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원과 이나영의 잠재성을 일깨우다
송해성: 윤수는 기본적으로 태생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고, 죄수복을 입혀놓으면 또 하나의 드라마가 되고, 사형수이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면 또 극적인 드라마가 되는데, 유정이는 모든 게 내면 속에 감춰져 있잖아요. 영화에서도 50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이나영이 참 힘들어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병실에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찍는데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요.
공지영: 이나영씨가 원작에서도 그 부분이 가장 슬펐다고, 너무 많이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송해성: 맞아요. 이나영이 원작 보면서 가장 슬퍼한 장면이었는데, 한 37번 찍었던 거 같아요. 너무 많이 울고, 감정이 격해서 말을 못하는 거예요. 울기만 하고. 새벽 6시쯤에 촬영을 접었어요. 나영이를 숙소로 보냈는데, 방에 들어가서 나 이제 연기를 못하나, 평생 CF만 해야 하나, 자책하면서 혼자 하염없이 운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다음날 오후 2시에 만나서 찍었는데 첫번에 오케이가 났어요. 그때부터 이나영이 변했어요. 한번 힘들게 찍고 나서부터는 너무 잘해서 거꾸로 제가 욕심이 생겼어요. ‘그동안 찍었던 거 다시 찍을까?’ 해서 한두번을 다시 찍었어요. 나는 욕을 먹어도 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만큼은 욕 안 먹기 바랐거든요.
공지영: 영화 캐스팅 발표되기 전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는데 갑자기 강동원씨가 절 만나고 싶다고 요청을 했어요. 마침 <형사 Duelist>로 이명세 감독님이랑 독일에 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만나러 갔는데, 너무너무 잘생긴 사람이 나온 거야. 속으로 야, 잘됐다. 이 사람이 죽으면 대한민국 여자들의 반은 사형제 폐지하자고 하겠지 생각했죠. (웃음) 강동원씨가 저에게 윤수라는 인물을 어떻게 생각했으면 좋겠냐고 묻기에 딱 한마디했어요. <장발장> 같은 작품을 보면 파리 지하에 있는 하수도가 나오잖아요. 평생을 그런 하수도에서 살던 한 남자가 처음으로 지상에 나와서 파리의 휘황한 거리를 봤을 때의 그 느낌으로 윤수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 충분합니다 하고 대답하더라고요.
송해성: 제가 원래 길게 찍는 걸 좋아해요. <파이란> 때도 그랬고 <역도산> 때도 그랬는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 숏들을 분절해야 하니까 내가 미치겠는 거예요. 그래서 만남의 방 마지막 촬영 때 두 배우를 불렀어요. 콘티가 원래 24컷이었는데, 한컷으로 가야겠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둘이 화들짝 놀라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거 한번도 해본 적 없다고 하면서. 그래서 “아냐, 너희들은 할 수 있어. 한번 해보자”고 설득했죠. 그렇게 4분20초 정도를 한컷으로 찍었어요. 딱 완성을 했더니, 둘이 팔짝팔짝 뛰면서 너무 행복해했어요. 그날 아침 8시까지 같이 술을 마셨어요. 저도 기쁘더라고요. 이나영, 강동원이 갖고 있는 잠재성을 일깨울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제게 가져다준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예요. 사실 이 친구들이 얼굴 때문에 연기가 폄하되는 부분이 있잖아요.
신파가 없으면 희로애락도 없다
송해성: <우리들의…>가 진부하고 신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저는 그게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희로애락이 없다면 신파도 있을 수 없는 것이거든요.
공지영: 저는 그런 말들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싶어요. 사실 한국 문학이나 영화 중에 사형수가 주인공인 작품이 몇편이나 되나요. 굉장히 드물어요. 누구나 맞닥뜨린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익숙한 듯이 보이는 거죠.
송해성: 그런 얘기도 많아요. 소설이 됐건 영화가 됐건, 여자가 상처를 받으면 왜 항상 성폭행이냐 하는 말.
공지영: 아니, 여자들은 돈 떼먹는다고 그렇게 상처받지 않아요. (웃음)
송해성: 자신의 상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성폭행이라는 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상처거든요. 칼로 찔리면 아프고 흉터는 남지만, 그게 엄청난 내상이 되진 않잖아요. 그리고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대한민국 배우의 절반은 다 하고 싶어했어요.
공지영: 그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정말 캐스팅의 묘미라는 걸 느꼈어요.
송해성: 하도 난리를 하니까 확 결정을 해버렸어요. 이나영이야 워낙 작품을 많이 봤었고, <영어완전정복>의 깜찍한 연기를 정말 좋아했어요. 근데 강동원은 좀 망설였죠. 근데 DVD 부록으로 강동원 브로마이드가 있었어요. 굉장히 고독하게 찍힌 사진이 있었는데 윤수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수에 차 있는 그 모습을 보니까 이 친구랑 영화 찍어도 괜찮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공지영: 전 영화에서 클로즈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만약 연기만을 위해서 나이 든 연기자를 선택했다면, 그래서 저 풋풋한 느낌이 안 나온다면, 클로즈업이 너무 괴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저는 정영숙씨를 보면서 정말 배우구나, 하는 생각에 확 놀랐어요.
송해성: 정영숙 선생님이 사실 우리 영화할 때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원래는 윤여정 선생님에게 그 역을 부탁하려고 시나리오를 보냈었어요. 근데 윤여정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송해성씨, 나보고 엄마를 하라는 거야, 수녀를 하라는 거야?” “뭐가 좋으세요?” 했더니, “나 이런 엄마 많이 해봤거든. 나 수녀하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정영숙 선생님을 만났는데 시나리오 보시더니 처음에는 못하시겠대요. 정 선생님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세요. 그러다보니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읽으면 가톨릭은 굉장히 좋은 일하고 개신교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며 못하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잘 알려진 목사님들께 직접 보여드렸어요. 보시더니 다들 “무슨 상관있어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죠. 그렇게 하게 됐어요.
사형수를 통해 인간의 사랑을 깨닫다
공지영: 원작에 없는 유머도 넣느라고 애쓰셨어요. 추도예배 볼 때 그 기도하는 말투도 너무 웃겼고, 절하는 장면도 재밌었어요. 보면서 많이 웃었어요.
송해성: 그게 사실은 실화예요. <역도산> 개봉 앞두고 하도 안 좋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는데, 아버님 제사 때문에 집에 누나들이 왔어요. 누나들이 성경 구절을 적으면서 저한테 추도예배 때 어떤 성경 구절을 할 건지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이 받으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짜증을 냈죠. 그랬더니 누나들도 화가 나서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절을 막 했어요. 그랬더니 식구들이 사색이 돼서 집에서 나가더라고요. 기독교에서는 절을 안 하잖아요. 나같이 절하는 놈이랑은 아버지 제사를 할 수 없다는 거죠.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죠. (웃음) 소설에는 없는 장면인데, 유정이 집안에 대해 반항적이라는 걸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보니 내 리얼 스토리가 떠오르더라고요.
공지영: 역시 감독들은 평소에도 반항을 많이 하는구나. (웃음) 근데 굉장히 잘 표현됐어요. 조연들도 참 좋았어요. 강신일씨도 짧게 나오지만 나올 때마다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줬어요. 제가 생각하던 딱 그 모습이었어요.
송해성: 강신일 선생님도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읽더니 이 주임 역을 안 하겠다고 그랬어요. 자기가 살면서 이렇게 대사없는 역할은 해본 적이 없다며. (웃음) 다시 이야기해서 결국 하게 됐는데, 저는 참 미안했어요. 대사가 너무 없으니까. 그래서 현장에서 대사를 만들어서 주기도 했어요. “형, 빵이라도 먹으라고 대사 해볼래?” 그랬더니 굉장히 남세스러워하더라고요. “야, 대사 없는데 끝까지 없는 걸로 하자”, 하면서. (웃음)
공지영: 강신일씨가 옆에서 안정되게 윤수를 받쳐줘서 좋더라고요. 교도소 장면 같은 경우도 좋았고요.
송해성: 취재 때문에 나영이, 동원이랑 교도소를 찾아갔는데, 동원이가 그러는 거예요. 자기 좀 유치장에 넣어달라고. 3일이나 4일 정도 독방에 있겠다는 거예요.
공지영: 그때 이 사람이 보통 각오가 아니구나 하고 느꼈어요.
송해성: 빈방이 없어서 결국은 실행에 옮기진 못했죠.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아무튼 그러고 나서 사형수들을 만났어요. 막가파의 주범도 있었고, 소설의 캐릭터가 되었던 분도 있었고…. 근데 전 그분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요.
공지영: 아유, 아무튼 그날 이나영씨는 엄청 울고, 감독님은 계속 딴 데 보고 있고 그랬어요.
송해성: 겁이 나는 거예요. 계속 빨간 명찰만 눈에 클로즈업돼 들어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얼굴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게 정말 사람의 얼굴이 아니에요. 우리와는 달리 분노라는 것이 없어요. 얼굴들이 너무 선해 보이는 거야.
공지영: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예요. 그리고 이나영씨가 온다고 밤새 잠을 못 잤다는 분들도 있었고요.
송해성: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사람들이 바로 잡혔을 때 왔다면 윤수의 캐릭터에 보탬이 되었겠지만,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런 얼굴이 다 사라졌다고. 그런 분들을 만나다보니까 제 생각도 많이 변하게 되더라고요.
공지영: 저도 사형제 폐지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얼마나 갈등했는데요. 맨 처음에 사형수를 다루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폐지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때 마침 유영철이 잡혔고, 공판을 따라다니면서 구역질을 하고 그랬었어요. 제가 사형수들을 취재한 이유도 제 자신이 여러 가지로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던 시기였기에 찾아갔던 거 같아요. 근데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봤어요. 우리가 이들에게 진정한 마음을 준다면, 악마의 모습은 사라지고 천사의 모습이 나온다는 걸 확신했어요. 사형수를 통해서 인간에게 사랑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 취재 과정만을 통해서도 저는 너무나 많은 구원을 받았어요.
살아 있어야 용서도, 화해도, 싸움도 할 수 있다
송해성: 97년, 김영삼 정권 때 사형 집행이 있었잖아요.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일 놀랐던 건 그거였어요. 사형수들을 전부 한방에다 몰아넣고 한명씩 불러냈다는 거예요. 그렇게 죽였다는 게, 어쩌면 죽이는 행위보다 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지영: 최대 처형이었죠. 명분이 다음 정권에 부담을 안 주기 위해서였다니 더 기가 막히죠.
송해성: 영화 속에서 윤수를 그렇게 죽일까 하는 생각도 사실 있었어요. 한명씩 한명씩 내 앞에서 사라져갈 때, 그렇게 결국 나 혼자 남았을 때 공포가 어떨까. 근데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공지영: 사형수들은 노동을 안 해요.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거예요. 지옥 같은 시간들이죠. 그래서 사형수들이 너무 힘들어하니까 신부님, 수녀님이 미션을 줬어요. 너의 일생을 노트에 정리해보라고. 그렇게 사형수들이 쓴 노트 5권을 받았고, 그걸 바탕으로 블루노트를 만들었어요. 저는 그 노트를 읽으면서 너무 놀랐던 게 하나는 정말 이렇게까지 비참한 삶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충격이었고, 또 하나는 1년에 영치금 5천원이 없는 재소자들이 1천명이 넘는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리고 세 번째 충격적이었던 것은 유정이나 모니카 수녀님처럼 말없이 그 사람들을 천사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희망이었고, 그것이 저를 살게 만들었어요.
송해성: 소설이나 영화나 결국 살아 있는 것 그 자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살아 있어야 용서도 하고, 화해도 하고, 싸움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공지영: 아까 감독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그게 키워드인 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역시 송해성 감독에게 맡기길 잘했다고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도시 풍경이었어요. 유정이가 등장하는 첫 부분에 나오는 도시 풍경과 나중에 나오는 빈민촌 풍경 모습이 대비되면서 한국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송해성: 한국사회의 모순을 말씀하셨는데, 사실 원작에서 제일 좋았던 것 중 하나가 윤수가 <애국가>를 부르는 거였거든요. 사실 그게 되게 웃기는 이야기잖아요. <애국가>를 부르면서 죽는다는 게.
공지영: 대한민국 엿먹으라는 거죠.
송해성: <파이란> 때도 이강재를 죽이는 지대한이라는 조직의 똘마니가 태극기 문양 문신을 하고 있어요. 결국 이강재를 죽이는 게 한국사회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죠. 소설에서도 애국가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좋았어요. 한번 이걸 우려먹어봐야겠다 생각했죠. (웃음)
공지영: 이나영씨가 야구장에서 애국가 부르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어요. (웃음) 담배 피우는 연기도 참 좋더라고요.
송해성: 그거 금연초례요. 나영이가 담배를 못 피워서.
공지영: 장면은 정말 얼마 안 되는데 나올 때마다 참 리얼했어요. 저 여자 담배 정말 맛있게 피운다, 생각했었다니까요. (웃음)
송해성: 이 영화가 결국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면 제가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상업적으로 좀. (웃음) 저는 뭐 아무튼 우리 영화가 <별들의 고향> 이후에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중에 가장 성공적인 영화가 된다면, 그것도 우리의 행복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공지영: 송 감독님이 판권 살 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많이 부드러워지신 것 같아요. 그게 <우리들의…> 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나영씨, 강동원씨도 처음에는 잔뜩 긴장해서 어깨가 굳어 있었는데, 나중엔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모습들을 보여줬어요. 개인적으로 두 젊은 배우가 스크린에서 그 무거운 주제를 소화해내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더라고요. 제가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젊은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걸 잘 못 봤거든요. 하이틴영화 빼고. 그래서 저는 전문가도 아니고 상관도 없지만, 한국영화의 앞날이 밝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