, 한나라당의 무식한 의원 하나가 돌발 발언을 했다. 이 돌발 발언은 한국의 8강 진출을 점치는 기사 옆에 조그맣게 실렸다. 세계는 다시 월드컵에 집중하고 있었다. 태평양에 떨어진 혜성은 나사가 관측한 크기보다 작아서, 환태평양 지역에만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고 아틀란티스처럼 바다 밑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바꿔 말하면 환태평양 지역의 국가들은 월드컵 운운할 사정이 못 되었다. 정부는 해수면이 400미터 이상 높아진 남동쪽 지역에 대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강원도와 경상남북도, 전라남도는 물에 잠겼다. 충청북도 일부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기도가 아슬아슬하게 육지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P씨는 광기어린 붉은 악마들 손에 이끌려 압구정 지하 호프집을 찾았다. 붉은 악마들의 수는 이제 몇 되지도 않았다. 애초 33만명에 달했던 붉은 군대는, 그들이 가는 곳마다 터진 재난 때문에 300명도 안 되는 생존자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P와 뭉친 악마 동지들은 세명이었다.

미국은 뉴스 하나를 더 숨기고 있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상이변 때문에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국제협약 기준치를 가장 많이 넘어선 미국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사람 얼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며칠째 폭설이 이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 대 한국전이 열리는 쾰른 경기장은 하늘을 닫았다. 2001년 개조공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경기장을 옮길 뻔했다. 대형 가축우리 같은 경기장 안으로 두터운 옷차림의 관중이 들어서는 모습이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16강전을 보는 내내 P씨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호프집 내부 기온은 처음 들어설 때보다 부쩍 낮아져 있었다. “아저씨, 여기 난방 제대로 되는 거예요?” P씨 옆에 앉아 있던 대학생 S가 외쳤다. “최대야 최대! 밖이 워낙 추워서 그래!” 아저씨는 맥주잔을 놓으면서 신경질을 냈다. 또 다른 대학생 S2가 일어났다. 대체 얼마나 추운지 보고 오겠다던 S2는 한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1 대 0으로 꺾고 경기를 끝낼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이 녀석? 입구로 걸어나간 S는 문을 열자마자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동사한 시체 하나가 홀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투모로우>(2004)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주연 제이크 질렌홀, 데니스 퀘이드, 에미 로섬, 이안 홀름

기후학자 잭 홀(데니스 퀘이드)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 현상이 빙하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론을 세계 학술 세미나 자리에서 발표한다. 홀의 이론을 사람들은 귓등으로 흘려듣고, 홀 본인도 60∼100년이 지나야 자신의 이론이 증명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뉴델리에 눈이 내리고 유럽이 10일 이상 폭설에 잠기고 북해 수온이 급강하하면서 지구의 북반구는 영하 60도 이하의 빙하기에 접어든다.

에필로그

P씨는 압구정 호프집에 갇혀 일주일을 지냈다. TV와 맥주, 붉은색 티셔츠, 함께 응원에 동참할 동료 두명이 있었지만 더이상 한국 선수들을 응원할 수 없었다. 한국이 8강에 진출함과 동시에 2006년 독일월드컵은 중단되었다. 경기장이 얼어붙고 길에 나가면 동사할 지경이라 월드컵은 의미가 없었다. 사우디 대 한국전 관람 뒤 집으로 돌아가던 관중은 이미 절반이 길에서 얼어죽었다. 호프집의 생존자들은 지금 세계 어느 지역이 얼마나 춥고 어느 나라 사람들이 몇명이나 죽어갔다더라는 뉴스만 일주일 내내 보았다. 그들은 북반구의 선진국 정부들이 국민을 구원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더 어림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연의 힘은 신만이 주관할 수 있었다. 인간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다.

신이 자비를 베풀어, 세계의 빙하기는 서서히 걷혀갔다. 그 자비가 아니었다면 P씨는 결코 눅눅하고 싸늘한 지하 호프집을 기어나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주일 만에 본 하늘은 비온 뒤 갠 것인 양 맑고 환한 모습으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P씨는 눈가를 서둘러 훔쳤다. 그의 손에 붉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땀과 먼지와 콧물과 얼굴의 유분으로 얼룩진. 낡은 것은 아니었는데 몹시 더러워서 더이상 지닐수가 없었다. 하얀 눈밭 위로 손수건이 던져졌다. 붉은 얼룩은 그 자리에 남지 않고 곧 찬바람에 쓸려 볼품없이 굴러다녔다. P씨는 집까지 갈 궁리를 하며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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