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왜 내 메시지 무시해!”
아침나절부터 TV드라마를 찍다 틈을 내 스튜디오로 달려온 이요원에게 옥지영이 골목대장 같은 쩌렁한 목소리로 스파이크를 날린다. 흠, 요원은 지영의 메시지를 받지 못한 걸까. <아프리카>의 지방 촬영과 TV시리즈를 왕복하는 최근의 과로 탓인지 엷은 병색마저 감도는 이요원은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마른 몸을 하늘거리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리고 두 동갑내기는 설익은 주먹을 교환하는 사춘기 남자아이들처럼 터프한 대화를 툭툭 주고받는다.
“안녕, 안녕.” <고양이를 부탁해>의 맏언니 배두나가 검정 부츠를 신고 장난감 병정의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입장한 것은 30분 뒤. 스튜디오는 순식간에 노랑, 파랑, 딸기 무늬 손가방과 샌드위치 더미, “A-Yo”하며 휴대폰 받는 음성으로 와글와글해졌다. 인천과 서울 곳곳을 수놓듯 누빈 <고양이를 부탁해>를 찍는 동안은 땅콩 강정처럼 고소하게 달라붙어 지낸 세 사람이지만, 일단 촬영이 끝나자 학교를 졸업한 영화 속의 태희, 혜주, 지영이 그랬듯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오늘의 만남도 후시녹음이 있던 날 이후 한달 만의 랑데부. 키 작은 촛불들을 늘어놓고 나른한 자세로 긴 팔다리를 포개며 뒤엉킨 세 사람은 새로 나온 뭐가 좋다거나 지금 찍는 영화에 대한 화제를 카메라 셔터소리 틈틈이 소곤거린다. 인생의 나침반을 읽어내는 데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스무살들과 달리 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고 프로페셔널이 된 조숙한 소녀들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두나, 요원, 지영은 죽고 못사는 친구라기보다, 한 사람의 근사한 청년에게 동시에 반해버린 시샘 많은 동네 소녀들처럼 보였다.
물론 세 사람이 당돌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공통의 연인은 “저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를 이구동성으로 외치게 만든 그 얄밉고도 애틋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영화배우로서 신중한 심호흡에 들어간 배두나에게도 주연급 연기자로 부쩍 키자람한 이요원에게도 스크린이라는 미지의 캣워크에서 첫 포즈를 취한 모델 출신 옥지영에게도, <고양이를 부탁해>는 장미꽃 같고 향수 같고 생일케이크 같은 영화다.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움직이라”고 결코 일러주지 않는 감독님 덕택에 세 연기자는 꽤나 마음고생을 치른 모양이지만, 대신 정재은 감독은 다시 오지 않을 스물 무렵 그들의 맑은 아름다움을 필름에 담아 봉인해 주었다. 하지만 젊음은 무궁동(無窮動)의 음악인 것을 어찌할까.
세 배우는 <고양이를 부탁해>에 대한 애착과 자부로 목소리에 힘을 주다가도, 이미 두나, 요원, 지영이 영화 속의 태희와 혜주, 지영을 이미 멀리 떠나왔음을 숨기지 않았다. ‘착한’ 여자애는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애는 세상 어디나 간다. 세 번째 배우가 인터뷰를 마치고 수업을 끝낸 여학생의 표정으로 스튜디오 문을 나섰다. 구월의 일요일이 방울소리를 내며 보드라운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