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이는 듣기만 해도 흉악스런 이름이다. 그러나 여성 두목이 가위를 들고 활극을 펼치거나, 머리 깎고 스님들과 족구하는 우스꽝스러운 시추에이션을 즐겨 보았다면 이들이 그저 깍두기 머리 하고 실없는 짓이나 일삼는 나와바리(구역) 근거형 서클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친구> 같은 실화에 근거한 리얼리스틱한 조폭영화가 없지는 않았다. 최근 등장한 <짝패>와 <비열한 거리>는 조폭이 실생활, 나아가 주요 경제 활동에서 매우 분주하게 일하는 경제 주체이자, 알기도 복잡한 사업 영역 확장 및 기업 합병 등에도 나서는 지하경제의 첨병임을 보여주는 바, 이들 영화를 중심으로 조폭영화를 다시 돌아보며 그들의 실상에 한뼘 더 다가서면 어떨까 싶었다. 그들의 정치관, 경제관, 의생활, 주생활, 고문방법, 조폭 내 인간관계 등을 소백과사전식으로 구성해보았다.
조폭의 탄생
조폭영화와 실제 조폭의 계보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치가 혼란하던 시절 동원되던 정치조폭에 비하면 요즘 조폭은 정치학보다는 경제학이나 경영학 중심으로 공부한다. 김두한 같은 반일 주먹, 시라소니처럼 혼자 다니는 주먹이 지나가고 이승만 등 독재정권이 이용한 조폭 시대가 지나갔다. 그 뒤가 동네 나와바리에서 푼돈을 뜯어내는 <파이란>의 최민식류로 조폭은 낭만이나 의리와는 담 쌓고 찌질해졌다. 그런 찌질이 조폭도 한물갔다. 노태우 정권 시절 <범죄와의 전쟁> 즈음한 때가 조폭의 전성기. ‘조직’ 결성으로 엮일 정도로 큰 범죄단체가 보통 조폭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 조직 결성은 매우 큰 범죄가 되었고 이후 조직이나 범단으로 엮여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일이 많아졌다.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조인성)네 조직 2인자 종수가 걱정한 게 바로 그런 사태다.
조폭 사상
조폭들이 의리와 신의를 내걸지만 그건 오히려 의리와 신의가 없기 때문에 더 강조되고는 한다. 기타노 다케시의 <브라더>나 <3-4x10월>을 보면 義 자가 커다랗게 쓰인 액자가 책상 위나 놓이거나 벽에 붙어 있다. 조폭의 사상적 특징은 무사상이다. 돈과 명령만 좇을 뿐 그걸 왜 좇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되묻는 법이 없다. 그래서 <비열한 거리>의 하마(박효준)가 읊는 건달 사상이 오히려 조폭 사상의 존재론에 가깝다. 1. 쪽팔려선 안 된다 2. 다구리(흉기)를 맞아도 안 된다 3. 밥은 굶어도 구두는 닦는다. 이 존재론을 일찌감치 실천해보인 인물은 <친구>의 준석(유오성)이다. 고가도로 한복판에서 택시에 탄 친구에게 말을 거느라 차를 세우고 차량 흐름까지 방해하는 객기, ‘뽀대’ 내세우기, ‘쪽팔린’ 걸 죽기보다 싫어하기 등이 굳이 사상이라면 사상인데, 주로 그 사상을 갖는 목적은 상대편 조폭보다 ‘쎄’보이기 위해서다.
조폭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조폭, 양아치, 건달, 깡패 등 조폭을 부르는 이름은 여럿 있다. 그러나 조폭은 스스로를 조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조폭의 자기정체성은 ‘건달’이다. 일찍이 <넘버.3>에서 검사 마동팔(최민식)이 갈파했듯이, 건달은, ‘하늘 건 이를 달 하늘에 통달한 사람이란 뜻이지. 간다르바라구 세상의 좋은 향기만 마시고 공중을 떠다닌다는 신 이름이기도’ 하다. 조폭은 자신은 건달이고 다른 조폭은 ‘양아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폭에게 최악의 비하이자 모욕은 ‘양아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열한 거리>의 병두는 후배 ‘식구’들 앞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건달은 말야, 굶어 디져도 자존심 하나로 가는 거야. 자존심 버리는 순간 뭐다? 양아치다! 그냐 안 그냐?’
조폭 이름 짓기
불사파(<넘버3>), 로타리파(<비열한 거리>), 백상어파(<조폭마누라>) 등등 조폭영화에서 조직의 이름들 가운데 개성 넘치는 이름이 많다. 그러나 실제 조폭 이름을 붙이는 건 일선 수사기관이나 조폭이 활동하는 동네 사람들이다. 이름이 눈에 띄었다간 범죄 조직 결성이라는 엄청난 벌을 받는데 어떤 아둔한 조폭들이 스스로 이름을 붙이겠는가. 실제 조폭 조직들 가운데 많은 이름은 ‘로타리’, ‘OB’, ‘배차장’ ‘신상사’ 같은 수더분한 이름이나 지역 이름이 더 많다. <달콤한 인생>의 ‘삼선교’ 오무성은 그러니까 신빙성 있는 이름이다.
조폭 고문법
<비열한 거리>와 <짝패> <시실리 2km> 등 최근 조폭 소재 영화에서 유독 많이 보이는 고문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체부위 절단이다. 야쿠자 전통에서 건너온 듯한 이 신체부위 절단은 기타노 다케시의 <브라더>에서 절정을 보여준다. <짝패>에서 이범수는 사람을 시켜 한가롭게 사우나에서 어떤 부위를 자를 것인가를 고민한다. ‘새끼부텀 짤러유, 엄지부텀 잘러유?’ <달콤한 인생>에서 오무성(이기영)이 칼들을 꺼내 천장에 매달린 이병헌을 겁주는 장면도 비슷한 맥락.
두 번째는 묻어버리는 거다. 진실을 묻는 게 조폭들의 특기다보니 그런 듯^^. <짝패>의 이범수처럼 발에 시멘트를 부은 뒤 호숫가에 던지거나, <사생결단>의 마약 패거리가 이상도(류승범)를 쇠사슬에 묶어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도 이 변종이다. <구타유발자들>에서 자기를 괴롭힌 동네 양아치를 땅에 파묻은 고딩 현재(김시후)도 이런 영화를 흉내낸 듯하다. <짝패>는 나란히 파묻었고 <달콤한 인생>에선 빗속에 파묻어 살아올라오기를 기다렸고, <비열한 거리>에선 파묻은 뒤 얼굴만 내놓고 거기에 벌꿀을 발랐다. 90년대 지존파와 막가파는 이 두개의 끔찍한 수법을 함께 썼다.
조폭 사망시 인기 멘트
평소 폭넓은 독서나 유언, 또는 사후세계에 관심이 없는지 마지막 멘트는 별다른 게 없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친구>) 등 ‘센’ 척하는 한두 마디 짧은 멘트들이 대종을 이룬다. 별뜻 없는 ‘아, 시발’이 1위. <달콤한 인생>에서 백 사장(황정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상환(류승범), <짝패>의 석환(류승범)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