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붉은 악마, 가공할 재난에서 생존하기 [1]
2006-06-06
글 : 박혜명

1972년에 만들어진 재난영화의 걸작 <포세이돈 어드벤쳐>가 볼프강 페터슨에 의해 리메이크됐다. 호화 여객선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뒤집어진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포세이돈 어드벤쳐>는 위기가 가중되고 인물들의 심리가 격해지는 과정을 치밀하게 엮어낸 재난드라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어윈 앨런은 영화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2년 뒤 또 다른 재난영화 <타워링>을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두편의 영화는 1970년대 최고의 재난영화가 되었으며, 이견의 여지없이 영화사에도 길이 남을 작품들이 됐다.

페터슨의 리메이크작 <포세이돈>의 개봉을 계기로 가상 시나리오를 구상해보았다. 2006년 독일월드컵이 한창인 6월, 할리우드영화들에 등장했던 각종 재난의 소재들이 대한민국에 한데 덮쳤다는 가상 재난기이다. 엄청난 재난들 속에서 붉은 악마 회원인 P씨가 용케 살아남았다는 믿을 수 없는 생존기이기도 하다. 재난영화가 그렇다. 살아남아서 햇빛을 보는 자가 있어야 영화도 끝이 난다.

프롤로그

예감이라는 게 있다. 일평생 예감, 육감, 점, 미신 따위 하나도 믿지 않고 살아왔던 사람에게도 불현듯, 손끝을 날카롭게 베어오는 종잇장보다 정확한 예감이 들 때가 있다. P씨에게는 6월12일이 그러했다. 붉은 악마 회원인 P씨는 밤10시에 있을 토고전에 대한 생각에 빠진 채 복사기 앞에 서 있었다. 잦은 고장으로 사무실 전 직원들의 성질머리를 갈수록 더럽게 만드는 복사기는 그날따라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기특하네, 녀석. 아침에 축구토토를 한장 샀는데 P씨는 부디 한국이 토고에 2 대 0으로 이기기를 바랐다. 이잉-이잉- 복사기가 내는 콧소리 리듬에 맞춰 회의자료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디 제대로 나왔나 보자. “아야.” 새하얀 A4지가 P씨의 검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길게 그어버렸다. 자줏빛 같기도 하고 보랏빛 같기도 한, 정확히 붉은색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체액이 살갗 위를 물들였다.

미션 1: 지옥같은 불과의 사투

6월13일 화요일 밤 10시32분
G조 예선 1차전 토고 VS 한국

“잘한다 박지성!”

“저놈 오늘 컨디션 좋네. 평가전 때만 해도 인상쓰고 뛰더니!!”

종로 거리는 축제날 같았다. 맥주를 파는 술집들마다 입구를 활짝 열어놓고 번쩍이는 TV화면을 전시했다. 거리를 채운 사람들은 이날이 종말 전야인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종로 국세청 건물의 스카이라운지 ‘톱 클라우드’에는 P씨를 포함한 붉은 악마 350여명이 몇대의 커다란 TV를 중심으로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0 대 0. 지독하게 숨을 죽였다가 우라질 함성이 반복되는 가운데 설기현이 이영표에게 중거리 패스를 날렸다. 설기현의 공을 받은 이영표가 골문쪽으로 내달리고 왼쪽에 있던 박지성이 중간으로 파고들어 이영표의 공을 받았다. 우와아아, 우와아아!!!! 골! 골! 골! 박지성의 오른발이 공을 향해 뻗는 순간-

지지지지지직!!

‘톱 클라우드’의 천장에서 번갯자락이 몇 줄기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주변은 암흑으로 변했다. 뒤이어 다시 번쩍! 번쩍! 천장 한구석이 쪼개지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꺄아아악-! 여자들부터 비명을 질렀다. P 옆에 있던 붉은 악마 회원 A씨가 소리를 질렀다. “과전압으로 인한 합선이에요!” A씨는 국세청 건물의 설계자였다. A씨는 이 건물이 규격미달의 전기배선을 썼음을 재빨리 고백한 뒤 G씨에게 달려갔다. G씨 역시 붉은 악마 회원이자 빌딩의 관리책임자였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된 천장을 향해 소화기를 빼들었다. 늦었다. 불길은 거센 물줄기처럼 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와지끈! 쾅! 홀의 기둥 하나가 쓰러졌다. 네 사람이 그 밑에 깔려 즉사했다. 으아악! 꺄아아악! 패닉에 빠진 350여명의 붉은 악마들은 출입구로 몰려들었다. 입구는 막힌 하수구 꼴이 되었다. A씨는 P씨에게 주방쪽 비상구를 알려줬다. 주방은 이미 오래전에 화염 속이다. 모로 가나 죽긴 매한가지. P씨는 테이블보 하나를 뒤집어쓰고 주방쪽으로 내달렸다. 왼쪽 다리에 불길이 붙는 것도 모르고 불바다를 헤쳤다. 비상구 불빛이 보인다. 작은, 녹색 불빛이다.

몇개 층을 뛰어내려왔는지 모르겠다. 두 다리가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이 악물고 추스르며 마지막엔 기다시피 해서 1층 로비에 발을 내디뎠다. 건물 바깥에는 붉은 소방차 10대가 줄을 이어 서 있었다. 먹물 같은 어둠을 몰아내는 종로의 불빛들에 싸여 P씨는 국세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부터 불덩이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타워링>(1974)

감독 존 길러민, 어윈 앨런
출연 스티브 매퀸, 폴 뉴먼, 윌리엄 홀든, 페이 더너웨이

7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 이십세기 폭스사가 판권을 갖고 있던 소설 <글래스 인페르노>와 워너브러더스가 판권을 사들인 소설 <타워>를 합쳐 만든 영화다. 140층짜리 세계 최고층 빌딩에서 성대한 오프닝 파티가 열리던 날, 건물 규격에 미달하는 전기배선 공사로 대형 화재가 발생한다. 빌딩 건축가 역은 폴 뉴먼이, 관리책임자 역은 스티브 매퀸이 맡았다.

미션 2: 거센 토네이도에 휩쓸리지 않기

6월19일 월요일 오전 5시5분
G조 예선 3차전 프랑스 VS 한국

토고전에 2 대 0으로 승리했다는 뉴스보다 국세청 건물이 절반 이상 타버렸다는 게 더 큰 뉴스였다. TV와 신문과 인터넷 언론들은 둘 중 어느 뉴스를 먼저 내보내느냐를 두고 주저하지 않았다.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의기양양해 있던 한나라당은 여세를 몰아, 어떻게 정부 건물이 규격 미달의 전기배선을 설치할 수 있느냐며 피를 토했다.

국세청 건물의 대형화재는 그러나 일주일 만에 잊혀졌다. 붉은 악마 군단은 월요일 새벽 광화문에 집결했다. 망자는 망자,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즐기며 살 권리가 있지만, 민망하긴 했는지 붉은 악마는 광장 주변으로 촛불을 둘렀다. 광장 한가운데 악마들은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을 하고 있고 가장자리 악마들은 큰 원을 그리며 엄숙하게 촛불을 들고 있는 꼴이었다. P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절친했던 A씨와 G씨는 사망했다. P씨는 R씨, T씨와 함께 전광판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응원에 합류했다. 토고에 비긴 프랑스는 한국과 최소한 비겨서도 안 되는 입장이었다. 한국은 프랑스에 적어도 비기는 게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영표에게 공을 넘겨받은 안정환이 골문으로 돌진하는 중이었다. 그레고리 쿠페 대신 결국 주전에 오른 파비앙 바르테즈는 예의 매끈한 두상을 번쩍거리며 적수를 맞을 태세를 갖췄다.

인생은 때로 거짓말 같다. 안정환이 골을 터뜨리자마자 이를 축하하듯 거대한 바람이 세종로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돌풍의 정체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부러진 전광판도, 붉은 악마의 응원의 깃발도, 주책맞은 북과 북채도 그리고 망자의 넋을 위로한답시고 켜두었던 양초들까지도 마치 돌아갈 곳이 거기밖에 없는 것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날려올라가지 않은 사람들만이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R씨와 T씨는 P씨와 함께 광적인 줄달음을 치면서도 돌풍을 돌아보기 바빴다. “토네이도의 실체를 파악해야 돼요!” “계측기는 연구소에 있잖아!” “가져와야겠어요!” “미쳤어?” “미쳤냐고요? 난 우리 엄마를 저 바람 때문에 잃었어요! 더이상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요!” “R!” “T!” 두 사람은 뛰면서 손을 맞잡았다. 세네갈 평가전 때 이혼합의 봤다더니 그냥 잘살겠구나. P는 생각했다.

<트위스터>(1996)

감독 얀 드봉
출연 헬렌 헌트, 빌 팩스턴

토네이도에 휩쓸려간 아버지를 목격한 조(헬렌 헌트)는 장성하여 토네이도 연구분석가가 된다. 토네이도가 닥칠 상황을 예보하여 인명 피해를 막겠다는 것. 그녀는 연구파트너 빌(빌 팩스턴)과 이혼을 앞둔 상태로 토네이도를 연속으로 목격한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함께 연구, 개발해온 토네이도 계측기를 들고 토네이도 한가운데에 설치하러 나간다. 목숨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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