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마지막 상영작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었다. <아들의 방> <피아니스트> <멀홀랜드 드라이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이 상을 나눠가진 그해 영화제에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거장에 대한 예우 차원의 초청처럼 보였다. <나라야마 부시코>와 <우나기>로 두번씩이나 황금종려상을 받은 노장이 유작이 될지 모르는 작품을 내놓았으니 초청작 명단에 포함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따라서 영화를 보는 입장도 아주 편안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였으면 했는데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정말 그랬다. 칸영화제처럼 낯선 작가영화가 우루루 쏟아지는 곳에서 부담없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영화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뻔뻔하게 야한 할아버지, 좋아 좋아.”
그해 칸영화제에 이마무라는 오지 않았다. 이미 76살인 노인에게 장거리 비행은 무리였을 것이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서 모든 걸 잊고 여자의 품에 안기는 게 최고, 라고 전하는 노인의 가르침을 이마무라의 입으로 직접 들어보고 싶었던 터라 실망스러웠지만 그를 만날 기회는 곧 찾아왔다. 이마무라는 그해 한국을 두번 방문했다. 첫 번째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출연차 찾아온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부산국제영화제였다. 첫 번째 방문 때 인터뷰를 하러 갔던 허문영 선배가 진땀을 뺐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작품세계에 관한 깊이있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렇지 뭐” 하는 식의 단답형 대답만 내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오래전부터 이마무라는 인터뷰하기 힘든 감독으로 소문이 났고 노인이 되어서는 더 그랬다. 부산영화제에서 핸드프린팅을 했던 두 번째 방문 때 나도 그런 진땀나는 순간을 경험했다. 공식 기자회견장에 나온 이마무라는 절대 받아적기 좋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마치 내게 남은 모든 에너지를 영화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기에도 모자라니 말까지 잘하길 기대하지 마시오, 라는 태도였다. 다음 영화의 투자를 위해 PPP에도 참가한 그는 오직 다음 영화에 관한 질문에만 최소한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제 이마무라의 새로운 장편영화를 볼 수 없게 됐다. 그의 부고는 이번호 기획기사에 실린 대로 “일본영화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뜻한다. 여기서 일본영화의 한 시대란 오즈, 미조구치, 구로사와, 나루세, 오시마(아직 생존해 있긴 하지만 가끔씩 만든 작품들은 60년대의 활력을 되찾지 못한 경우였다) 등 거장들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전쟁을 경험한 세대를 뜻하기도 한다. 전쟁 전후 일본사회의 변화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영화세계는 서로 같으면서 다른 일본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이마무라는 그 가운데 가장 음습하고 극단적인 쪽에 관심을 기울인 감독일 것이다. 등장인물을 보면 계급적으로는 하층민이 많고 그들의 행위는 살의나 성적 욕망에 지배받기 일쑤였다. 그의 대표작인 <나라야마 부시코>만 해도 그렇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 늙은이들을 산속에 버려야 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나? 이마무라는 오즈처럼 쓸쓸하거나 나루세처럼 비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앞니를 깨서라도 자식들의 짐을 덜어주려는 강인한 여성을 통해 생명을 예찬했고 희망을 제시했다. <우나기> <간장선생>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등 후기작에 이를수록 그런 경향은 더 뚜렷하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같은 작품은 남성 판타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마무라가 들려준 삶에 대한 찬가는 일본인뿐 아니라 인류에 좋은 위로가 됐다. 돌이켜보면 이마무라의 영화는 나라야마에 내리던 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살기 위해 어머니를 버려야 하는 비굴한 인간을 다독이며 감싸안았던 그 하얀 눈. 이마무라가 대지에 잠든 날에 나라야마엔 분명 눈이 내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