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비디오와 DVD 중 어느 매체를 선택할 건지 묻자, 다른 남자는 그릇에는 관심이 없다고 답한다. 마르코 벨로키오의 신작 <웨딩 디렉터>에 나오는 한 장면은 홈비디오의 오랜 화두를 떠올리게 한다. 때마침 그 화두를 다시 꺼내게 만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컬렉션> DVD가 출시됐는데,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차세대 홈비디오 매체 중 하나인 블루레이 디스크가 첫 출시될 즈음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화질의 이 DVD가 때깔 고운 신작을 고스란히 수록한 블루레이 디스크와 여러모로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뒤늦게 출시된 이 세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여기 수록된 이른바 ‘지그재그 삼부작’의 경우 매끄러운 화질로 완전하게 수록된 DVD는 아직껏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특히 앞 두편의 화질을 보자면 제작사가 마스터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러므로 이들 작품이 조만간 차세대 매체로 출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자, 이제 당신은 영화 자체가 소중하므로 그냥 이 DVD 세트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된 화질이 나올 때까지 다시 긴 세월을 기다릴 것인가. 또 아니면 경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처럼 그런 구분 자체를 초월할 것인가. 사실 배우, 영화, 시간, 현실, 관객 사이에 놓인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한 자에겐 또 다른 경계를 들먹이는 것이 옳지 않은 일로 느껴진다. 각 영화의 마지막- 노트 사이 꽃잎을 볼 때(<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언덕 너머로 두 아이가 넘어갈 때(<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남자가 희열에 차 뛰어올 때(<올리브 나무 사이로>), 죽음을 결심한 자가 석양을 볼 때(<체리향기>)- 에서 관객은 문득 영화 속 한 자리를 차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창조자의 손길이 인간과 그가 사는 터전을 스쳐간 이들 작품을 보며 그 손길 아래에 경계가 있다면 그 또한 우스운 일 아닌가 싶다. 키아로스타미 작품의 유일한 경계는 삶과 죽음 사이에만 존재한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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