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는 동등해야 돼요.” 한 페미니스트의 이야기에 그와 인터뷰 중이던 카자흐스탄 TV리포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낄낄 웃는다. 그리곤 그들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우리 정부 소속 과학자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보다 뇌가 작다고요.” 이번에는 전직 국회의원과의 인터뷰 자리. TV리포터는 전 의원에게 치즈를 권한다. “이건 우리 마누라가 직접 만든 치즈라고요.” 의원이 “아주 맛있어요”라고 예절 바르게 말하자 리포터가 말을 덧붙인다. “우리 마누라가 자기 젖을 짜서 만든 거거든요.”
정말 카자흐스탄 TV에는 이런 내용의 방송이 나오냐고? 글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보다 훨씬 정신 나간 내용들이 담긴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드나잇 패션’ 섹션에서 상영되는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문화 빨아들이기>가 그 영화다. 보랏 사그디예프란 이름의 한 카자흐스탄 TV리포터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조국을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프로듀서와 함께 미국을 방문해 다양한 문화를 익힌다는 내용의 <보랏…>은 정말이지 황당무계하다. 애초 뉴욕에서 다양한 분야의 미국인을 인터뷰하려던 보랏은 TV에서 본 파멜라 앤더슨를 만나기 위해 할리우드까지 대륙횡단 여행을 감행한다. 그는 이 도중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갖지만 황당한 사고만을 연발한다.
여성혐오주의와 반 유대주의로 철저히 무장했고, 온갖 ‘미개한’ 행위를 후안무치하게 감행하는 남자 보랏은 도대체 누구인가. 다들 예상하겠지만 그는 카자흐스탄 TV리포터가 아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사샤 바론 코헨. 영국과 미국에서 꽤 인기를 모으고 있는 코미디언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활동해온 그의 장기는 ‘캐릭터 변신하기’. 그가 지금의 인기를 얻게 된 데는 알리 G라는 캐릭터의 힘이 크다. 코헨은 카리브해 지역 출신 래퍼인 알리 G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정치인이나 저명인사를 모셔다가 황당한 내용의 인터뷰를 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았다. 보랏은 코헨이 진행하는 TV프로그램 <다 알리G 쇼>를 통해 소개된 캐릭터. 영국과 미국을 찾은 카자흐스탄의 TV리포터 보랏이 다양한 인물과 풍자 인터뷰를 한다는 설정의 ‘보랏 쇼’의 매력은 허구 속 캐릭터 보랏이 실제 세계의 사람들과 인터뷰한다는 데서 발생한다. 보랏의 말도 안 되는 행동과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의 모습은 엉뚱한 웃음을 자아낸다. 극장 버전 <보랏…> 또한 보랏이 미국을 여행한다는 기본 줄거리 안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보랏이 구사하는 유머는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중에서 인종차별주의는 심각한 수준이다. LA로 가기로 한 보랏은 “유대인들이 또다시 9.11테러를 저지를까봐” 비행기 대신 자동차로 대륙횡단 여행을 결심하며, 유대인 가정에서 민박하게 되자 “우리를 독살할지도 모른다”며 벌벌 떤다. 그는 이미 TV쇼에서 “유대인들을 우물 안으로 던져버려”라는 가사가 담긴 노래를 불러 유대인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여성비하도 만만치 않다. 자동차운전을 배우던 보랏은 여성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지나가자 운전강사에게 “우리 저것들을 확 덮쳐버릴까요?”라고 말한다. 황당한 표정의 강사가 “미국에선 여자도 섹스 상대를 선택할 수 있거든요”라고 말하자 그는 “농담하슈?”라면서 킬킬 웃어댄다.
이처럼 편견과 독선, 그리고 미개하다 할 정도의 무지함으로 가득찬 ‘카자흐스탄 TV리포터’ 보랏의 행동은 카자흐스탄의 문화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지난해부터 카자흐스탄 정부는 그와 법적 소송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난해와 올해에는 <뉴욕타임즈>에 4페이지에 걸쳐 카자흐스탄이 훌륭한 현대 문명국가라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11월로 예정된 이 영화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하지만, 코헨이 이 무정부주의적 유머를 통해 진정으로 엿 먹이려는 대상은 영국과 미국사회이다. 미국식 식사예절 전문가와 인터뷰를 하던 보랏은 자신과 아들이 다정하게 어깨를 걸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어서 아들이 아랫도리를 휑하니 내놓은 채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흐뭇하던 전문가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아들의 성기에 초점을 맞춘 사진을 보여주며 “이놈이 다 자랐나 봐요. 벌써 17cm가 넘어요”라고 말하자 상대방은 기겁한다. 남부지방의 로데오 경기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더욱 적나라하다. 관객 앞에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다. 부시가 이라크의 모든 남성과 여성의 피를 들이켜 마시길 바란다”고 비아냥거리던 그는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가사를 “카자흐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등으로 바꿔 부르다가 엄청난 야유를 받는다.
결국, 보랏은 이 무지막지한 ‘교란행위’를 통해 예절이나 도덕이라는 허울 좋은 장막에 가려져 있던 미국사회의 편견과 야만성을 드러낸다. <보랏…>이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한 영화라고 주장하기야 어렵겠지만, 문명이라 불리는 우리의 시스템을 반성케 하는 건 틀림없다. “인종주의가 편협성 뿐 아니라 멍청한 동의를 먹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코미디에 인종주의자를 등장시킨다는 사샤 바론 코헨의 이야기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