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모든 여행은 즉흥적이다. 결국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여행을 결심하는 첫 순간은 늘 설명할 수 없는 즉흥적 기분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니까. “이제 막 여름이 끝나고 가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사이. 늦은 여름 혹은 이른 가을. 말하자면 오즈의 계절….” <씨네21> 추석 합본호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즈 야스지로의 마지막 작품인 <꽁치의 맛>의 영문 제목도 ‘An Autumn Afternoon’(가을 오후)이었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오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에 이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도쿄로 가자. 오즈의 계절, 커피와 함께 햇빛을 나누었던 그 시간을 보고 오자.
막연하게 떠난 도쿄에는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더운 날씨, 후덥지근하게 내리는 비는 흡사 여름 장마 같았다. 그러던 중 하루, 기적처럼 비가 그쳤다. 나는 주저없이 JR 야마노테선에 올랐다. 도쿄의 중심부를 순환하는 야마노테선은 <카페 뤼미에르>의 청춘들을 실어나른다. 뚜렷하게 줄거리를 요약할 길 없는 <카페 뤼미에르>의 젊은이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좇거나, 어차피 과거가 되어버릴 소리를 채집하러 다닌다. 프리랜서 작가인 요코는 재일 대만 음악가였던 장원예의 흔적을 뒤쫓고, 고서점을 운영하는 하지메는 도쿄의 전철소리를 녹음기에 담는다. 이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트랙 위에 몸을 올리고도 계속 뒤를 돌아본다. 아니, 아예 거꾸로 돌아서서 지난 순간을 줍는 데 열중한다. 젊고 풋풋하지만 동시에 과거를 향해 있는 사람들. 그러나 <카페 뤼미에르>만큼 역설적으로 현재의 도쿄를 잘 담고 있는 영화도 없다. ‘닛포리역’ 로커에서 가방을 꺼내 부모님이 사는 동네로 향하고, ‘코엔지역’의 토마루 서점에 들러 장원예의 흔적을 찾다가, ‘시부야역’에서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간다. ‘유라쿠초역’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우유를 마시면서 지도를 체크하고, 장원예가 자주 들렀다는 재즈 카페 ‘다트’를 찾기 위해 옛날 긴자 2번지를 헤맨다. 도통 사랑인지 우정인지 알 수 없는 표정만을 짓던 하지메가 졸고 있는 요코를 향해 처음으로 사랑의 미소를 지어 보이던 곳도 도쿄의 전철 안이다. 그렇게 전철역을 따라 떠도는 청춘들은 우리를 현재 도쿄의 여기저기로 안내한다.
▲ 통칭 ‘간다 고서점가’로 불리는 짐보초. 요코(히토토 요)의 공간인 ‘커피 에리카’와 하지메(아사노 다다노부)의 공간인 고서점 ‘세이신도’, 요리사 세이지(하기와라 마사토)의 공간인 덴푸라 식당 ‘이모야’까지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거닐던 동선은 실재 공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커피 에리카’의 향기를 따라
2004년 뉴욕영화제에서 <카페 뤼미에르>를 보고 극장문을 나오던 순간 달려가고 싶었던 곳이 바로 요코가 노트북을 펴고 앉아 있던 도쿄의 커피숍이었다. 따뜻한 우유를 시키고, 우연히 친구와 마주치고, 기쁘게 전화를 받던 그 고즈넉한 독일풍 목조 카페,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을 오후의 햇살을 등에 가득 받고 싶었다. 고서점가로 유명한 짐보초에 위치한 ‘커피 에리카’(COFFEE ERIKA)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짐보초 전철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카페를 멀리서 발견하고는, 2년 만에 찾아온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가슴이 뛸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문 앞에 다다랐을 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곳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쉬는 날인가? 이렇게 첫 도전부터 실패인 건가. 카페 유리창에 붙은 흰 종이 위 검은 글씨는 문이 닫힌 사정을 설명하는 듯했지만, 까막눈을 원망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무심하게 커피를 내리던 검은 나비넥타이 주인 할아버지의 서빙을 꼭 한번 받고 싶었는데 말이다.
▲ 요코와 하지메가 서점에서 조용히 오후의 햇빛을 나누던 시간, ‘커피 에리카’의 웨이터는 자전거를 타고 와 따뜻한 커피를 그들에게 배달해준다. 그렇게 영화의 또 다른 제목인 ‘가배시광’이 깃들여 있는 순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서점 ‘세이신도’의 책냄새를 느끼며
“여기 이 의자에 아사노 다다노부가 앉아 있었지요.”
카페 앞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차도를 따라 걷다보면 극중 하지메가 운영하던 고서점 ‘세이신도’에 다다를 수 있다. 서점 주인 아주머니는 난데없는 외국 손님의 등장에 처음엔 당황하더니 이내 멀리서 날아온 영화팬에게 띄엄띄엄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시구치 미수에는 1935년에 문을 열어 벌써 71년이나 된 이 서점을 아버지의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나랑 동갑이어서 친구처럼 느껴졌어요. 매우 선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일본말을 전혀 못했어요. (웃음) 오직 하는 얘기는 ‘다이조부, 다이조부’(괜찮습니다)뿐이었다니까요.” 하나둘씩 몇년 전 기억을 떠올리던 하시구치는 주인공 히토토 요가 인터뷰를 했던 <도쿄인> 같은 잡지들을 꺼내 보이며 흐뭇하게 미소짓다가 영화 속에 등장한 하얀 강아지가 바로 자신이 키우는 개 ‘무똥’이라고 자랑한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하지메는 요코가 대만에서 사다준 멋진 시계 선물을 받아들고 쑥스럽게 옆에 있던 하얀 개에게 보여준다. 그때 뭔가 구경하듯 쳐다보던 똘똘한 강아지가 시바견 ‘무똥’이다.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어서 “어디에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오늘은 “서점이 아니라 집을 지키고 있어요”라며 웃는다.
그러다 문득, 혹시 그 카페에 내일이라도 가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커피 에리카는 오늘 휴일인가 보죠? 문을 닫았던데…”라고 물었다. 순간 하시구치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그리고 커피 에리카의 ‘마스타’가 내가 도착하기 5일 전인 9월27일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안타깝게 전했다. “영화에서처럼 늘 멋지게 나비넥타이를 매고 일을 했었죠. 웨이터가 서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커피배달을 해주곤 했는데 이제는 그 커피 맛도 못 보겠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안타까워해보긴 처음이다.
▲ 아버지의 대를 이어 71년 된 ‘세이신도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딸 하시구치 미수에. 영화 속 하지메(아사노 다다노부)도 대를 이어 고서점을 운영하는 젊은이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