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다큐멘터리 촬영현장을 가다 [1]
2006-07-11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2002년 6월. 전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쳐대고 있을 때, 최진성 감독은 <그들만의 월드컵>을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투쟁, 외국인 노동자들의 강제추방 위기, 장애인들의 이동권 확보운동…. 거대한 함성 속에 감춰진 이웃의 싸움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또다시 붉은 악마로 호명된 전 국민이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4년 전과 똑같은 상황.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판단을 모두가 유보한 듯한 기이한 진공상태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한-미 FTA 협상과 새만금 사업, 그리고 씩씩한 투쟁들…. 한결 교묘해진 상업성을 등에 업은 함성에 덮여버린 현실 역시 여전하다. 다행인 것은, 차가운 카메라를 들고 뜨거운 현실을 담기 위해 변함없이 땀 흘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모두가 즐길 수 없는 축제, 전시와 감상의 대상이 되어버린 투혼으로 가득한 6월. 진심어린 투혼으로 진짜 축제를 만들어나가는 이들의 현장을 찾았다.

태준식 감독의 <필승 연영석>. 나루 감독의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이재수 감독의 <새만금 이야기>, 이훈규 감독의 <146-73=스크린쿼터+한미 FTA>. 영화기자들에게도 극영화 현장과는 달리 다큐멘터리 현장은 왠지 낯설었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담고 있는 대상보다 자신이 앞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기억해주시길. 낯선 경외와 뒤늦은 진심을 담아 전하는 이 현장은, 카메라를 든 사람과 그가 카메라에 담는 대상을 분리할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이들 작품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쉽게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을.

이재수 감독의 <새만금 이야기> 촬영현장

갯벌이 들려주는 슬픈 생명의 노래

한국의 독일월드컵 16강 탈락이 결정된 지난 6월24일 아침, 이재수 감독과 함께 전북 부안으로 향했다. 부안군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계화리에 위치한 ‘갯벌배움터 그레’가 나온다. 그레는 새만금을 찾는 사람들이 갯벌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된 일종의 교육시설로, 갯벌에서 생합을 캘 때 사용하는 도구의 이름이기도 하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 주민 서너명과 식당을 찾았다. “조개 색깔도 예전 같지 않고, 물안개도 부쩍 많아졌어. 이번 장마가 관건이여.” 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선박을 소유한 진순돌씨가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완결된 지난 4월21일 이후 눈에 띄게 달라져가는 바다를 이야기한다. 반주로 주문한 소주병이 10병 가까이 늘어간다. 때때로 만담이 오가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침울한 분위기는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내 그들과 함께 한숨짓던 이재수 감독은 ‘형’들의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그들의 빈 잔에 연신 술을 따른다.

이러다 해가 져버리는 건 아닐까, 제대로 된 촬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기자의 속타는 마음이 티가 났던 모양이다. 이재수 감독이 매일같이 먼 갯벌에서 생합을 캐는 아주머니들을 경운기로 나르는 김용석씨에게 갯벌행을 부탁한다. 일행을 맞이한 것은 저 멀리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온갖 생명이 꿈틀거리는 갯벌이 아닌, 둑이 완전히 막힌 지 1주일 만에 숨을 멈춘 갯벌. 미처 갈 곳을 찾지 못한 조개며 게의 시체가 간혹 눈에 띌 뿐인 황폐한 벌판이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갯벌을 카메라에 담던 이재수 감독이 주위를 맴돌던 김용석씨를 붙들고 인터뷰를 시작한다. “계화도에 처음 온 게 언제야?” “초등학교 5학년.” “그때는 어땠어?” “겁나게 좋았지. 조개도 많고.” 설렁설렁 이어지던 대화가 문득 방향을 선회한다. “물길 막히는 날 기분이 어땠어?” “… (한숨) 죽고 싶었지.” “근데 옛날에 (방조제 건설) 동의서에 도장은 왜 그렇게 맥없이 찍었어?” “…(고개를 돌리며) 그냥, 그렇게 됐어.” 사뭇 집요한 인터뷰를 끝낸 것은 “이 왕재수야, 인터뷰 이제 그만하고 빨리 가자”는 김용석씨의 재촉이었다. 경운기에 다시 몸을 실은 감독이 지나가듯 말한다. “고마워요, 형.”

4년째 새만금과 함께한 이재수 감독이 그 심정을 모를 리 없다. 20여년 전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덥석 간척사업에 동의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와 설마설마 했는데 막혀버린 바다를 마주한 막막함은 그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새만금의 관계가 처음부터 끈끈했던 건 아니다. 2002년 3월, 새만금 사업의 대안으로 등장한 바다도시 구상안에 대한 TV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그는 새만금을 알게 됐다. 그로부터 1년 뒤 지역 주민들이 갯벌 복원의 염원을 담은 짱뚱어 솟대를 리어카에 싣고 서울로 향하는 그 길을 따라갈 때까지도, 그는 차가운 카메라를 앞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태어났던 그의 딸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고, 연약한 생명을 지키려 안간힘을 다했던 경험은 깨달음을 주었다. “슬쩍 건드리면 바로 펄 속으로 파고드는 게, 빠끔히 바깥을 살피다가 재빨리 움직이는 조개 등 저 멀리 바다와 맞닿은 갯벌 가득한 생명”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었다. “평생을 함께했던 조개가 폐사한 현장을 보고 오열하는 아주머니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새만금과 진짜 인연을 시작했다.

그레로 돌아온 이재수 감독이 갑자기 호미를 찾는다. 낮술도 깰 겸 그레 앞마당에 자리한 작은 텃밭에 김을 매겠다는 감독을 따라 어정쩡하게 밭에 주저앉는다. 까마득한 농활의 기억을 떠올리며 호미질에 열중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문다. 모름지기 농활의 백미는 하루 일과를 마친 뒤의 술자리. 아니나 다를까, 부안 시내에서 사온 삼겹살을 핑계 삼아 파티가 이어진다. 갯벌을 지키기 위한 삼보일배 대장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길을 묻다>를 만들었고 현재 계화에 머물면서 새만금에 대한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오종환 감독이며, 점심을 함께했던 ‘형님’과 그 가족까지 모여든다.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 갯벌에서 캐온 생합으로 만든 생합탕이며 골뱅이무침으로 그득한 상을 앞에 두고, 대화는 또다시 갯벌의 변화로 이어진다. “예전엔 이렇게 작은 생합은 캐지도 않았는데. 이젠 큰 생합이 없어.”

형들과의 술자리에 열중한 이재수 감독은 그 모든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그가 택한 방식은, 바다와 한몸이 된 이들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 2002년부터 시작한 촬영은, 지난 4월21일 갯벌이 죽음을 언도받은 그날 1차적으로 마무리됐고, 4년간의 기록은 <새만금이야기1-절망과 희망의 기로>로 올해 안에 완성할 계획이다. 그 이후 한달에 한번 정도 계화도를 찾는 그가 촬영하는 것들은 <새만금 이야기2>를 위한 분량이다. 죽어가는 갯벌의 변화, 그 안에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 지역 주민 개개인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담을 것이다. 예전에는 각종 시위 등 눈에 보이는 싸움을 그대로 따랐다면, 이제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술자리에서까지 긴장하고 촬영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어차피 작업은 “담수호 계획을 전면 철회한 시화호처럼 새만금 사업이 전면 백지화하는 그날까지, 그리고 그 이후 새만금이 예전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어쩌면 평생토록 이어질지도” 모른다. 진심어린 관계를 맺기만 한다면 필요한 말들은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 방송사 외주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틈틈이 개인작업을 하고 있다는 그에게 긴 시간을 담보해야 하는 새만금이 어느 순간 짐이 되는 건 아닐까 싶지만, 이재수 감독은 “다큐멘터리스트로서, 평생을 걸 만한 화두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히려 행운”이라고 믿는 쪽이다.

다음날 아침 5시. 지난 밤의 숙취가 가시지 않았을 이재수 감독이 계화리의 동틀녘을 스케치한 뒤 하구로 향한다. 갯벌의 얕은 물길에서 생합을 건져올린 배의 하역작업에 나선 고은식씨의 작업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배의 갑판을 가득 메운 생합을 쉽없이 자루 안에 퍼담는 고은식씨의 힘찬 삽질을 30분가량 따라잡던 이재수 감독이,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던 기자에게 웃옷과 카메라를 건넨다. “좀 도와주지 않으면 욕먹게 생겼다”며 바지를 걷어붙인 그가 “인력교대!”를 외치자, 고은식씨는 당연하다는 듯 그에게 삽을 쥐어준다. 30분 정도 삽질에 열중하던 이재수 감독이, 이번에는 소주 한잔을 곁들인 작업 마무리 광경을 담기 위해 삽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든다. 한 시간 남짓한 하역작업이 끝난 뒤 일당 6만원을 받게 된 고은식씨와 그 시간을 말 그대로 함께한 이재수 감독, 모두 땀으로 뒤범벅이다. 그 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닮았다.

갯벌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거두는 밭이라고 한다. 바다가 완전히 막힌 뒤 생합잡이 배의 수입은 무려 3분의 1로 줄었다지만, 비교대상이 없는 외지인은 생전 처음 보는 많은 양의 생합을 앞에 두고 그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다. 김이며, 소금, 게와 숭어 등 갯벌이 품고 있는 수많은 생명의 존재 역시 문득 생생하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소중한 존재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이재수 감독이 외지인들과 새만금 이야기를 할 때 버릇처럼 “새만금 가본 적 있으세요?”라고 묻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종 물막이 작업과 함께 새만금 역시 마무리됐다고 믿는 모든 이들이 이곳을 찾아주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처 설득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을 향해 말을 걸기 위해 이재수 감독은 <새만금 이야기>를 찍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갯벌과 그 갯벌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의 한숨을 담는다. 그러나 그 아쉬움과 답답함과 슬픔의 힘으로, <새만금 이야기>는 언젠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어쨌거나 여기서 희망을 찾아보기로 했다”

부안 계화도 주민 고은식 인터뷰

고향인 논산에서 부안으로 세살 때 이사를 온 뒤,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아온 고은식씨는 이재수 감독이 계화도에서 모시는 수많은 형님 중 한명이다. 새만금 사업 반대에 열중하느라 몇년 만에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며 흐믓한 미소를 짓는 고은식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짜 어민’. 그가 진짜 어민이 되는 날은 새만금의 드넓은 갯벌이 부활하는 날과 같다.

-새만금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출연도 많이 했을 것 같다.
=출연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찍혔다고 하는 게 맞다. 참 이상한 게 술을 한잔 먹으면 얘기가 잘 나오는데 왜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렇게 얼어버리는지. 이젠 뭐, 많이 해서 나름대로 익숙하다. 그래도 KBS 다큐멘터리 <새만금,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에서는 내레이션을 해서 20만원을 받았다. 방송이라 그런지 역시 다르더라. (웃음) 전부 그레에 생활비로 기부하긴 했지만. 우리 딸 (고)은별이는 오종환 감독의 <계화갯벌: 여전사전>에서 내레이션을 한 적도 있다.

-이재수 감독의 작품은 다른 다큐멘터리와 비교해서 어떻게 다른 것 같나.
=사실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 하여간 친하니까 아무래도 인터뷰를 해도 좀 편하다는 것 정도? 욕심이 많은 감독들은 자기 의도대로 만들려고 하고, 그렇게 안 되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 것도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재수는 카메라로 그냥 현실을 찍으려는 쪽인 것 같다.

-이재수 감독이 동네분들과 싸운 적은 없었나.
=용석이 형이 삐쳐서 둘이 며칠 동안 말을 한마디도 안 한 적은 있었다. 그게 다 재수가 자꾸 슬슬 약을 올려서 그렇게 된 거다. (웃음)

-앞으로 새만금은 어떻게 될까.
=결국은 물을 틀 수밖에 없을 거다. 얼마나 그 기간을 단축하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떠난 사람을 봐도 힘든 건 마찬가지더라. 어쨌거나 여기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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