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성욱의 현장기행] <그 놈 목소리> 촬영현장 [1]
2006-09-14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이혜정

강북강변로에 올라타자마자 지독한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와이퍼를 최고 속도에 맞춰놓아도 시야가 좀체 트이지 않는다. 운전 8년째, 이런 우중주행은 처음이다. 자동차가 탈없이 달려주는 게 신기했다. 8월25일 오후, <그 놈 목소리> 촬영장의 여섯 번째 방문이자 마지막 취재 길. 어지럽고 혼미한 상황이 딱 내 심정이다. 8월6일부터 25일까지 로케이션 촬영지 세곳과 세트장 취재 세 차례를 마무리하지만 촬영 40%를 넘어선 <그 놈 목소리>에 대해 무엇을 쓰면 좋을까. 과정 중에 있는 고단한 토막토막을 가까이 보고 말한다는 건 넓은 표면의 작은 스케치이자 추측이기 쉽다. 그 한계가 스스로 답답한 모양이다. 양수리를 지나 남양주종합촬영소 부근에 이르러서야 비의 기세가 꺾였다.

언제부턴가 김남주 매니저의 인사말이 머릿속을 지그시 눌러댔다. “오늘도 일기 쓰러 오셨군요!” 감독에게든 배우에게든 뭘 묻지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다가 이따금 검은 노트를 끼적거리다 돌아가는 모습이 기자의 행태 같지 않았을 것이다. 질문은 최대한 뒤로 미뤄둘 작정이었다. 설경구, 김남주 두 배우에게는 낯선 기자가 익숙해져 속얘기를 하나라도 더 꺼내들 수 있도록, 스스로는 관찰의 시간을 최대한 키워 질문의 상투성을 조금이라도 배제할 수 있도록. 지금보다 12kg이 더 불어 있던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을 알게 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친숙한 그에게조차 말걸기를 최대한 자제하고 미뤘다.

사실, 취재의 목표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설경구(는 달라지나)와 박진표식 팩션(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어느 순간, 충무로에서 ‘빅3’(최민식, 송강호, 설경구)란 표현이 증발됐다. 개성있는 성격파 배우 빅3의 에너지는 금융시장에서 과잉 축적한 한국영화의 총알처럼 돼버렸다. 이를테면, 설경구의 에너지는 잦은 폭발로 오히려 폭발력을 깎아먹는 것 같았다. 화력 조절의 미세한 미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던 차에 <그 놈 목소리>는 그 시험무대처럼 보였다. 일찌감치 촬영을 끝내놓은 <열혈남아>가 있고, “<열혈남아>에서도 끝까지 내지르지 않는다. 능청 떨면서 끝까지 참고 참는다”는 설경구의 코멘트를 듣긴 했지만, ‘카메라 출동’ 전문기자 출신으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훌륭한 언론인상까지 받은(주인공 아파트에 세팅된 소품에 따르면) 9시 뉴스 앵커가 아들을 유괴당한 뒤 무기력에 젖어드는 <그 놈 목소리>가 연기의 변곡점이 될 소지가 높지 않을까. 더구나 설경구는 <죽어도 좋아!> 이후 <너는 내 운명> 이전, 그러니까 상업영화를 성공시키기 이전의 박진표 감독에게 일찌감치 ‘꽂혀’ 아주 오래전에 출연을 약속했더랬다.

사실에 근거한 팩션영화라고 하더라도 <실미도> <한반도>와 <죽어도 좋아!> <너는 내 운명>은 각이 틀리다. 강우석과 박진표라는 감독의 스타일부터가 다른데, 박진표식 팩션은 <그 놈 목소리>에서 또 한번의 실험을 벌이고 있을뿐더러 그 다음 팩션 프로젝트를 일찌감치 준비 중이다. 현장에서 깨달은 것이지만 설경구를 탐색하는 길은 박진표식 팩션의 포인트 찾기와 교차하고 있었다.

인도·차도 구분없다, 아찔한 자동차 액션

8월6일 오후 압구정동 현대백화점과 현대아파트를 잇는 대로변. 에스페로 택시 같은 16년 전 차량 수십대가 진을 치고 2개 차선을 점령하고 있다. BMW, 렉서스 같은 고급 외제차들이 “누가 촬영을 허락했어”라고 투덜거리며 막힌 도로를 뚫고 지나간다. 아들을 유괴한 ‘그 놈 목소리’는 한경배(설경구)에게 카폰 달린 차에 1억원을 싣게 하고 서울 시내 뺑뺑이를 돌리던 참이다. 꽉 막힌 도로, 지정된 시간 안에 지정된 장소에 닿지 못하면 아들의 생사가 불투명해진다. 한경배가 옆자리에서 좌불안석이던 아내 오지선(김남주)에게 짧은 예고를 던지고는 차를 인도 위로 꺾는다. 구형 그랜저가 휴거의 심판이 다가왔음을 외치던 신자 무리를 뚫고 질주한다. 스턴트맨과 슈팅카,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촬영하는 B카메라가 동원된 아슬아슬한 장면이다. 설경구가 능숙하게 차를 몰고 첫 번째 컷을 무난히 마쳤는가 싶은데 모니터를 확인하니 초조해야 할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담겨 있다. NG다. “재밌나봐.”(설경구) “액션은 멋있었어. 한번 더 가자.”(박진표) 두 번째 슛에서 바로 오케이가 났다. “이거 완전 액션영화야. 무서워 죽겠어.” 설경구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다음 컷을 보면 액션영화 현장임에 틀림없다. 차 앞 보닛에 앉혔던 카메라를 떼어낸 뒤, 인도 위 인파 사이로 차가 질주하는 장면을 슈팅카가 나란히 달리며 찍는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을 달리는 차 앞뒤로 유연하게 옮기면서 긴박감에 리듬을 준다.

말복이던 8월9일 오후 2시 여의도. 올림픽대로를 달려온 한경배의 차가 63빌딩 맞은편에 멈춘다. 숨가쁘게 뛰쳐나온 설경구, 김남주가 쓰레기통 안에 남긴 범인의 메모를 찾아내 읽는다. 또 어디론가 이동하라는 지시다. 서둘러 다시 차를 출발시킨다. 압구정동의 액션신에 비하면 간단한 촬영이다. 그런데 감독이 위험도 잊고 도로 한가운데로 불쑥 걸어들어가 아쉬운 듯 63빌딩과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번갈아 쳐다보길 수차례. 한경배의 차와 63빌딩을 한번에 잡고 싶은데 신호등이 그 사이 시야를 가리는 게 문제였다. 신호등을 피해 찍은 컷을 보더니 “앵글이 별 재미없네”라며 시간을 끈다. 김우형 촬영감독이 해법을 냈다. 도착하는 차를 직각에 가까운 부감으로 잡아 반들거리는 뒤 트렁크 위로 반사된 63빌딩까지 한몫에 찍어내자는 것. 차가 멈추는 지점과 카메라를 스치고 지나가는 각도를 동시에 충족하기가 까다로워 촬영이 반복된다. 그 사이 감독이 문득 한마디한다.

“자식을 유괴당한 부모의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정작 촬영에 들어가니 스턴트까지 동원한 액션신을 찍어야 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스트레스지. 빨리 가야 하는데 도로는 막혀 있고 그렇다고 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그래서 차를 인도로 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절박한 심정을 표현하려고 넣은 장면인데. 나에게는 모든 장면이 감정신인데 결과적으로 액션신이 돼버렸어. 팩션 드라마는 항상 이게 문제라니까. 어디까지 줄타기를 하느냐는….”

지난번 촬영에 대한 코멘트다. 요긴한 이야기라 반가우면서도 “‘스타일 없는 게 나의 스타일’이라더니 앵글을 무척 신경쓰시네요?”라고 지금 촬영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숨가쁜 촬영 중! 간단하게 화답했다. “쓰레기통에 붙어 있는 저 휴거 스티커는 감독님이 특별히 생각하고 붙인 거죠?” “그래요. <그것이 알고 싶다> PD 때 휴거 열풍도 취재했었는데 온 나라가 장난이 아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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