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지브리의 기관장을 만난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전 [1]
2006-06-07
글 : 김도훈
<이웃집 야마다군> 등 대표작 4편 선보이는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전

지브리의 간판을 단 선장이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엔진을 돌리는 기관장은 다카하다 이사오다. 비록 지금은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전해지지만, 두 위대한 애니메이션의 거장은 지난 30여년간 지브리 스튜디오를 이끌며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를 완성시켜왔다. 이를테면 미야자키가 지브리의 꿈을 대변하는 몽상가라면, 다카하다는 지브리의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달리 다카하다 이사오의 작품들은 DVD와 영화제라는 협소한 경로를 통해서만 한국의 팬들을 만나왔을 따름이다. 그래서 오는 6월8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전’은 거장의 대표작을 극장에서 관람하고 싶어하는 팬들에게는 귀하고 드문 기회다.

이미 대가의 위치에 오른 다카하다 이사오의 경력을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프랑스 애니메이션 작가 폴 그리모의 작품에 매료되어 애니메이션계에 뛰어든 다카하다는 1959년에 도에이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했다. 평생의 동료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협업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등 8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를 누렸던 도에이의 TV애니메이션들은 대부분 다카하다와 미야자키의 공동 작업 아래 세상에 태어난 것들이다(사실 ‘감독’ 직함을 달았던 것은 대부분 다카하다 이사오였다). 80년대 들어서 <자린코 치에> <첼리스트 고슈> 등의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을 감독한 다카하다는 1985년에 미야자키와 함께 지브리 스튜디오를 창설했고, 이후 <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의 걸작을 내놓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사려깊은 애니메이션 작가의 명성을 획득했다.

이번 감독전에서 상영될 작품들은 다카하다의 대표적인 극작용 장편애니메이션들이다. 워낙 익숙한 제목들이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제외하면 국내 극장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들이라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최근작 <이웃집 야마다군>(1999)은 별도의 주목을 요한다. 감독의 경력 중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작품은 모든 제작공정이 디지털로 처리된 지브리의 실험작인 동시에 다카하다 이사오의 미래를 보여주는 열쇠로서도 일견의 가치가 있다. 장편 데뷔작이자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끊임없이 회자되는 68년작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太陽の王子 ホルスの大冒險)과 <자린코 치에> <첼리스트 고슈> 등의 80년대 초기작들이 빠진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현실과 판타지를 세밀하게 직조해내는 거장의 솜씨는 4편의 근작으로도 충분히 포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웃집 야마다군>(ホ-ホケキョとなりの山田くん, 1999)

4개의 칸 속에 기승전결이 압축되어 있는 네컷만화를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을까. 대부분의 감독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 것이다. 물론 성공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이미 <아즈망가 대왕>이나 <사자에상>(サザエさん)처럼 네컷만화를 TV용 시리즈물로 번안한 경험이 있다. <이웃집 야마다군>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아사히신문>에 연재 중인 네컷만화에서 인상적인 20여개의 에피소드들을 모아 여러 편의 하이쿠로 선집을 엮듯이 <이웃집 야마다군>을 만들어냈다.

<이웃집 야마다군>이 보여주는 것은 소박한 현대 일본 가정사다. 항상 힘이 넘치는 할머니, 전형적인 일본의 소심한 가장, 저녁식사 메뉴를 고민하느라 정신없는 엄마, 잘나지 않은 외모 때문에 고민이 많은 아들, 지나칠 정도로 어른스러운 막내딸로 구성된 야마다 가족은 일상의 평범한 고난과 행복을 겪으며 살아간다. 여기에는 다카하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일상의 순간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파친코를 좋아하는 아빠와 아줌마스러운 엄마의 부부싸움. 비오는 날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는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주는 게 영 귀찮은 아이들의 모습, 서서히 이성에 눈떠가는 아들의 풋사랑 등.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스스로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장편애니메이션으로서 커다란 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각각의 에피소드가 산토카, 바쇼 등 유명 하이쿠 시인들의 글귀로 마무리되는 것에서는 <이웃집 야마다군>이 일본의 전통적인 압축미(하이쿠와 네컷만화)를 장편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불러들이려는 시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웃집 야마다군>은 <모노노케 히메>보다도 많은 총 24억엔의 제작비가 투여된 대작이다. 모든 것이 풀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와 지브리의 예전 작화풍에 익숙한 관객은 이 작품을 외면했고, 결국 지브리 역사상 최대의 흥행 참패로 이어졌다. 물론 흥행에서의 참패가 한 예술작품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집 야마다군>은 소박한 그림체 속에 숨어 있는 지브리의 대담한 실험이며, 동시에 다카하다 이사오가 비오는 도쿄의 골목에서 구성지게 불러젖히는 인생찬가다.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 1988)

“소화 28년 9월21일 밤, 나는 죽었다.” <반딧불의 묘>는 (아마도)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내레이션을 관객에게 던지며 문을 연다. 죽어버린 유령이 자신이 죽음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관객에게 설명하는 진혼곡인 셈이다. 내레이션을 읊조리는 주인공은 평범한 소년 세이타. 그는 태평양 전쟁의 광풍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동생 세츠코와 함께 살아간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일본은 희망을 잃어버린 지옥도에 다름 아니고, 누구도 남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결국 굶어죽은 세츠코를 떠나보낸 세이타는 소화 28년 9월21일 밤에 죽는다. 주인공 세이타는 해군 함장의 아들이지만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전쟁이 언제 끝났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보통 일본인들의 초상이다.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빈번히 반대의사를 밝혀온 다카하다 이사오는 언제나처럼 보통 사람의 눈을 통해 전쟁의 흉포함을 고찰한다. 반전영화 <반딧불의 묘>가 종종 일본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강변하는 작품이라는 괜한 오해를 받는것도 이처럼 세밀하고 미시적인 다카하다식의 접근법 때문일 것이다. 사담이지만, 같은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내놓은 작품은 전후 일본의 전원을 꿈결처럼 그려낸 <이웃집 토토로>였다.

<추억은 방울방울>(おもいで ポロポロ, 1991)

도쿄에서 자란 27살의 직장여성 오카지마 타에코는 여름 휴가를 맞아 형부의 고향인 시골 야마가타현으로 농사일을 도우러 간다. 그녀는 거기서 도시 생활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한 토시오를 만나 호감을 갖게 되고, 열흘간의 농촌 생활 속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방울방울 떠올려본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다카하다 이사오의 이름 앞에 ‘현실주의자’라는 호칭을 붙이게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다. “꽃을 재배하는 장면들은 꽃재배의 교본이 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다카하다의 말처럼, 현실을 정교하게 셀애니메이션화하는 기법들은 15년이 흐른 지금도 사실주의 애니메이션의 교본이 될 만하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戰ぽんぽこ, 1994)

도쿄 근방의 숲에 사는 너구리들은 도쿄 개발 계획인 뉴타운 프로젝트로 숲이 파괴되기 시작하자 변신술을 써서 인간들의 계획을 막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변신술을 이용한 게릴라 작전에도 불구하고 너구리들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참이다. 이 작품은 지브리 감독들이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무거운 주제의식에 걸려 넘어지는 대신 다카하다 이사오는 변신이 가능한 너구리들의 투쟁을 통해 유쾌하게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결국 ‘같이 살아가자’는 노래를 조용히 관객의 가슴속에 불러준다. 지난해 국내 개봉시 적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흥행성적을 거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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