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대부, 마리오 바바의 영화세계 [2]
2006-08-01
글 : 김도훈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장편 심사위원장으로 부천 찾은 람베트로 바바 인터뷰

부전자전(父傳子傳). 1980년에 시체애호증을 다룬 지알로 영화 <마카브로>로 데뷔했을 때부터 람베르토 바바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유전자를 이어받아 다리오 아르젠토의 휘하에서 수업한 재원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은 람베르토 바바는 곧 갇힌 공간을 무대로 한 좀비영화 <데몬스> 시리즈를 연이어 성공시키며 <아쿠아리스>의 미켈레 소아비와 함께 다음 30년의 지알로를 책임질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벌써 20여년 전의 이야기다. 90년대가 오기도 전에 (스파게티 호러라고 불리운) 이탈리아 호러영화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시체스 호러영화제 수상작’ 등등의 이름을 내걸고 한국의 동시개봉관을 강타했던 이탈리아 호러영화들이 부계의 유전자를 어느 순간 상실해버린 것이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이유가 동시에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람베르토 바바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TV계로 진출해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온 그는 2006년 한해 <고문자>와 <고스트 선>이라는 신작을 내놓으며 극장용 장편의 세계로 돌아왔다. 마리오 바바의 유산은 여전히 피를 타고 계승되는 것일까. 부천영화제 장편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을 찾은 람베르토 바바를 만났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당신이 어떻게 영화계에 입문했는지 궁금하다.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기 전에도 영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었나.
=아니다. 어릴 때는 아주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아버지 영화의 세트에 가는 것조차 겁이 났다. 14살인가 15살 때였나. 아버지를 보러 세트장에 갔다가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끝나고 보니 어느샌가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웃음)

-아버지로서의 마리오 바바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보자면 재능있는 예술가들은 좀처럼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데.
=굉장히 좋은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더라도, 친구들의 아버지에 비해 30년을 앞서간 진보적인 아버지였다고 확신한다. 이를테면 아침에 학교 가라고 깨우다가도 밖에 비가 오고 있으면 그냥 집에서 쉬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학교에 가고 싶어지지만 말이다. (웃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과 둘러앉아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말하곤 한다. 그는 세트장에서도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항상 미소와 유머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나와는 정반대다.

-이번 특별전의 프로그램은 참으로 아쉽다. <블레이드 인 더 다크>나 <미드나잇 킬러> 같은 당신 작품들이 누락되었고, 게다가 마리오 바바의 초기작들은 거의 빠져 있다.
=아버지의 초기 작품들을 이번 특별전 카테고리에 넣어도 되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 작품들 중 많은 수는 지금도 필름을 찾기가 힘들다. 또한 어제 상영된 <데몬스>의 경우, 좋은 필름을 썼음에도 사운드가 아주 열악하다. 물론 지금 현재 발견된 영어판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다. 누군가가 미국에서 새로운 프린트를 찾지 않고서야 더 나은 것을 볼 수는 없다. 필름은 늙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지금은 DVD에 저장해서 남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동시개봉관이나 비디오테이프로 지알로 영화들을 본 경험이 선하다. 그러나 80년대가 지나고 나서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맥은 끊긴 느낌이다. 그쪽 상황은 어떠한가.
=흐름이 닫혔다. 아마도 80년대 후반에 닫혔을 것이다. 80년대 후반에는 공포영화계의 재능있고 유명한 제작자들이 모두 TV계로 자리를 옮겼고, 지알로가 아니라 모든 시청자를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TV에서 지알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흐름이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 역시 한동안 TV계에서 활동하다가 최근작 <고문자>와 <고스트 선>을 통해 극영화로 돌아왔다. 당신 말처럼 2000년대에 새로운 흐름이 시작된다면, 다리오 아르젠토, 미켈레 소아비 같은 감독들도 극영화로 돌아온다는 의미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야기를 먼저 조금 하겠다. 내 생각에 공포라는 장르는 매우 근본적인 영화다. 그것은 시작을 부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포영화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 다시 장르로 돌아오기도 하고, 또한 새롭게 공포영화로 시작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사실 90년대 이후에는 이탈리아 공포영화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공포영화 장르의 발전 자체가 멈추었다. 너무 많은 피와 지나친 특수효과 탓이었다. 잠깐 고요한 시기가 있었지만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리오 아르젠토, 미켈레 소아비 같은 공포영화 감독들과는 여전히 친밀하게 지내고, 서로의 작업에도 영향을 주고받는 편인가.
=미켈레 소아비와는 한동안 연락이 끊겼으나, 부천에 오기 이틀 전에 통화를 했다. 그 역시 지금은 TV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곧 스크린으로 복귀할 예정으로 알고 있다. 물론 모두 친밀하게 지냈었다. 루치오 풀치는, 그는 조금 달랐다. 나와 아버지, 다리오 아르젠토, 미켈레 소아비가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루치오 풀치는 영화 자체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감독했다.

-부천에서도 상영된 <데몬스>는 시간을 더해갈수록 재미있는 구석이 많아지는 영화다. 이 작품의 유산 또한 그러하다. 지금은 패션화된 빠르게 움직이는 좀비들을 먼저 선보였던 것도 그렇고, <데몬스2>에서 TV화면 밖으로 기어나오는 악령의 모습은 일본영화 <링>이 가져다 쓰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데몬스>를 극장에서 본 경험이 없다. (웃음) 물론 나는 <데몬스>를 좋아한다. 21년이나 지난 작품이라 의상이나 소품들은 촌스럽고 웃기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 자체는 당신 말처럼 여전히 모던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시나리오 작업을 4명이서 6개월 동안 하루 24시간을 바쳐가며 작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몬스>에는 컷의 길이가 길게 늘어지는 장면이 없다. 뮤직비디오를 만들듯이 자르고 자른 뒤 합쳐서 지루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이미 데뷔작인 <마카브로>부터 당신의 영화는 비슷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다리오 아르젠토나 루치오 풀치와는 조금 달랐다. 조금 더 대중적이고 말쑥하다고 할까.
=나는 전통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보다 좀더 대중적인 영화를 좋아했다. 물론 아버지의 마지막 작품인 <쇼크>는 상당히 모던하지만, 그건 내가 각본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데몬스> 같은 모던한 공포영화가 좋다. 지금 현대의 어떤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작품 말이다. 여기 부천의 아파트들을 보라. 아래층 사람은 위층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지 않나.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올해 <아파트>라는 공포영화가 만들어졌고, 지금 상영 중이다.
=그거 봐라. (웃음) 나는 지금 한국과 아시아 감독들이 공포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한국 공포영화에서 지알로 영화의 영향력이 종종 드러난다는 사실을 아는가. 물론 거기에는 좋은 영향력과 나쁜 영향력이 동시에 있긴 하다. 화려한 미장센을 추구하지만, 스토리나 연기에는 신경을 조금 덜 썼다거나. 사실 아시아의 이탈리아인이라고 불리는 한국에서 유독 그럴지도 모를 일이고. (웃음)
=(웃음) 내가 한국에 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금 새로운 공포영화의 경향은 모두 일본과 한국에서 오고 있다. 비록 심사위원 자격으로 여기에 왔지만, 아시아 관객의 공포에 대한 개념이 이탈리아 관객의 개념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직접 목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두 나라에 공통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고, 아시아 관객과 이탈리아 관객이 공포를 느끼는 지점 역시 매우 비슷하다는 인상이다.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의 유산이 아시아에 계승되어온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감사하다. 만약 그렇다면 진정 판타스틱한 일이다.

-이미 당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재평가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그러한가.
=아버지는 70년대 당시 외국에 팔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비평가들에게 항상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상업영화 혁명이 일어난 90년대 이후부터 달라졌다. 아버지의 영화들이 다양한 국제영화제에 소개되고, 쿠엔틴 타란티노나 마틴 스코시즈 같은 감독들이 아버지의 영향력을 거론하면서부터 평가가 그때보다는 상승한 편이다.

-오랫동안 당신 이름 앞에 붙어온 ‘마리오 바바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떼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없는가.
=오히려 그렇게 봐주는 것이 기쁠 따름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데몬스>처럼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부담스럽지 않다.

-의외다. 많은 2세 예술가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아들은 꼭 아버지를 살해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극장용 장편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치솟는 제작비 때문에 공포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영화들도 만들기가 쉽지 않다. 현재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써놓기는 했지만 제작비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물론 싸고 쉽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드는 걸 워낙 좋아해서 기다리는 게 낫다. 83년작인 <블레이드 인 더 다크>를 리메이크할 계획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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