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영화의 무술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조폭, 형사, 군인을 다루는 강력한 남성적 드라마에 한국형 리얼 액션을 표방하는 막싸움의 몸짓이 맞물린 결과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태풍> <비열한 거리>에 이르는 신재명 무술감독의 노정은 그런 한국 액션영화 약진을 누군가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처럼 선명하게 보여준다. 곽경택 감독과 유하 감독의 액션 코디네이터이자 정우성, 권상우, 이정재, 조인성 같은 꽃미남 배우들에게 격투의 아드레날린을 불어넣은 액션 트레이너 신재명을 만나기 위해 미사리 조정경기장 근처에 자리잡은 베스트팀 체육관을 찾아갔다. 17년간 리얼 액션에 몸을 내던진 신재명 무술감독이 말하는 리얼 액션 스토리를 소개한다.
“구르지마. 옛날 식이잖아!” 불호령이 떨어진다. 신재명 무술감독은 연습 때마다 “연기하지마, 오버하지마!”라고 무술연기자와 배우들을 다그친다. 미사리 근처 한적한 시골길에 위치한 베스트 체육관은 신재명 무술감독과 스물세명의 베스트 액션팀이 모든 액션을 만드는 보금자리다. 자욱하게 뿌려진 스모그 속에 모형 총칼이 번득이고 비명이 난무하는 오늘 연습은 최양일 감독의 신작 <수>(壽)의 액션 시퀀스를 준비하는 과정. 반대편에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두 주인공이 귀 옆에 양손을 웅크리는 수비 자세와 붕대를 칭칭 감은 감은 팔목을 휘두르는 공격을 반복하며 미친 듯이 서로에게 주먹을 날린다.
리얼 액션의 아티스트라 불리는 남자
영화계에서 신재명은 막싸움을 제대로 만드는 무술감독 또는 리얼 액션의 아티스트라고 불린다. 그가 액션을 구성한 <똥개>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의 격투신에는 흔히 액션영화에 나타나는 기교나 활공이 거의 없다. 안면을 강타하는 깨끗한 주먹질, 허공에서 근사한 발길질을 선보이고 가뿐히 내려앉는 동작, 멋지게 활공하며 나가떨어지는 상대방은 화면에서 사라진다. 대신 <똥개> 유치장신에서는 목을 조르며 뒤엉키는 끈질김, <말죽거리 잔혹사> 옥상 결투에서는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는 당혹스러움, <비열한 거리>의 오락실 장면에서 태권도 시합에서 나올 듯한 동작의 간결함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집요하게 현실을 다듬어내는 신재명표 ‘싸움의 기술’은 선배 정두홍이 개척한 리얼 액션과도 차별화된다. 권투에 비유하면 정두홍은 영리한 기교파 슈거레이 레너드이고, 신재명은 빠르고 거친 타이슨이다. 신재명의 액션은 이빨을 앙다물고 상대의 펀치를 그대로 맞아가면서 순식간에 난타전의 거리로 좁혀온다. 류승완 감독은 “<똥개>의 유치장신은 기념비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장면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배우 트레이닝을 통해 키워놓은 끈기와 수많은 보조출연자들에게도 “가급적 비명은 자제해달라”고 부탁하는 절제가 맞물려 신재명표 리얼 액션이 농익었다.
스턴트맨에서 무술감독으로
무술감독 신재명은 1969년 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칠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학창 시절만 해도 “고등학교 때 딱 한번 푸닥거리한 것 외에는 남에게 주먹을 내밀어본 적이 없다. 술, 담배는 한번도 한 적 없는 범생이”였다. 운동을 좋아하고 육사를 지망하던 모범생의 인생항로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공간은 극장이었다. 신재명은 가끔 학교를 빼먹을 정도로 은막에 사로잡혔고 배우의 꿈을 품은 채 서울로 상경한다. 체육관 마룻바닥과 선배집의 더부살이를 반복하던 스물두살의 신재명에게 데뷔의 기회는 예상외로 빨리 찾아왔다. 이두용 감독의 액션영화 <흑설>. 한방 맞고 나가떨어지는 ‘으악새’로 충무로에 입성한 신재명은 “몸을 잘 놀리고 영화연출을 잘 이해하는 영리한 스턴트맨”으로 서서히 알려진다. 제5공화국의 폭력배 일제단속과 맞물려 1970년대를 풍미한 액션물은 더이상 만들어질 수 없었다. 대체재로 만들어진 사극풍 액션극 <검객 산지니> <반달가면> <홍길동>을 통해 신재명은 스턴트계에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하지만 고생은 운명처럼 그의 등에 붙어다녔다. “두달 일해야 겨우 5만∼20만원을 받던 시절”에 영등포 근처에서 노가다와 과일장수로 연명하며 몸을 날리던 신재명은 <게임의 법칙>과 <테러리스트> 작업을 끝으로 결단을 내린다. “배우가 될 수 없다면 무술감독, 액션 코디네이터가 되리라”고 결심한 그는 1997년부터 2년 가까이 스턴트맨 일을 중단하고 무술감독이 되기 위해 독학의 시간을 갖는다. 때마침 IMF가 터지면서 그와 팀원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천신만고 끝에 신재명은 2000년 TV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영화 <비밀>로 무술감독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리얼 살벌한 액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vs <비열한 거리>
“당시 독립영화, 학생영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신재명과 ‘액션키드’ 류승완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조우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대미를 장식한 대규모 결투장면은 후일 <비열한 거리> 굴다리 격투신의 원형에 가깝다. 카메라 필름통에 문제가 생겨 빛이 새어드는 바람에 이 장면은 재촬영을 해야 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촬영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마지막 공사장 결투신은 현재까지도 독립장편 대규모 액션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상환(류승범)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 눈이 내린 건 우연이었다”고 신 감독은 말했다. 재촬영에 즈음해서 하늘이 뿌려준 눈은 리얼하고 살벌한 액션과 영화가 시사하는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차기작 <피도 눈물도 없이>를 정두홍 무술감독과 작업하게 된 류승완 감독은 신 감독에게 선배 곽경택 감독을 소개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마지막 결투신에 매혹된 곽 감독은 특유의 화끈함으로 “잘해봅시다”라는 한마디로 신 감독과의 작업을 수락한다. 그리고 <친구>가 탄생한다. 실제 편집에서는 많은 컷이 제외됐지만, 열명이 넘는 스턴트맨이 계단을 구르고 그들을 밟고 올라서는 격렬함이 묻어나는 <친구>의 극장 격투장면은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신재명은 러닝타임과 심의 때문에 잘려나간 <친구> 프롤로그의 해상 액션장면을 아쉬워했다. “바다에 떠 있는 바지선 위에서 두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체인, 각목을 휘두르며 살벌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위해 배우들은 악전고투했다. 이처럼 <친구>의 전반부에 드리워진 학교 폭력의 서늘함은 후일 <말죽거리 잔혹사>로 이어진다.
학교 폭력의 서늘함, <친구> vs <말죽거리 잔혹사>
그는 “<친구>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일이 쏟아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6개월이 지나도 만족할 만한 작품 의뢰는 없었다. 그때 이준익 감독이 <달마야 놀자>의 작업을 청했다. 지금은 널리 알려진 ‘배우들의 저승사자’ 신재명표 배우 액션 트레이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태권도 선수 출신이라 날아다닌다”는 박신양과 한달 동안 함께 뛰고 구르면서 신 감독은 새로운 액션 만들기에 절치부심했다. <달마야 놀자>의 성공 뒤 신 감독과 베스트팀은 연간 4∼5편을 소화하며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다. 곽경택 감독과 재회한 <똥개>는 그에게 ‘개싸움의 마스터’라는 애칭을 가져다줬다. 주연 정우성과 김태욱을 체육관에 불러들여 두달 내내 주먹을 내지르고 목을 조르는 연습만 시키자 매니지먼트사와 제작진은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신재명은 원래 시나리오 지문과 자신이 구성한 액션에 적합한 지문 두 가지 버전을 준비해 데모 작업을 보여주는 치밀함을 통해 프로덕션의 우려를 일거에 해소했다. 당시 근사한 액션의 아이콘으로 한정됐던 정우성은 <똥개>의 유치장 격투장면을 통해 밑바닥 정서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어떤 영화건 시나리오에 맞춰가는 게 액션의 첫 번째 임무”라는 신재명의 액션 철학이 안정기에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일단 뛰어>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호흡을 맞춘 권상우는 신 감독에게는 같은 팀원처럼 친근한 배우였다. 신재명이 배우와 트레이닝할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는 배우들에게 “너를 알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끌어낼 수 없다고” 늘 이야기한다. 조인성도 마찬가지였다. “상우는 세 작품을 같이 하며 끌어냈지만, 당신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내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대화한 끝에 <비열한 거리>의 병두가 태어났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는 신재명표 리얼 액션과 유하 감독의 서정적 서사가 결합해서 빚어낸 결과물이다. “천부적인 운동신경과 스피드를 타고난” 권상우와 “선수생활을 경험했고 다양한 손발 동작의 응용이 자유자재에 가까운” 조인성을 신 감독은 매섭게 트레이닝했다. 오랫동안 액션영화팬들에게 기억된 <말죽거리 잔혹사>의 마지막 옥상 결투는 사실 “리얼한 액션에 가깝지 않다”고 신 감독은 말한다. “버스 안과 교실에서 벌어진 리얼한 액션의 감정을 토대로 마지막에 화려한 기교가 섞인 방점을 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보다 격렬함이 극대화된 <비열한 거리>의 굴다리 격투신에는 매일 25∼50명의 액션연기자들이 투입됐고 근육 파열 부상을 감내한 조인성의 투혼이 날것처럼 꿈틀거린다.
‘배우들의 저승사자’ 신재명표 액션 트레이닝
신재명의 배우 액션 트레이닝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처음에는 기본기와 동작을 만든다. 다음 단계는 그 동작을 현실적인 느낌이 생기도록 망가뜨리는 과정이다. 발차기나 주먹질의 기본동작을 무한정 연습시키고 시나리오에 맞는 무술을 익히게 한다. 그 뒤에는 손을 짚고 발을 뻗거나 몸을 기울이는 등의 불안정한 동작과 연습한 격투술을 결합시키는 일이 남는다. 여기서 신재명의 액션 철학이 나타난다. “어른이 아이를 때리지 않는 이상 맞은 사람이 10cm 이상 몸이 뜨는 상황은 현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말끔히 주먹이 오가는 상황도 비현실적이며, 원래 주먹이란 엉키고 튀어나가고 하게 마련”이라는 게 ‘막싸움의 마스터’가 그려낸 제대로 된 액션이다. 두세달이 넘는 사람 잡는 리허설과 리얼리티에 강하게 집착하는 액션철학이 마주치며 신재명표 ‘리얼 액션’의 우주를 이룬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 리얼 액션은 세계 수준”이라고 스턴트 업계는 자신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신재명이 있다. 정작 본인은 “막싸움, 리얼 액션에서는 더이상 새로운 것을 뽑아낼 자신이 없다”고 고민하지만 사람들은 더 심오한 리얼 액션의 세계를 기대한다. “<비열한 거리>보다 훨씬 강렬하고 빠른 속도의 하드코어”라는 최양일 감독의 <수>와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하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고된 성장담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리얼 액션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줄 기회가 될 것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스트레스 때문에 “한쪽 눈이 안 보일 지경”에 이르는 습관성 포도염과 신경성 위궤양에 시달리지만 “화려한 무협이나 기교 위주의 액션도 자신있다”는 신재명 무술감독의 액션 연출은 또 다른 도약을 꿈꾼다.
선배 무술감독들이 본 신재명
“스턴트맨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
정두홍/ 무술감독·서울액션스쿨 대표
훌륭히 잘하고 있고 심지어 부러운 친구다. 누구나 일하고 싶은 감독들과 꾸준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하 감독이나 곽경택 감독처럼 스타일리시한 연출자들의 의도를 제대로 살려내고 지속적으로 작업 해나가면서 노하우를 쌓는 행보가 무엇보다 확실한 실력 발휘라고 생각한다. 신재명 무술감독은 같은 업계에서 우리 서울액션스쿨 사람들에게도 자극제가 될 수 있고, 스턴트맨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상대적으로 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헤쳐나가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그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기분이 좋다.
“리얼 액션에 사극 격투를 혼용한 스타일”
전문식/ 무술감독·칸-주먹공방 대표
신재명 무술감독은 후배지만 우리처럼 똑같이 힘든 시기를 보냈고 그걸 잘 극복했다. 현재 액션팀을 이끄는 사람들 중에 초창기부터 일이 잘 풀렸던 사람은 거의 없다. 정두홍 감독이나 나도 그건 마찬가지다. 신 감독도 무술감독 시작한 뒤 4∼5년을 힘들게 보냈다. 액션 스타일로 보면 정두홍 감독은 리얼 액션이 엄청 강하고 요즘은 기교도 접목되는 분위기다. 나는 처음에는 기교 스타일로 배워서 리얼 액션을 적절히 섞어가는 중이고. 신 감독은 리얼 액션을 바탕으로 고전적인 사극의 격투 방식을 적절히 혼용해 자기 스타일로 뽑아낸 것 같다. 사전에 프리 프로덕션이나 데모 작업을 통해서 준비를 철저히 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