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괴물>을 보는 시선 [1] -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통해 돌아보기
2006-08-09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봉준호식 장르 파괴의 정점

‘봉준호가 돌아왔다.’ <괴물>을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이고, 처음으로 내뱉게 된 말이다. <괴물>은 그 큰 스케일과 ‘장르적’인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작인 <살인의 추억>보다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와 그 이전의 초기 단편들을 떠올리게 한다. <괴물>을 본 뒤 <살인의 추억>은 다시 보아야 할 영화 중 하나가 되었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이 일종의 외도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살인의 추억>이 봉준호식 ‘장르의 변주’라면, <괴물>은 봉준호식 ‘장르의 파괴’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괴물>은 그의 전작들(특히 단편 <지리멸렬>과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여준 봉준호의 세계에 닿아 있다. 이후 그의 영화들에 늘 따라다니게 된 ‘봉준호식 유머’ 또는 ‘블랙코미디적 감각’이라는 수식어를 낳은 그만의 영화세계. 그 세계를 구축해가는 그의 화법의 중심에는, 독특한 ‘도시적 감수성’과 건강한 ‘소시민적 감수성’이 있다. 봉준호, 그는 영락없는 도시인이고 소시민이지만,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소시민적 일상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또한 그 외부의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자유인이기도 하다. 그 외부란, 한편으로는 ‘자연’이고, 또 한편으로는 도시의 ‘후미진 공간’(루저들의 공간)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늘 어떤 ‘풍경’으로 시작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숲, <살인의 추억>의 가을 하늘과 들판, <괴물>의 한강.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의 독특함은, 그것이 단순한 도시의 대립항이라기보다는 도시와 은밀히 소통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영화 세계에서는 자연과 도시의 후미진 곳(어둡고 습한 공간: 아파트 지하실, 다리 밑, 하수도)은 ‘대결’한다기보다는 ‘소통’한다. 그의 몸은 분명 중산층 고층 아파트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을 듯한데, 그의 시선은 늘 창밖의 자연을 향하고 있고, 그의 마음에는 도시의 지하 세계와 그곳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가득하다. 청명한 하늘과 음습한 지하. 그는 이 두 이질적인 세계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 하나의 세계로 구축해간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블랙코미디’에서 냉소라기보다는 온기를 느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첫 단편 <백색인>은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흔들리고 부유하는 한 소시민의 일상을 쫓아가며 결국 자기 모멸적인 냉소에 이르지만, 그 뒤의 엔딩에는 산동네 아이들의 생명력에 대한 긍정과 애정이 담겨 있다.

미디어의 권력=현실 효과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하지만 봉준호의 세계는, 자연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나 루저들에 대한 온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자연과 루저들을 매개하고 소통시키는 것, 그것은 공통의 적에 대한 생리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거부’(‘저항’이 아니라)이다. 그 공통의 적을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 더 나아가 근본적인 적은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현실 효과에 있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봉준호 특유의 정치적 감수성이다. 봉준호의 정치성의 바탕에는 미디어의 권력=현실 효과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있다. 봉준호는 첫 단편 <백색인>에서 최근작 <괴물>에 이르기까지 TV 화면과 그 화면을 보거나 보지 않고 있는 인물들의 병치 장면을 즐겨 사용해왔다. 그는 곳곳에서 매스미디어의 현실 효과와 진짜 현실의 대비를 통해 미묘한 아이러니를 창안해낸다. 단편 <지리멸렬>은 이러한 대비를 그 소재이자 주제로 삼고 있다. 토론에 초청된 3명의 저명 인사의 도덕적 발언과 그 3인의 일상 속의 작은 악행을 유쾌한 톤으로 폭로하는 상상적(만화적) 현실의 대비. 그러나 그 마지막 에필로그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TV 시사 토론에 참석할 만한 지도적(지배적) 인사들의 언행 불일치와 위선에 대한 풍자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3인의 악행의 피해자인 인물들(신문배달 소년과 경비원)이 정작 TV를 켜놓고도 그 장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사회심리학 교수의 ‘상상적 범죄’의 피해자인 여학생은 예외이다). 그들은 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 있으며, 그 강력한 포섭망을 그런 식으로 ‘비껴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매스미디어가 구축하는 현실 세계의 위선성에 분노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덤덤하게 비껴간다. <괴물>에서의 어린 세주의 말처럼, ‘밥 먹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 TV는 꺼야만 하는 것이다. 이 덤덤한 무심성, 이것이 그의 인물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자 무기이다. 그들은 그 무심함을 무기로 애초에 그 자장 밖에 놓여 있던 자연 또는 루저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소통과 연대의 흐름이 이루어진다.

봉준호의 세계에게 소시민을 소시민의 일상에 긴박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매스미디어이다. 매스미디어의 강력한 현실 효과가 소시민을 소시민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소시민들은, 홀로 집에서 TV를 보거나(<백색인>의 소시민), 매스미디어에 의해 불특정 다수의 군중으로 포획된다(<괴물>에서 도심 빌딩의 대형 전광판을 쳐다보다, 그중 한 사람이 내뱉은 가래침에 동시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일으키는 군중). 반면, 루저들은 TV를 볼 수 없거나, 켜놓고도 보지 않는다.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현실 효과(거대 서사)의 외부에 있는 그들은, 다양한 설화적 세계(이야기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향유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경비원이 전하는 ‘보일러 김씨’의 전설, <괴물>의 매점 안에서 펼쳐지는 아버지 박희봉의 아들 박강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과는 큰 상관이 없는(어떤 의미에서는 그 흐름의 전개에 방해가 되기도 하는), 작정하고 멍석을 깔아놓은 채 펼치는 그 길고도 몽환적인 이야기(어쩌면 바로 이것이 감독 봉준호와 성우 출신 배우 변희봉의 ‘밀월 관계’의 비밀 중 하나일 것이다). 심지어 <살인의 추억>에서 백광호의 ‘향숙이 이야기’는, 그것이 중요한 플롯상의 복선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몽환적인 방식으로 펼쳐진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나의 이야기인지 너의 이야기인지 모를 이야기들….

봉준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은, 봉준호 영화의 전체 서사와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다. 봉준호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자유분방한 리듬의 설화성에 있다. 도시-소시민의 일상=현실을 만들어내는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을 비껴가며 자연과 도시의 지하 공간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이야기의 세계. 사실, 그 세계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으며, 그 경계의 구별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늘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미장센으로서의 ‘연기’(煙氣)와 그 경계를 아예 지워버리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이 등장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소독약, <살인의 추억>의 새벽 안개, <괴물>의 소독약과 ‘옐로우 에이전트’. <플란다스의 개>의 옥상 응원 판타지의 그 유연한 고속 촬영, 그리고 <괴물>에서 괴물에게 잡혀간 딸 현서가 피곤에 지친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그 천역덕스러운 판타지. ‘객관적인’ TV 뉴스 보도에서처럼 명징한 현실은, 애초에 없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 뉴스 보도의 자의성과 편파성과 선정성에 불만을 터뜨리거나(<플란다스의 개>의 현남, <괴물>의 세 남매), 무시한다(<지리멸렬>의 두 인물과 <괴물>의 박강두와 세주). 그리고 바로 그 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거대 서사를 만들어내는 장르의 법칙을 벗어나다

그러한 봉준호식 서사의 정점에 <괴물>이 있다. 영화 <괴물>은 이러한 봉준호식 서사 전략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며 그러한 대항 서사 만들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괴물>이 이루어내고 있는 성취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한국적 변주’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라기보다는, 가장 할리우드적인 ‘장르’(또는 소재)를 가지고, 그 장르의 법칙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현실 효과를 파열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봉준호는 미디어의 강력한 현실 효과만큼이나 거대 서사를 만들어내는 주류적인 장르의 법칙을 늘 의심스러워하며 그곳에서 벗어난다.

<괴물>에서 괴생물체는 체제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되고 그로 인해 서울 시민들의 일상이 강력하게 통제되지만, 정작 그것이 괴물이 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공격성과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 아니다. 사실 ‘괴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공격성만을 드러낸 것일 뿐이며,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싸운다. <괴물>에서 공권력이 괴물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종반부에서 ‘옐로우 에이전트’와 괴물의 대결은 계획된 전투가 아니라 우연한 조우에 가깝다). 체제는 오로지 미디어를 통해서 괴물을 창조해내며, 그것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자 한다(사실, 괴생물체의 희생자 및 접촉자들이 모여 있는 장례식장을 통제하러 온 공무원(김뢰하)은 정작 괴물에 대해 알고 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TV를 보라고 되풀이해 말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의 숙주(host: 이것은 <괴물>의 영어 제목이기도 하다)로 선고를 받는 순간, 오염된 한강을 자궁 삼아 태어나, 한강에 연결된 한 하수도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한강의 수많은 교각을 자신의 이동 수단이자 놀이터 삼아 성장해온 외로운 돌연변이인 ‘그것’은, 비로소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괴물’이 된다. 이상하게도 그 ‘괴물’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고 가정-조작된 바이러스를 겨냥하고 있는 ‘옐로우 에이전트’를 뒤집어 쓰자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하지만 정작 그의 최후의 숨통을 끊어내는 데는, 매스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 존재하는 일군의 루저들(삼남매와 다리 밑 부랑아)의 연대가 필요했다. 어찌보면 괴생명체는 자연과 하수구를 자유롭게 오가는 또 한명의 루저였고, 박강두의 가족은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 찍히는 순간 이미 괴물이었다. 그래서, 그 처절한 마지막 사투는, 은밀한 연대와 소통의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괴물의 최후의 순간은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기도 하다. 죽은 괴물의 입은, 대문자 가족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족이 탄생되는 자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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