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감독과 토요일 오후에 만났다. 저녁 자리까지 이어지는 긴 인터뷰였는데 그는 장이모 감독을 인용하며 “인터뷰는 영화감독 최후의 공정”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요일 오후 유하 감독은 더 깊이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시집과 쓰레기가 뒤엉킨, 아마도 오래된 애마였을 그의 차를 타고 다니며 미처 듣지 못한 길고 긴 뒷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쉴새없이 니코틴 1mg 담배와 1회용 필터가 사라졌다. 촬영장에서는 네갑씩 피운다는 희붐한 담배 연기 사이에서 작품을 만든 작가의 뿌듯함과 개봉을 앞두고 ‘콜로세움에 끌려가는 검투사’의 초조함이 함께 겹쳐 보였다.
1. 순수와 비열의 거리 사이에서
-<비열한 거리>가 액션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액션보다는 감정의 흐름이라고 했을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
=스타일리시한 액션영화, 슬로모션이 많이 걸리고 싸움의 합이 정확한 영화는 많이 봤고 재미가 없었다. 영웅적인 액션보다는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비루하면서도 이전투구적이고 절실한 이미지의 액션을 하고 싶었다. 내 액션은 늘 드라마와 연결되어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의 감정적인 폭발이 없었다면 옥상 결투 장면이 재미없었을 거다. <비열한…>은 살냄새나는 액션영화다. <말죽거리…>부터 외면적인 멋보다는 사실적이고 정서적인 액션의 컨셉을 많이 생각했다. 이번 건 그걸 극대화했다고 할까. 나는 날것으로서의 액션에서 불온한 쾌감을 느낀다.
-짜임새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가가 되려 하는 자의식이나 스타일에 대한 욕망보다는 장인의 자리를 스스로 인정한다는 느낌이다.
=영화가 시와 다르다는 걸 첫 작품 하고서 엄혹하게 깨달았다. 그때는 스타일에 대한 자의식이 없었다. <말죽거리…>를 만들면서 의식하기 시작했는데 내 영화의 스타일에 대해선 크게 점수를 안 주더라. 누군들 대가가 되고 싶지 않겠나. 필모그래피가 쌓이면 대중과 평단이 평가를 하게 될 텐데 내가 되고 싶어해서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스타일에 대한 강박이 적은데 시를 쓰면서는 문체와 개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내 시도 형식 파괴적이기보다는 정통과 해체 사이에서 긴장한다. 영화를 하면서 느낀 건 드라마가 상위개념이며 스타일은 하위개념이라는 거다. 이야기가 깨진 상황에서 스타일은 겉멋 아닌가. 드라마와 따로 떨어진 그림은 이발소 그림, 즉 키치다. 스타일리시한 게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공법이 오히려 불온하고 새로운 것이 아닌가. 문체도 문맥에 맞는지 정확하게 쓰였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스타일도 그와 같아서 난 이야기에 가장 적확한 앵글을 들이댈 뿐이다.
-좋은 연기와 자연스러운 내용이지만 영화적으로 봤을 때는 마틴 스코시즈의 <좋은 친구들>, 또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풍의 영화인데 작가적 자의식은 잘 보이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뺐다는 느낌이라서 묻는 거다.
=내가 추구하는 건 무기교의 기교다. 스타일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내 영화는 스토리가 중심이고, 그런 스토리를 방해하지 않는 스타일을 추구한다. 스타일이 보이지 않는 게 궁극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배우가 연기를 잘했다거나 스토리가 자연스럽다는 얘기가 듣기 더 좋다. 영화에서 감독이 보이는 것보다는 출연진이 사는 게 더 낫다. 내 영화의 배우들 연기가 자연스러운 건 그들이 내 영화의 토씨이자 문장이자 음표이기 때문이다. 그들 연기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건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배우가 자연스레 운용된다면 나만의 내재화된 스타일이 이해가 될 거다. 평자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영화를 보면 배우 동선과 연기가 거슬린다. 누구 말대로 ‘앎의 음란성을 극대화하고 자극하는’ 선정주의가 대세인데 내 영화는 그에 대한 반동이다.
-장르적이고 관습적인 영화인데, 상투성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뚫고 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차피 새로운 얘기란 따로 없다. 로버트 맥기의 말대로 새로운 걸 만들려 애쓰는 게 창조가 아니다. 상투의 세계에서 얼마나 신빙성있게 창조하느냐가 문제다. 절대 공감하는 얘기다. 조금 더 핍진하게, 개연적으로 드러내려 치중했다. 만들다보면 사실 그게 더 힘들다. 굉장히 괴롭고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카메라를 정직하게 들이댔다. <비열한…>은 동시대의 남루함, 이런 놈들이 사는구나 하는 걸 보여주려는 거니까 카메라가 재주를 부리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난 미장센 같아 보이는 건 오히려 CG로 지워가면서 만들었다. <말죽거리…>보다는 멋을 부렸으나 그건 학생이 주인공이고 이 영화는 어른 얘기니까.
-취재를 어떻게 했나. 취재한 이후와 이전의 작품 차이는 어떻게 되나.
=실제 조폭을 만나면서 ‘엘도라도’의 황금 같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거란 망상을 했다. 그러나 취재한 것 중 많은 걸 버렸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게 없었다. 단지 취재를 해서 확인한 거라 신빙성을 높인 건 있다. 오히려 취재한 걸 버리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영화감독의 망상, 비루한 욕망을 영화화하면 좋겠단 생각을 한 거다. 처음엔 감독이 주인공이었는데 결국 조폭 얘기로 바꿨다. 감독 얘기는 서브플롯으로 갔는데 덜 관습적인 얘기로 견인할 수 있을 듯해서였다. 감독의 망상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영화인 거다.
-영화 속 감독이 처한 고민과 두려움, 난처함 같은 게 취재 도중 있었나.
=알음알음으로 조폭들을 만났는데 어렸을 적 ‘생활’하던 친척 분도 계셨고. 그런 힘든 게 있었다면 시나리오에 썼겠지. 의외로 거기도 비슷하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다. 사실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된 건 학교(그는 동국대 영상대학원 교수이기도 하다)에서 제자가 영화를 만들다가 벌어진 사건 때문에 말 못할 엄청난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손을 봐줄까’ 하는 망상을 잠깐 떠올렸는데, 그게 출발점이었다. 왜 인간이 조폭성을 찾게 되는가 그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마치 <대부> 첫 장면에서 법에 호소했다가 거절당하고 조폭에게 온 장의사처럼 말이다. 그런 금지된 욕망이 중요한 화두구나 싶었다.
-조폭 3부작은 비열한 거리의 ‘문법’을 말하고자 하는 건가.
=<말죽거리…>부터 생각을 했는데 <대부>를 다시 보면서 3부작을 만들고 싶었다. 폭력성, 조폭성이 인간의 그늘진 욕망과 연결되어 있지 않나. 현실에서 조폭성이 어떻게 소비되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내가 ‘S’ 고등학교 출신 아닌가. 한국사회 그늘에 미만해 있는 조폭성에 대한 매혹과 소비욕구를 말하고 싶었다. <말죽거리…>에서 현수가 옥상 결투 장면에서 뒤통수를 먼저 때리는 장면이 조폭성의 탄생이라면 그 이후 사바세계에서 조폭성이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3부는 아마도 왜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거다. 반응이 시원찮으면 그만 만들고. (웃음)
-대중의 반응을 생각하면서도 자기 얘기를 하고 싶다는 두겹의 욕망이 읽힌다.
=시를 쓸 때는 100명의 독자를 생각하며 썼다. 영화는 그럴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몰라도 활극으로 즐길 수 있다. 재미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대중의 생각을 읽어내는 게 사실 더 어렵다. 어려운 만큼 쾌감도 크고.
-‘봐버리다’, ‘스폰서’, ‘후다’ 등의 조폭 은어가 등장한다.
=봐버린다는 건 손을 본다는 얘기다. 스폰서는 ‘나와바리’ 이후의 용어다. 이제는 상권 보호 명목으로 나와바리(영역) 안에서 돈을 뜯기 어렵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 해체된 개념이다. 토착화된 거점 중심의 조폭은 사라지고 대신 조폭들이 합법화된 사업 밑으로 들어갔다. 유통과 건설업체 등 멀쩡한 기업가가 조폭을 부린다. 법대로 하면 5개월 걸릴 일이 조폭 쓰면 하루면 되니까. ‘후다’는 도박 당구칠 때 화투장을 말한다. 뒤를 캐보라는 거지.
2. 남성성에 대한 매혹과 반성 사이에서
-<말죽거리…>와 마찬가지로 남성성의 경도로 보이는 측면들이 있다. 페미니즘적 비판의 시선에 대해 의식하나.
=시를 쓸 때부터 리뷰와 비판에 굳은살이 박혀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페미니스트들이 뽑은 그해의 영화 1위 아니었나? 스토리를 얼마나 온전하게 끌고 가는가가 문제다. 스토리에 따라 남성성에 또는 여성성에 경도될 뿐이다. 어차피 이 영화는 조폭세계이고 조폭은 가장 가부장적 집단인데, 나는 ‘있어야’ 할 세계가 아니라 ‘있는’ 세계를 그린 것뿐이다.
-‘식구’라는 점을 승인하는 것도 다르다. 병두(조인성)만이 식구의 가치를 끝까지 붙들고 있다. 가족은 병두에게 얹혀 있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다. 그들은 식구에 대한 대단한 의식이 있지만 남의 식구들을 협박하고 못살게 하면서 자기 식구를 건사하려고 한다. 병두가 식구를 위하는 건 그래서 단선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남들 식구를 죽여가면서 자기 식구를 위하는 뒤틀린 가족주의를 말하는 거지 그걸 추앙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병두가 원하는 ‘찡한 의리’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건 아름다운 세계고 서정적인 세계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도 아이러니다. 병두는 정작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 얘기는 직장으로 그대로 옮겨도 된다. 30∼40대 가장이 집에선 대우 못 받고 집 밖에선 상사에서 차이고 부하에게 뒤통수 맞고, 누구나 영웅적인 삶을 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누구나 인생은 다 비루하게 끝나는 건데 영화는 그러지 말자는 거다.
-일부러 떨어뜨린 책으로 애인의 신의 크기를 가늠하는 사람이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열한 거리를 비판한다기보다 병두가 잘못 도착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병두는 삼류 조폭이자 문제적 개인인데 그런 사람에게도 이중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원래 칼로 쑤시고 남 뒤통수 치는 게 오히려 그런 인간이다. 그런 대척점들이 있는, 가치를 전복할 수 있는 인간이 재미있다.
-여성을 잘 그리고, 여성적 가치를 잘 그려낼 것이란 예상과 기대가 있는데 여성은 축소되거나 뒤편으로 물러나 있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건 이야기가 요구하는 거에 따라 규정되는 거다. 여기서 멜로드라마는 병두를 설명하기 위한 서브플롯이다. 나로선 여자보다 남자들을 더 잘 알기 때문에 남자 얘기를 한 거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다. 그래서 난 그런 비판들을 줄곧 무시하고 있다. 여성에 대해서 말할 땐 들뢰즈식으로 ‘비커밍 워먼’이 되어 말하는 것뿐이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종손으로 자랐고 살벌하게 수컷이 되기를 강요했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남성성에 대한 매혹과 반성 사이에서 있었던 게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된 건 아닌가 생각해보기는 했다.
-<말죽거리…>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는데 이 영화는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나. 1차 관객은 누구인가.
=시나리오 쓰면 먼저 와이프에게 보여준다. 늘 그의 검열을 받는다. 재미있다면 만들고 재미없다면 접는다. <말죽거리…>보다 <비열한…>이 더 재미있다고 하더라. 원래 멜로드라마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아버지로서의 황 회장(천호진)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애정이 있어 보인다. <말죽거리…>의 폭력적인 아버지였을 때도 그랬고.
=아버지와 사이는 좋지 않았다. 강압적인 분이셨고 두려운 존재였다. 지금도 살갑지는 않고 어려워 하는데 그런 게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다. 황 회장은 조폭성을 소비하고 이용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수혜자다. 영화 속 감독은 그걸 매개한 <남부건달 항쟁사> 영화를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이고.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사회가 굴러간다는 거다. 황 회장이 비열해 보이지 않는 건 계산된 거다. 정말 비열한 사람인데 그런 이들이 외견상 가장 안 비열해 보인다.
-그렇다면 기존 조폭영화에 대한 반성의 측면으로도 볼 수 있겠다.
=조금 있겠지만 반성과 매혹 사이에서 긴장하며 만들었다. 감독이라는 내 입장에서는 반성하며 만들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 속 감독의 표정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류인데, 그게 내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영화 속 영화 제목이 <남부건달 항쟁사>인데 영웅적이고 비장하지 않나. 병두의 당부대로, 의리가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데, 실제 그들 관계는 그렇지 않지. 조폭보다 더 무서운 건 조폭을 움직이는 먹물들이다. 조폭을 박멸하자면서 조폭에게 뒷돈을 대가며 은밀한 욕망을 해결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비판인데, 주인공 병두를 따라가는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면서 가끔 엇박을 치는 스토리 라인을 선택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