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에는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선 볼 수 없는 ‘한국적 특수성’이 있다. 첫째는 ‘주변부성에 대한 인식’이요, 두 번째는 친부와 정부와 미국으로 겹쳐진 아버지성의 층위이다.
한국사회의 ‘주변부성’에 대한 인식
<괴물>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아닌, <살인의 추억>의 골격을 따른다. <우주전쟁>을 제외하고 할리우드 재난영화(<볼케이노> <딥 임팩트> <투모로우>)를 회고해보자. 과학자들이 재난에 대한 이상징후를 포착하여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는 대책회의에 착수한다. 우려는 현실이 되고 정부는 대피를 명한다. 그러나 <괴물>에는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대응하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한 물고기가 잡혀도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괴물이 나타나 시민들을 덮치지만, 정부는 아무 대책없이 ‘합동분향소’를 설치할 뿐이다. 막연한 추측으로 실시되는 격리와 방역은 시민의 불안만 가중시킨다. 딸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 아버지는 정부에 호소하지만 정부는 그런 민원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다. 한국 정부의 얼치기 통제는, 딸을 구하는 데 도움은커녕 방해만 된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범인은 단서를 남기지 않는 ‘괴물’ 같은 존재이고, 연쇄살인이라는 재난을 맞은 경찰은 전근대적 수사만 행할 뿐이다.
<괴물>의 무능한 한국 정부의 상위에는 유능한 미국 정부가 존재한다. ‘괴물’에 대한 모든 정보는 미군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미군은 정보를 독점한 채 무능한 한국 정부에 대책을 명하며,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세계 보건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유해물질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한다. 미군은 독극물을 한강에 무단 방류하여 괴물을 배태시킨 장본인이지만 아무도 모르며 미군은 책임추궁 당하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에도 미국의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녹아 있다. 미국은 증거를 검증할 기술을 가졌지만, 도움이 못된다. 또한 (영화에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연쇄살인범의 범인이 미군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무능하고 열악한 국가 시트템하에서 희생자의 성격도 대략 일치한다. <괴물>의 여중생과 거지소년은 <살인의 추억>에서 죽는 여성들(마지막 희생자는 여중생)과, 백광호 등 가난하고 못 배운 농촌 남자들의 변형이다. 또한 사투를 벌이는 이들의 면면도 일치한다. <괴물>의 사람만 좋은 할아버지(변희봉), 똑똑하지 못한 아버지(송강호), 운동권 출신 대졸 실업자인 삼촌(박해일), ‘시간 끄는 버릇을 지닌’ 양궁선수 고모(배두나)는 <살인의 추억>의 사람만 좋은 반장(변희봉), 투박한 시골 형사(송강호), 좀 지적인 서울 형사, 보조 역할만 하다가 결정적인 단서를 찾는 여순경(고서희) 등의 변주이다. <괴물>의 박해일은 <살인의 추억>의 서울 형사(김상경)와 용의자(박해일, 손이 곱고 강단이 있으며 혼자 살던 그가 운동권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의 이미지가 합체된 형태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의 이미지와 경찰병력을 분산시키고 경찰과 술집에서 충돌을 빚는 모습으로 어슴푸레 그려지던 운동권의 존재는 <괴물>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박해일과 환경운동 시위대를 통해 또렷이 드러난다.
무능한 한국 정부, 재난의 원흉이자 정보를 독점한 유능한 미군, 희생되는 소녀, 그녀를 구하려는 착한 어르신과 치열한 사내들, 결정타가 있는 여자, 공적 질서의 틈을 비집고 꿈틀대는 운동권 등등이 아마도 봉준호 감독이 한국사회를 형상화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들인 모양이다. 이처럼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는 것은 감독의 ‘한국사회의 주변부성에 대한 인식’이다. 중심을 따라가지만, 중심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주변부성’을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를 중심부(미국)와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가령 <스피드>의 서사와 인물을 그대로 답습한 <튜브>는 정서적 공감이 불가능한데, 이는 한국사회가 유능한 정부와 경찰영웅으로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작은 미국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스릴러와 재난영화라는 가장 할리우드적인 장르를 한국식으로 번역하면서, 중심부 미국과는 뚜렷이 다른 한국사회의 주변부성을 정면응시하고 그것을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는다.
세겹의 층위 - 아버지, 정부, 미국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과학자, 공직자 등 재난의 최전방에 있는 주인공들은 공적 사명을 완수하면서 가족도 돌봐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들은 공적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최후의 순간,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올인’한다. 아버지의 분투로 재난은 극복되고 조금 삐걱대던 가족간 갈등은 해소된다. 여기서 주인공은 공적 역할과 사적 역할을 한몸에 지닌다. 즉 아버지는 국가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합치된다.
그러나 <괴물>에는 서로 합치되지 않는 세 가지 층위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남루하고 무능하지만 자식을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이다. 둘째는 무능하면서 억압으로만 작동하는 아버지, 한국 정부이다. 셋째는 유능하지만 남의 아버지일 뿐인 미국이다.
첫 번째 아버지는 새로운 유형이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구절에 걸맞은 <효자동 이발사>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다”는 구절과 통하는 <소년, 천국에 가다>와 비교해보자. <효자동 이발사>의 ‘종’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자발적으로 더 큰 ‘아버지’에게 내주었다가, 자신의 비겁으로 불구가 된 자식을 고치러 헤맨다. 결국 자신이 ‘종’이 아닌 존재로 거듭남으로써만 자식이 바로 설 수 있음을 깨닫고, 죽은 독재자에게 상징적으로 맞서는 ‘소극적 저항’을 통하여 그의 자식은 다시 설 수 있게 된다. <소년, 천국에 가다>의 아버지는 ‘바람’ 같다. ‘큰 일’을 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않던 아버지는 자식이 커버린 뒤 나타난다. ‘삶의 질’을 강변하지만, 그는 전혀 ‘양질의 삶’을 살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그는 허깨비(귀신이자 식물인간으로 표상) 같은 존재로 나타나 자식에게 ‘개인적인 삶’을 잘 돌보라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며, 자식은 ‘미혼모의 남편-되기’를 통해 ‘사회적 존재-되기’도, ‘가부장적 아버지-되기’도 거부하고 완벽한 ‘사적-존재’로 살다 죽는다.
<괴물>의 아버지는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김소진)를 연상시킨다. <괴물>의 아버지는 ‘알아서 기는 종’도, 헛된 꿈을 꾸는 혁명가도 아니다. 오히려 그에 턱없이 못 미친다. 아예 권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발적 굴종도 없고, 권력을 탈취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괴물>의 아버지는 (<개흘레꾼>의 아비가 개에 물려죽는 것과 달리) 괴물을 무찌른다. 그는 죽은 독재자에게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산 괴물에 적극적으로 맞붙는 용기를 지녔으며, 자식에게 무심했던 ‘바람’ 같은 아버지와 달리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 우직한 과정에 운동권 삼촌과 굼뜬 고모가 함께한다.
<괴물>의 첫 번째 껍질, 아버지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의 수많은 ‘부성부재’의 텍스트와 달리, 드물게 부성애를 보여주었다는 점. 둘째,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거대 권력에 맞서는 새로운 부성을 보여주었다는 점. 셋째, 무능하면서 억압으로만 작동하는 두 번째 껍질, 즉 한국 정부와 여실히 대비된다는 점이다.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위치하는 한국 정부는 자신을 첫 번째 껍질(무능하지만 딸을 구하는 아버지)에 접근시킬 것인지, 세 번째 껍질(유능하지만 남의 아버지일 뿐인 미국)에 접근시킬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 즉 자신의 주변부성을 인정하고 국민을 구하려는 정부가 될 것인가, 자신을 중심부와 동일시하면서 국민의 생존을 도외시하는 정부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FTA 논란은 이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자본과 국가라는 ‘아버지-판타지’
두개의 ‘아버지 찬가’가 흘러나온다. 첫째,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는 모 카드사의 ‘자본-아버지’ 정언명법. 둘째,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가 꿈꾸던 나라,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국정홍보처의 ‘국가-아버지’의 상징조작. 수많은 광고가 그렇듯, 이는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다. 욕망으로서만 존재하는, 아버지 판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 이전에 인생을 즐기는 것과 아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병행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쾌락의 추구는 곧바로 의무이자 윤리이다. 자본주의-아버지는 ‘인생을 즐기라’ 명하고, 자식들은 쾌락을 강제하는 모순된 이 명령을 수행하고자 ‘소비하고 노동하기(카드 쓰고 카드 막기)’를 반복하느라 ‘쎄가 빠진다’. 따라서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부자(부르주아)아빠’를 불러내는 이 광고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정도가 식민지적 천민자본주의의 ‘서자의식’이나 ‘고아의식’에서 막 벗어났다는 선언이다.
둘째, 국민국가 만들기의 신화적 재구성이라 할 만한 ‘대한민국’ 광고는 일종의 ‘자수성가한 아들의, 없는 아버지 만들기 작업’과 비슷하다. 영광의 아버지를 만들어내어 존경하고 동일시하며, 역으로 상상의 아버지로부터 지지받고자 하는 이 전략의 핵심은 결국 자화자찬이다(“대한민국은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원래 부자였던 아버지와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꿈꾸고 그 말씀을 기리는 것, 이는 ‘자본주의적 축적과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가 완수된 이 시대의 ‘해리성 정신장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