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강우석 감독과 <한반도> [1]
2006-07-13
글 : 문석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강우석 감독의 신작 <한반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96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또 하나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한반도>는 ‘한국 영화계 최고의 승부사’ 강우석 감독의 야심이 녹아든 작품이다. 일본이 동아시아에 검은 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가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표현하고 있는 이 영화는 선굵은 남자배우들이 등장하며, 대규모 세트와 구축함, 전투기 등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일본과 정치·군사적인 정면대결을 선언한다는 점 등에서 큰 기대를 모아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영화는 6월26일 기자시사회 이후 여러 매체로부터 심상치 않은 혹평에 시달리고 있다. 과연 <한반도>는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의 논쟁점을 짚어보고 각기 다른 각도로 이 영화를 바라본 평론가 3명의 비평을 싣는다. 그리고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지금의 상황은 110여년 전 외세가 우리를 갖고 놀면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독살하던 때와 대동소이하다. 외세에 대해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대응한다는 것을 영화로 알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었다.” 지난 4월 강우석 감독이 설명해준 제작배경에 따르면 <한반도>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결론이 정해진 프로젝트다. 관객으로 하여금 일본의 위험성과 극일(克日)정신을 느끼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는 이 영화 안에서 다분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반도>의 배경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다. 남북의 화해무드가 무르익어 마침내 경의선 철도가 완전 개통하는 날, 일본 정부는 경의선 운영권을 영구히 일본에 넘긴다는 1907년의 문서를 들이밀며 “경의선 개통을 불허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해온다. 일본은 한국이 이를 무시한다면 157조원의 차관을 빌려주지 않고, 한국에 제공된 첨단기술을 회수하겠다고 협박한다. 일본의 존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총리(문성근)는 이를 수긍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국가적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통령(안성기)은 한일합방의 무효성을 연구해온 국사학자 최민재(조재현)에게 희망을 건다. 그는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할 것을 우려한 고종황제가 가짜 국새를 만들었고, 진짜 국새는 어딘가에 숨겨뒀다고 주장한다. 결국 일본이 내민 문서에 찍힌 국새는 가짜이기 때문에 진짜 국새를 찾는다면 일본의 억지도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도굴꾼 유식(강신일)과 함께 진짜 국새를 찾는 일에 돌입하지만, 총리의 사주를 받은 국정원 요원 상현(차인표)이 그의 앞길을 사사건건 가로막는다. <한반도>는 현실과 상상을 결합할 뿐 아니라 강 감독이 밝힌 제작배경에서도 드러나듯 과거와 현재까지 대비시킨다. 영화는 명성황후(강수연)의 시해와 고종(김상중)의 독살 등을 보여주면서, 이 100년 전의 사건이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궤를 함께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국새를 둘러싼 민재, 유식과 상현의 갈등, 대통령과 총리로 나뉘어진 정치권의 암투,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의 사건이라는 세 가지 축을 오고가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한반도>는 그 구도의 다채로움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모든 문제가 국새를 찾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설정은 차치하더라도, 민재가 헛다리를 짚는 이유, 상현의 ‘변심’ 배경, 대통령이 맞이하는 ‘사고’의 의도 등 많은 부분이 설득력있는 설명없이 진행된다. 영화 중반까지 긴장감으로 작용했던 선과 악의 명확한 대립구도 또한 결말에 이르러 갑자기 평행관계로 돌변해 당혹감을 안겨준다. 또 거친 남성성으로 내면이 무장된 남성 캐릭터들을 잘 묘사하기로 정평이 난 강우석 감독이지만, <한반도> 속 인물들은 시종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드러내며 각이 진 입장과 행동만을 취할 뿐이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부들에게 “11월17일(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여편네들에게 반말도 못해”라고 성질을 내는 민재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끼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한반도>가 객석을 빨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설교조의 긴 대사가 지나치게 많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민재와 대통령을 위시한 캐릭터들은 대한제국 시대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 국내 정치정세,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사안에 관한 여러 주장을 딱딱한 강의식으로 설명한다. 이 객석을 향해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감독의 주장은 과거신의 화려한 액션, 실감나는 정부종합청사 파괴신, 구축함과 전투기의 생생한 화면 등 볼거리마저 잠식한다.

물론, 강우석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절박한 심정으로 말하려는 내용이 전부 다 터무니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을 담는 그릇이 투박하다는 뜻도 아니다. 울퉁불퉁한 질그릇으로도 훌륭하게 메시지를 담았던 <실미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한반도>의 문제는 그릇이 아니라 요리의 문제다. <한반도>의 그릇은 전작에 비해 훨씬 날렵하고 세련된 외양이지만, 뚜껑을 열면 설익거나 날것 그대로의 외침만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과연 <한반도>는 강우석 감독의 실패작인가. 적어도 영화적 완성도를 내건 첫 번째 라운드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만, ‘대중영화의 귀재’로서의 그가 관객과 흥행을 놓고 벌이게 되는 두 번째 라운드의 결과가 나온 뒤에야 진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한반도>

현실감 없는 울분에 찬 욕설

김봉석/ 영화평론가

<한반도>는 이웃이자 라이벌이자 적인 일본에 대해 할 말을 한다. 명성황후를 무참히 참살하고 나라를 빼앗았으면서도 제대로 사과와 배상조차 하지 않았다고. 그런 분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가상의 사건을 제시한다. 만약 일본이 경의선 철도의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면? 경제, 군사적 압력으로 한국 정부를 위협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반도>는 한국과 일본을 둘러싼 가상의 사건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한 팩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비열한 요구를 둘러싸고 한국 내부의 입장이 갈린다. 대통령은 봉인된 국새를 찾아 일본을 세계의 법정에 세우겠다는 이상론자다. 국무총리는 미·일에 종속된 정치경제적 여건상 일단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론자다. <한반도>의 갈등은 대부분 이상론과 현실론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물론 그건 이상론도, 현실론도 아니다. 다만 서로가 그렇게 부를 뿐이다. 국무총리는 을사오적에 비유된다.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설전을 벌이거나 졸도하는 장면이 고종이 일제와 을사오적에게 능멸당하고 독살당하는 장면과 교차편집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즉 국무총리 일파는 친일파이고, 외세를 등에 업은 매국노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설전과 대립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선악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액션이나 사건보다 설전과 감정으로 끌어가는 <한반도>의 약점은 이른바 현실론자의 논거가 너무나 취약하다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스폰서가 필요하다던 이상현은 내내 확신범을 자처하다가, 민족과 통일을 외치는 최민재의 몇 마디에 입장을 바꾼다. 서울대 국사학과 최고의 수재였다는 이상현의 논리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국무총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힘이 세니까 그들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요즘 초등학생에게도 쉽게 안 통한다. 사실 일본의 후안무치한 요구 때문에, 한국에 내분이 일어난다는 것부터가 요령부득이다. 아무리 극우파라도,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그런 매국적인 주장을 쉽게 할 수가 없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앞섰다고는 하지만, <한반도>는 적을 너무 쉽게 바깥으로 설정한다. 적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가장 수월하고 빠르게 내부를 단결시키는 힘이다. 독재정권이나 극우파들이 그래서 애용한다. 외부의 적을 상정하여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나라와 민족을 구한다는 명분만 있다면, 무엇이든 허용되기 때문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나라든 선제공격을 가하겠다고 선언했고, 미국인들은 기꺼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다. 즉 이라크의 경우처럼 잘못된 정보에 의한 착오라도, 일단 전쟁은 시작하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힘의 논리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모든 것은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

민족주의가 위험한 것은, 국수주의와의 경계가 너무나 희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치스는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으로 독일 국민의 패배감을 씻어주고, 제3제국을 건설했다. 일본의 극우파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으로 정치적 인기를 얻으며, 결국 도지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과도한 민족주의에는 나라의 구분이 없다. 평화를 사랑하는 중립국 스위스는, 월드컵에서 ‘적’이라는 이유로 한국을 강간하는 그림의 티셔츠를 만들기도 했다. 자기가 최고이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민족주의는 충돌과 전쟁을 불러올 뿐이다.

물론 <한반도>의 문제제기는 유효하다. 민족의 자존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한반도>는 그런 복잡한 질문에 어떤 답과 단서도 주지 않는다. <한반도>의 갈등이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현실에서 민족을 외치는 이들이 이상론자이며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다기보다는 주로 정치적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정치 모리배들이기 때문이다. 국무총리처럼 눈에 보이는 반역자가 아니라, 독도 수호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일과 손잡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의 사과와 배상문제가 꼬인 것도, 민족주의자를 자처한 박정희 때문 아니던가. <한반도>는 일본과 미국을 비난하고 매국노들을 응징하면서도, 아주 단순한 감정적 논리만으로 일관한다. 그건 팩션이 아니라 울분에 찬 욕설일 뿐이고, 우리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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