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목할 만한 영화 속 뮤지컬 명장면 [2]
2006-11-02
글 : 신민경 (자유기고가)

<흔들리는 구름> - 메마른 현실이 견딜 수 없어

감독 | 차이밍량 출연 | 이강생, 양귀매
배경 | 대만의 공중화장실

♬ 아래는 보지 말아, 뒤돌아보지도 말고. 고개를 들고 갈 길을 찾으라고. 겁 없이 갈 길만 따라가라고. 즐거움이 상으로 주어질 테니. ♬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대만, 포르노 배우인 남자는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고 갈증만 심해질 뿐이다. 이어서 눈이 얼얼할 정도로 화려한 뮤지컬 장면으로 급전환된다. 머리에는 외설스러운 남근 모자를 뒤집어쓰고, 허리에는 안쓰럽게 호스로 칭칭 감은 남자. 하나의 페니스로 상징화된 남자는, 현란한 의상을 입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인다. 여기서 차이밍량의 뮤지컬은 치유를 위한 판타지가 아니다. 잠시 동안의 도피처가 될 순 있겠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색감이 화려해질수록 주인공의 소외감은 배가되어 느껴진다. 의상은 조악하기 짝이 없고,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의 이강생은 관절염 환자마냥 궁색한 안무를 보여준다. 양귀매가 연기하는 여인은 “즐거움을 위해 애쓰고 기쁨을 함께 나누라”고 노래하지만, 메마른 현실만 확실히 일깨워줄 뿐이다.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 사랑도, 싸움도 축제처럼

감독 | 스즈키 세이준 출연 | 오다기리 조, 장쯔이
배경 | 일본식 전통 병풍 그림 앞

♬ 소다수 같은 비가 그치고 레몬빛을 띤 노을녘. 다가서는 두 사람, 가슴에 거품이 이네. 그 거품이 사라지기 전에 키스하고 싶어라. ♬

‘인간과 너구리 공주가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동화 속 흔하디 흔한 내용을 담은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내용은 심플하고 형식은 복잡하게 뒤엉킨 영화다. 1940년대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너구리 저택>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예술 장르에 속한 모든 것들이 다 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장면은 한 미모 하는 두 연인이 감미로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신. 일본식 전통 병풍 그림 앞에서 경쾌한 탭댄스를 추더니, 이내 그윽하게 분위기를 잡는다. 노장감독 스즈키 세이준은 “내 영화에 메시지는 없다. 오직 오락만 있다”고 했는데,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이야말로 오락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을 듯. 한 장면 안에서도 뮤지컬 외에 가부키+오페라+연극+엔카 등 온갖 장르들이 사이좋게 뒤섞여 있으니, 축제 같은 장면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어라 봄바람> - 아닌 밤중에 웬 베사메무쵸?

감독 | 장항준 출연 | 김승우, 김정은
배경 | 멕시코로 추정되는 어디쯤

♬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

낯간지럽고 민망할 뻔한 상황을 재치있게 소화한 뮤지컬 판타지 신. 티격태격하던 좀팽이 소설가 선국과 다방 여종업원 화정이 드디어 서로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 시점이다. 리얼리티에서 판타지로 넘어가는 방식도 꽤 자연스럽다. 화정의 생일날, 변희봉 선생이 걸쭉한 목소리로 ‘베사메무쵸’를 부르기 시작하더니, 이어 검정 숯팩을 한 화정과 장롱 속에 있던 선국이 립싱크로 따라 부른다. 그리고 뜬금없이 배경은 멕시코로 추정되는 공간으로 전환되며, 두 남녀는 어느새 멕시코 전통의상 차림으로 변신해 있다. ‘베사메무쵸’는 ‘뜨겁게 키스해주세요’란 의미인데, 이 장면은 곧 두 연인이 키스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그런데 애절한 사연이 깃든 노래가, 여기서는 왜 이렇게 웃기게 들릴까?

<어둠 속의 댄서> - 판타지는 없다, 진실만 있을 뿐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출연 | 비욕, 카트린 드뇌브
배경 | 미국 워싱턴주 작은 마을

♬ 난 모든 걸 보았어요. 어둠도 보았고, 조그만 섬광 속에 반짝이는 빛도 보았고, 내가 선택한 것도 보았고, 내게 필요한 것도 보았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더 바란다면 욕심인 거죠. ♬

가난한 체코 이민자인데다가 눈이 멀어져 가고 있는 여자 셀마. 역시 눈이 멀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위해 뼈빠지게 일을 하지만, 그녀 주위에선 비극이 떠나질 않는다. 어느 날 셀마를 사랑하는 남자, 제프는 그녀가 시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셀마에게 만리장성이나 에펠탑을 못 본 게 뭐 그리 중요할까. 그녀는 이미 모든 걸 다 봤으니 더 볼 것이 없다며,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노래한다. 잔인하게도, 영화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비추며 셀마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어둠 속의 댄서>는 뮤지컬을 심각한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찍은 영화. 유토피아적인 판타지는 없지만, 투박하고 힘있게 전달하는 뭔가가 있다.

<안녕, 프란체스카> - 내 맘대로 사랑해서 미안해

감독 | 노도철, 조희진 출연 | 심혜진, 이두일
배경 | 프란체스카의 집 앞 골목

♬ 사랑해서 미안해 X 2,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 너의 기쁨 내 기쁨이야. 간절하게 기도를 했지. 내 사랑 지켜달라고. 사랑해서 미안해. 그대 허락없이 내 마음을 주어버렸어. ♬

영화는 아니지만, <안녕, 프란체스카>의 이 뮤지컬 시퀀스를 빼놓을 순 없다. 영화 속 뮤지컬 장면들이 만만찮은 비용과 노력을 들인 반면 이 장면은 최저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본 케이스. 프란체스카와 두일이 첫 데이트를 한 날, 모텔까지 갔건만 프란체스카는 두일의 마음도 모르고 모텔 물건을 훔쳐오기 바쁘다. 아무런 진전없이 싱겁게 끝나나 싶었더니, 집 앞 골목에서 황당한 사랑고백이 펼쳐진다. 언제 준비했는지 시뻘건 도끼를 든 코러스 여인들까지 동원되고, (특수효과라 부르기도 거시기한) 조악한 불꽃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연인들의 표정은 이보다 더 무뚝뚝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뱀파이어식 사랑고백법? 구성진 트로트의 보컬은 송대관과 신지. 심플하지만 중독성이 강해 자꾸 흥얼거리게 된다.

브로드웨이 + 멜로드라마 = <퍼햅스 러브>

격정적인 음악이나 웅장한 안무 등 스케일만 보면 <퍼햅스 러브>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보인다. 실제로 제작비가 1천만달러 이상 들었고, A급 스탭들이 참여한 대형 프로젝트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진가신 감독은 전통적인 뮤지컬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 영화’ 형식이라는 절충안을 택했다. 즉 21세기 배경에서는 사실적인 방식으로, 영화 속 영화인 1930년대 상하이 배경에서는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뮤지컬로 소화한 것. 뮤지컬 신 자체는 <시카고>나 <물랑루즈> 등에 비해 평범한 편이지만, 진가신 특유의 멜로 라인이나 크리스토퍼 도일의 감각적인 촬영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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