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가 탄생하기까지 [2]
2006-11-10
글 : 오정연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한 시간짜리 테이프 500개, 녹취와 분류에만 1년

더디나마 변화는 있었다. 별도의 자격 시험을 거치면 이들도 일반 사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공립대 역시 총장의 재량에 따라 가능하다. 예전엔 불가능했던 일본의 각종 선수권대회에도 공식참가가 가능해졌다. 이 학교 역기부가 처음 전국대회 진출했을 때 우리 학생이 세운 전국 신기록은 공인기록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당연한 걸 좋아졌다 말하려니 역시나 민망하다. 여전히 전국대회에 참가하더라도 다른 일본학교와 달리 숙박, 교통비는 지원받지 못한다. 외국인의 공립대 입학을 금지하는 법률에 대해 외국인학교가 항의했을 때 일본 정부는 미국 및 유럽계 학교에 대해서만 이를 허용했고, 이후 중국 및 대만계까지 입학을 허락할 때까지 전체 외국인학교의 60%에 달하는 조선학교는 여전히 노골적인 배제의 대상이었다고 김명준 감독은 말한다. 미움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김명준 감독의 카메라가 담은 아이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모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그들은 카메라가 아닌, ‘명준 형님’에게 말을 건넨다. 카메라가 있는 교실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는 학생에게 담임선생님은 일본 노래를 불러서 되겠냐고 묻고, 아이는 “자연 태를 찍고 싶습니다, 명준 형님은”이라고 말한다. “(카메라를) 의식 안 하는 쪽이 좋습니까?”라고 묻기도 한다. <우리 학교> 속 아이들이 그처럼 예쁜 것은 김명준 감독이 촬영감독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말 그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학년 초 담임 발표 시간에 선생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환호하고 비명을 지르는 그들의 얼굴, 유성매직으로 얼굴에 낙서를 한 뒤 지워지지 않는다는 아이의 울상에 미소짓는다. 운동회 대깃발의 이름을 ‘비빔밥’으로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겠냐는 진지한 토론이나 수업시간에 깜빡깜빡 졸다가 자리를 바꾸자는 말에 벌떡 일어나는 아이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합창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선생님들의 묘한 신경전, 아이가 생겼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대한 아이들의 요란한 반응 등은 그저 친근하고 귀엽다.

“지나온 길 되짚어가면 힘겨운 눈물도 흐르지만/ 그대로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눈물 젖은 추억들./ 잊지 말자 너와 내가 맺은 약속을 통일되는 날까지./ 승리의 노래 함께 부를 사랑의 길에 우리 다시 만나리.”-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이 부르는 노래

김명준 감독은 <우리 학교>라는 지금의 제목을 촬영을 종료하기 3, 4달쯤 전에 정했다. “동포들은 조선학교를 우리 학교라고 불러요. ‘나고야 우리 학교는 재정이 어떻습니까’라는 식으로 말을 건네면 뭔가 다르다는 걸 인정해주죠. 남한의 우리도 남의 학교, 북의 학교, 재일동포의 학교가 아니라, 우리 학교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체의 단락 구분없이 진행되는 영화는 아이들이나 선생님의 인터뷰 도중 그 말에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지는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까이서 찍어놓은 화면이 풍부하지 않으면, 혹은 인터뷰이가 진심만을 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레이션과 인터뷰, 생활 속 자연스러운 장면으로만 가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예쁜 애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고 수상하는 동안, 감독과의 대화에서 관객은 영화의 형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극중 인물의 안부를 묻는 일이 더 많았다. 김명준 감독은 그것은 좋은 현상이라며 기뻐한다.

‘우리 학교’ 친구들은 ‘나의 아이들’이 되었다

적어도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그곳은 ‘우리 학교’가 되었고, 김명준 감독은 결국 자신과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이 옳은 선택을 해왔음을 영화로 증명했다. 그것은 또한 그가 4년 동안 잊고 살았던 촬영감독의 꿈을 기억해내야 할 시간이 왔음을 의미한다. 실은 “영화현장의 조명이 그리워서 상사병이 날 정도”였다는 그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9학번이다. 대학 시절과 학생회장 선배였던 이문식, 인문대 학생회장 선배 김광수 청년필름 대표 등과 자취하며 “4년 동안 데모만” 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고 싶었던 미대를 “굶어죽을까봐 포기”하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면서 “영화를 하면 굶어죽지 않겠다”는 생각에 재수 끝에 들어온 학교였지만 별수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옥살이도 했고, 군대에 다녀온 뒤에는 턱없이 부족한 학점, 그만큼 모자라는 학비로 졸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복학한 그는 5년 후배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영화를 배웠다. 연출할 돈은 없었지만 영화가 하고 싶어서, 뷰파인더 속 은밀한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촬영전공을 지망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C카메라로 일하는 동안 김우형 촬영감독에게 촬영의 자세를 배우면서 확신도 얻었다.

기꺼이 만들었던 4년간의 공백이지만, 이제 다시 육중한 필름카메라 옆에 서려니 설렘과 함께 두려움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꽃섬>을 촬영한 직후 곧잘 찾아주던 사람들 중 누가 다시 나를 찾아줄까” 싶은 불안감도 있다. 그러나 존경하는 촬영감독으로 “특별한 현상이나 테크닉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다른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세계에 맞춤한 영화를 찍는” 존 톨(<씬 레드 라인> 등)을 꼽는 그는 다큐멘터리 연출 경험이 촬영감독의 또 다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이 영화를 통해 연출의 마음을 알게 됐죠. 내가 왜 그때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 감독이 행복하게 영화를 찍었을 텐데.” 이제는 숙명이 되어버린 조선학교와 재일동포들을 틈틈이 다큐멘터리에 담아야겠지만, 단편과 장편, 디지털과 필름을 가리지 않고 천천히 다가서다보면, 또 다른 우연이 그를 촬영으로 이끌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믿고 있다.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우리는 학교로 가요./통학길이 멀다고 어머니는 걱정하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요. 우리는 조선사람/ 우리의 학교가 기다립니다/(중략) 학교로 가는 이 길은 그 어디에 잇닿아 있을까.” -노래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중

설레는 마음으로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이하던 일본의 우익 시위대들은 여전할까. 미사일 사태 때도 상황이 험악하여 교대로 선생님들이 기숙사 불침번을 서야 했다는데 요즘처럼 수상한 시절에 아이들은 괜찮을까. 선생님이 되어 학교를 지키고 싶다던 아이의 꿈은 여전할까. 편집을 마무리할 무렵 첫돌이 지났다는 고급부 3학년 담임선생님의 딸은 우리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엔딩 크레딧에 오른 전교생의 이름을 바라보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가족처럼 느껴져 온갖 질문이 꼬리를 문다. “어서 빨리 우리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 선생님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김명준 감독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그대로 우리의 바람이 된다.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로 가능한, 어쩌면 최고의 마법. 김명준 감독이 오로지 카메라로 선보일 진심어린 화면, 그리고 그만이 담을 수 있는 우리 학교 사람들의 후일담이 벌써부터 그립다.

김명준 감독이 꼽은 영화 속 인물들

우리 학교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리호미 선생님
“괜찮아. 하루아침 사이에 몽땅 되지 않아요.”

학생과의 의사소통 문제로 상담해온 앳된 여교원에게 교원 30년차 리호미 선생님이 설명한다. 선생님들의 선생님, ‘어머니 교원’으로,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한글능력검정 1급 시험 준비에 골몰한 모습 등이 영화에 담겼다. 지난 2005년 5월, 남쪽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그러나 소원하던 한글능력검정 1급 자격을 딴 직후 암으로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병실에서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영화에 넣었다가, ‘자신의 마지막이 저렇게 기억되길 원치 않으실 것’이라는 스탭의 만류로 학생들에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넣었어요. 투병으로 많이 변한 모습이 훨씬 극적이겠지만, 영화를 보신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그러시더라고요. 그 장면을 넣었다면 아이들에게는 보여주지 못했을 거라고. 참 다행이에요.” 감독의 말이다.

신경화 선생님
“영화제작도 이제 마감단계겠지만,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진척되기를 바랍니다. 부디부디 몸 건강에는 조심해서 귀한 몸 잃지만 마세요.”

영화의 마지막, 김명준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되는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 속정 깊은 그 모습은 참교육자의 그것이다. 리호미 선생님과 함께 홋카이도 우리 학교 유일의 한글능력검정 1급 자격자. 부엌을 정리하거나, 남들이 단체사진 찍을 때 밖으로 떨어져 나와 줄을 잘 섰나 체크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는 모습이 계속해서 보여지지만, 한번 본 관객은 존재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그러나 영화의 프롤로그, 폭설로 등교를 금한다는 전화를 돌리는 모습이 나오는 등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분이다. 섭섭한 걸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 탓에 종종 술먹고 김명준 감독의 기숙사 방에 쳐들어오셨지만, 정작 힘든 일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돌아가신다고. 영화 속에서는 교무부장이었지만, 현재는 교장선생님이시다.

오려실 학생
“많이 먹고 자는 것은 행복이 아니죠.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행복이 아니죠. 그런데 인민들은, 정말의 행복을 알고 있죠.”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고급부 1학년으로 편입하여, 처음엔 자신이 조선 사람인 것이 싫었다는 려실이가 고국 방문 뒤 상기된 표정으로 북에서 만난 동포를 향한 애정을 고백한다. 인터뷰에서는 항상 야무진 대답을 하는 까닭에 “관객은 려실이를 똑 부러지는 아이로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이 곱고 말도 없는 애”라고 김명준 감독은 설명한다. 같은 반의 정신지체 학우를 돌보며 지내다가 보육교사의 꿈을 키우게 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너무 좋은, 따뜻하고 예쁜 아이”다. 현재 조선대학교 교육학부에서 보육을 전공 중이다. 만일 <우리 학교>의 후속편을 만든다면 계속해서 지켜보고픈 주인공이라고.

후지시로 류스케 선생님
“내가 여기에서 지도한다면 일본말이면 역시 안 되지 않겠습니까. (중략) 우리 학교 와서 제일 변한 것이 타인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것이 아주 행복한 일이구나.”

전국에 있는 일본 조선학교 유일의 일본인 교원. 도쿄 축구명문 고등학교 졸업 뒤 축구지도자 학교에서 만난 재일조선인을 통해 우리 학교를 알게 됐고, 축구코치를 맡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급기야 정식 체육교사로 부임하게 된 것. 김명준 감독이 학교 교무실에 자리를 배정(!)받았을 때 마침 옆자리에 있었던 관계로 서로 한국어와 일본어를 가르쳐주며 친해졌다. 두 남자가 일본과 한국의 동화책을 펼쳐놓고 각자의 말을 공부하는 모습은 교무실의 흐뭇한 광경 중 하나였다고. 노래방 애창곡은 <독도는 우리 땅>,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둔 자식을 우리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어하는 것을 “그래도 그건 좀 이상하지 않겠냐”는 교장선생님의 만류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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