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깃: 김대승 감독의 세 번째 영화 <가을로>
취재기간: 8월22일~10월5일
현장: 김상범 편집실, 인사이트 비주얼, 웨이브랩 스튜디오
취재 중에 만난 사람: 김대승 감독, 김상범 편집기사, 강종익 인사이트 비주얼 대표, 이태규 녹음기사, 조영욱 음악감독, 배우 김지수·엄지원·유지태 등
프롤로그
<번지점프를 하다>를 데뷔작으로 내놓은 김대승 감독과 처음 인터뷰를 했을 때다. 임권택 감독의 오랜 조감독 시절을 회상하며 임 감독에게 자기 작품이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무척 조심스러워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혈의 누>를 거쳐 세 번째 작품 <가을로>의 후반작업을 시작한 김대승 감독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임권택 감독은…”으로 시작되는 말을 자주 듣게 됐다. 이번에 기억나는 건 두 가지다. 첫 번째. “<태백산맥> 때 임 감독님이 안성기 선배한테 나라를 잃은 자의 슬픔이기도 하고, 그게 또 우습기도 하고 하며 연기 주문을 하는데 듣는 나도 기가 막힌 거다. 연출부까지 밖으로 다 내보내고 찍는데 안성기 선배가 결국 그걸 해내더라. 내가 감독하면 그런 주문을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김지수에게 하게 됐다.” 그런 주문을 김지수에게만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찍은 난감한 장면을 후반작업 중에 보게 됐다. 그리고 두 번째. “갯벌에서 촬영 중이었는데 갑자기 임 감독님이 김치를 구해오라는 거다. 그래서 연출부끼리 뒷담화를 막 했다. 갯벌 한가운데서 김치를 어떻게 구해오라는 거야 하며. 귀도 밝으셔서 이걸 듣고 막 야단치는 거라. 영화라는 게 관객과 만날 때까지 뭐가 최선인지 찾는 작업인데, 너희가 그런 소리하면 되냐고. 그게 맞는 것 같다. 관객과 만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찾아보고 그래서 찾으면 빈틈을 메우고. 고통스러운 건 감독으로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작업의 스탭이 중요하다.”
후반작업은 일종의 마감재 공사다. 설계도면 만들고(시나리오), 기둥을 올리고 시멘트 다 부어 건물 모양을 온전히 갖췄다면(촬영) 마감재 공사로 피와 살을 불어넣어야 한다. 마감재 공사 현장이 재밌을까, 약간 의구심을 갖고 달려들었지만 뭐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관객과 만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를 끊임없이 찾는 순간들도 그랬지만 연이어 이어지는 돌발 상황이 <가을로>의 마감재 공사를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D-51일/ 8월22일 오후 2시 김상범 편집실
최종 편집이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이면 끝난다. 편집은 <가을로>의 제작과정을 통틀어 상대적으로 가장 홀가분한 수순일 것이다. 창작자의 희망과 제작·투자자의 산술계산 사이에 놓인 거리감이 촬영 기간을 길게길게 늘어뜨렸는데, 그 사이 편집은 틈틈이 제 할 일을 마쳐놓은 터였다. 좀더 정교한 세공의 마무리가 남았을 뿐이다. 편집실 중앙에 놓여 있는 엑스캔버스 화면에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의 미스터리 같은 여행이 아름답게 교차해나간다. 어제는 이 화면에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떠다녔을 것이다. 정작 김상범 편집기사와 김대승 감독은 엑스캔버스의 큰 화면을 외면하고 그 옆 17인치 작은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 두런두런, 소곤소곤…. 넓지 않은 공간이건만 그들의 대화가 들릴 듯 말 듯 이어진다. 바쁘게 움직이는 건 김상범 편집기사의 손이다. 빨리감기와 되감기, 슬로를 반복하며 한 프레임씩 한 프레임씩 뺐다가 넣었다가. 세진(엄지원)이 용돈을 보채는 동생과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집을 나서는 장면이다.
“어딜 봐도 꽉 막힌 갑갑한 상황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여기서 컷이 좀더 빨리 바뀌면 그 느낌을 주면서 속도감이 있을 것 같은데요. 계란 세례를 받는 현우(유지태)의 힘든 상황과 중첩되는 속도도 맞추면서요.”
“관객이 익숙해져 있는 방식과는 조금 다를 텐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김상범 기사의 손이 더욱 빨라진다. “… 그렇죠. 이게 더 좋지 않겠어요?”
김대승 감독의 주문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었다. 편집의 큰 줄기가 이미 끝난 터라 그랬겠지만 몇 프레임 더 끊어내는 효과에 온통 집중돼 있었다.
“일출 볼 때, 세진이 현우를 보고 놀라는 느낌이 좀더 갔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세진을 보고 정면으로 (얼굴) 돌리기 전에 컷 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고개 돌리면서 약간 생각하는 느낌 주고…. 이렇게?”
세진은 수수께끼 같은 여자다. 현우가 민주(김지수)의 유품이 된 다이어리 속 여행을 시작한 뒤 여행지 곳곳에서 마주치는 인물이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사라진 민주와 이 때문에 웃음을 잃고 투박한 검사가 된 현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세진은 가을로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숨바꼭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는 한다. 그 미스터리가 온전히 풀리는 건 유지태와 엄지원이 함께 찾은 아름다운 사찰에서다. 엄지원이 울면서 삼풍이 무너진 직후 매몰 현장에서의 기억을 들려준다. 붕괴 순간의 긴박한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삽입될 수밖에 없다.
“붕괴장면의 중간에서 유지태 클로즈업으로 바로 넘어가는 게 어떤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엄지원의 클로즈업은 이것밖에 없나?”(김상범 기사)
스크립터가 바삐 기록을 뒤진다. “86신의 세 번째 테이크가 있을 거예요.”
김상범 기사가 컴퓨터에서 그 장면을 찾아 꺼내와 재편집하는 사이 감독이 독백처럼 한마디 거든다.
“결국은 감정의 문제인데, 세진과 현우의 대화에서 누구의 정면에 더 시선을 주느냐….”
결국 답을 만들어내는 건 김상범 기사다. 그의 의견은 감독만큼 자주 건네졌다. 김지수가 섬의 사라지는 모래사막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사진 찍는 장면이었다.
“바닷소리가 나다가 사라지는 프리즈보다(흘러가는 화면을 순간 정지하면서 찰깍 효과음을 넣는 게 대표적인 방법이다) CG로 다르게 강조하는 방식이 이후 민주에게 가는 집중력이 더 높을 거 같아. 앞장면 때문에 세진의 시야인 줄 오해할 수도 있고.”
김대승 감독이 조감독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여기도 CG팀하고 상의해줘.”
사실, 이날 편집실로 오기 전까지 <가을로>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불길한 것들뿐이었다. 지난 2월 <로망스> 표지촬영 때 만났던 김지수는 <가을로>에 대해 묻자 “매몰장면 같은 정말 힘든 것만 남았는데 그걸 언제 촬영할지 오리무중이에요. 이러다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하고 개봉이 겹치면 어쩌나 몰라” 했던 걱정을 시작으로, 제작비 압박으로 촬영이 여의치 않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충무로에 공공연히 떠돌았다.
하지만 편집실에서 처음 만난 <가을로>는 여행 충동을 강하게 일으키는 매혹적인 것이었다. 봄, 가을, 겨울의 세 계절과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의 세 인물이 현란하면서도 정교한 로드무비를 그려갔다. 소쇄원, 동강, 불영사, 동해안 7번 국도 등 이미 가보았던 그곳들이 다시 한번 와보라고 강하게 유혹했다. 비극적으로 사라진 연인 위로 새로운 희망을 빚어내는 사랑이 슬며시 얹혀지는 이야기도 새로운 로맨스로 다가왔다. 편집실에서 제대로 보지 못한 건 삼풍백화점 붕괴장면 정도다. 그것만 잘 붙으면 흉흉한 소문의 대가가 짜릿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에 호흡을 불어넣은 김상범 기사에게 동의를 구하는 투의 질문을 던졌더랬다. 작품 잘 나오지 않았나요? 그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진다. “그런데 아쉬워, 아쉬워요. 붕괴장면이 CG로 어떻게 보완될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선 많이 아쉽네. 예컨대 김지수가 백화점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풀숏으로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로선 아쉬운 게 많아요. 백화점 장면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감정의 효과가 서너배는 달라질 거예요.”(아~, 김상범 기사님. 기자에게 장점 대신 약점을 이렇게 경계없이 털어내시면, 제가 쓰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가을로>의 개봉일자는 이날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무렵이라는 게 지금의 윤곽인데 김대승 감독은 그때까지 CG 등 모든 작업을 끝낼 수 있을지 몹시 걱정스러워했다.
director's flashback “김상범 기사님이 좋은 건 안 휘둘린다는 거다. 감정에도 안 휘둘리고 영화를 무조건 좇아가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보면 굉장히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의견을 많이 구하는 편이다. 촬영 중에도 전화해서 이거 이렇게 찍었는데 뭐 더 필요한 거 없을까요 하면 김 감독 거기서 이런 거 더 찍어와보지 하면 예비로 좀더 찍어오고. 또 촬영 중에도 순서편집하다가 전화해서 여기 좀 모자라지 않을까 하면 제 의도는 이렇습니다 하면 아 그래 하고 끊기도 하고, 아니면 아 그래요 하고 그거 이렇게 한번 더 찍어볼게요 하는 경우도 있고. 후반작업 스탭이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상의하면서 해왔기 때문에 편집합시다 하고 앉아서는 크게 부딪칠 일이 없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편집의 사례도 많다. 예를 들어, 아까 현우와 세진이 절에서 사연을 털어놓은 장면 뒤에 헤어져서 각자 여행하는 게 원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편집하다가 김 감독, 요런 건 어때 하고 슬쩍 보여주더라. 헤어지는 장면을 빼버린 건데 그렇게 붙여놓고 보니까 같이 여행하는 것 같은 거다. 다 털어놓은 뒤 여행하면서 헤어졌다 만나고 하는 건데 죽 같이 다니는 것처럼 해보니까 시간적으로도 절약되고 정보전달도 빠르고, 감정도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촬영할 때의 의도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나는 지금 이것이 더 맘에 든다. 이런 게 편집이다. 훨씬 슬림해지고 쓸데없는 곳에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리듬감도 생기고.”(김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