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넘버3>에서 <비열한 거리>까지 조폭생활백서 [2]
2006-06-21
글 : 이종도

조폭 인기 장비

고등학교, 대학교 야구부 다음으로 야구방망이를 많이 소비하는 곳이 조폭세계다. 한국 조폭영화는 이런 실태를 반영, 주로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애용한다. 외국에 한국 액션영화가 잘 안 팔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총을 안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대폰 배터리(<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위기에서 탈출할 때 썼다) 같은 기발한 소품들이 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1980년대 서진 룸살롱 사건 이후 회칼이 등장했지만 이는 평소 잘 쓰지 않는, 매우 극악무도한 무기다. 칼을 쓴다 하더라도 다리나 팔 같은 비교적 덜 중요한 부위에 쓰며, 부상자는 병원에 데려다주는 게 나름의 ‘쎈수’다. <비열한 거리>의 터널 액션신을 보면 이런 무기 사용에 대한 룰을 엿볼 수 있다.

조폭의 가족주의

<비열한 거리>

조폭들은 강력한 형제애로 묶여 있고 의리를 중시하며 조직원을 ‘식구’(병두 말대로 ‘같이 밥 먹는 입구멍’)라 부르지만 <대부>가 보여주듯 그 식구는 자기 편할 때만 식구다. 알 파치노가 보여준 처남과 친동생을 살해하는 비정함은 조폭 자체가 전혀 비가족, 반가족주의 집단임을 드러낸다. 역시 자신의 처남을 죽이는 <짝패>의 필호, <비열한 거리>에서 친형제처럼 굴지만 서로를 죽이려 드는 상철(윤제문)과 병두는 그러니까 알 파치노의 동생들이다. 너무나 사랑이 넘쳐서 별걸 다 부탁하다가 이들 조폭은 스스로 무너지기도 한다. 후배로 하여금 선배를 때리게 해서 죽는 두목도 있고(<귀여워>), 숨겨놓은 애인을 돌보라고 했다가 죽기도 한다(<달콤한 인생>). 이런 뒤통수치기는 범세계적인 조폭들의 만국공통어다. 얍삽하게 자신을 가로막는 정적 제거를 부탁하고는 뒤통수를 치는 <초록물고기>의 배태곤(문성근), <비열한 거리>의 황 회장(천호진)이거나, <좋은 친구들>의 조폭들이나, <카지노>의 둘도 없는 친구지만 결국 서로의 등을 찌르는 에이스와 니키는 그런 점에서 쌍둥이다. 과연 ‘강호’의 의리는 사라졌는가. 주윤발과 적룡이 <영웅본색>에서 물었던 질문에 대해 후배들은 ‘쌩까고’ 있다.

나와바리에서 스폰서로

<비열한 거리>는 조폭들이 특정 지역 기반의 사업권 보호 명목으로 자릿세나 뜯는 양아치에서 이제 합법화된 사업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유통, 관광, 부동산, 건축 등 사업가들은 조폭의 스폰서가 되어 조폭과 손잡고 법이 울타리 친 영역을 넘나든다. 한마디로 효율성 때문이다. 병두의 로타리파는 재개발 노른자위를 사두는 알박기나 땅 주인들을 협박해 매각하게 하는 수법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 서울의 기업가와 결탁해 고향 땅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짝패>의 필호도 마찬가지 경우다.

조폭의 경제학은 독점자본주의

이런 ‘강호’의 의리가 사라진 건 당연한 일. 조폭은 생리상, 보스가 ‘위너 테이크 잇 올’ 하고 졸개들은 최저 수준 생계로 바닥을 기는 충무로 영화판과 비슷하다(그래서 조폭영화가 많이 나오나?). <괴짜 경제학>이란 책을 보면 미국의 마약 패거리들이 그토록 많이 총격을 당해 죽는데도 조폭 조직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까닭은 이런 독점자본주의, 한탕, 대박의 꿈 때문이다. 굳이 넘버3에서 넘버2, 넘버1이 되려고 무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조폭 의상

조폭들의 출근 복장은 점퍼와 통넓은 천바지, 타이없는 셔츠, 안에 받쳐입는 면 티셔츠다. 짧은 머리에 노타이 차림인 것은 싸우다가 머리나 목을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다(<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러나 싸울 일이 굳이 없는 윗선은 양복을 입는다. 중간의 어정쩡한 층은 ‘오바’해서 흰 양복을 입기도 한다(<게임의 법칙>의 용대(박중훈)). 두목들이 굳이 싸우지 않는 것은 괜히 싸웠다 져 입을 정치적인 충격 때문이다. 그래서 김두한이나 시라소니, 이정재 등 예전의 당대 주먹들은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실제 1 대 1 대결을 벌이지 않았다.

넘버3에서 2로 올라가는 길목

<넘버 3>

많은 조폭영화에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대부>의 소니(제임스 칸) 같은 조직의 적자가 아니다. <대부>의 집안 변호사인 톰 하겐(로버트 듀발) 같은 수뇌부도 아니다. 대학생인 마이클(알 파치노)처럼 의외의 인물이거나, 또는 ‘정통’이 아닌 웨이터 출신(<비열한 거리>의 병두), 시골에서 올라온 <게임의 법칙>의 용대나 <초록물고기>의 막둥이(한석규), 넘버3 자리에서 뛰쳐오르려 용을 쓰는 태주(한석규),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에게 무시당했던 필호(이범수) 등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그들은 관객의 열패감과 동정심에 호소하며 2인자 또는 1인자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탄다. 그 사다리는 주로 조직 두목의 최대 라이벌이나 정적을 없애는 매우 위험한 거래다(<초록물고기> <게임의 법칙> <비열한 거리>). 아예 가장 큰 적이자 가장 큰 친구를 스스로 죽이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짝패>). 교통사고임을 가장하거나(<비열한 거리>), 초파일 축제 같은 혼잡한 거리를 이용하거나, 나이트클럽 화장실 같은 시끄러운 곳(<비열한 거리> <초록물고기>)에서 일을 처리한다. 대담하게 친구 엄마의 환갑이나(<짝패>), 선배 여동생의 결혼식을(<비열한 거리>) 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실제 조폭들의 장례식장이나 병원은 또 다른 장례식과 병원으로 연결된다. 조폭은 신분상승의 꿈을 주고 대신 목숨을 빼앗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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