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작가 로렌 와이즈버거는 소설을 쓰기 전에 미국판 <보그>의 편집자인 안나 윈투어의 비서였다. 그래놨으니 패션 잡지 <런웨이>의 사디스틱한 편집자 미란다 프리슬리의 비서로 들어간 풋내기 주인공의 이야기인 소설이 자서전적이라는 소문이 도는 건 당연한 일. 와이즈버거는 프리슬리가 윈투어의 모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지만 그건 그 사람이 책에 퍼부은 증오의 외침이 너무 강해, 캐리커처가 어쩔 수 없이 원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 책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일까? 비서들에게 잘 대해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사악한 괴물로 묘사한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할리우드에서 그 책을 영화로 만들 테니까.
흠,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게 와이즈버거의 원래 의도였다고 해도.
결과를 보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 만들어져서 안나 윈투어가 손해 본 건 하나도 없다. 이 소설로 윈투어의 이미지가 망가졌느냐? 천만의 말씀. 와이즈버거가 소설을 쓰기 전에도 윈투어의 괴팍한 성격은 유명했고 그 동네는 착하다고 상주는 곳이 아니다. 책 때문에 윈투어의 맘이 상했나?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에고가 더 부풀었다면 모를까. 책 때문에 더 유명해졌고 자기 잡지만큼이나 번지르르하고 호사스러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이 자길 모델로 한 캐릭터를 그처럼 흥미진진하고 시크한 인물로 연기했는데,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영화를 보면 오히려 로렌 와이즈버거의 ‘패배’가 좀더 분명히 눈에 들어온다. <섹스 & 시티> 출신의 데이비드 프랭클이 감독한 이 영화는 원작보다 부드럽고 사치스럽고 관대하고 타협적이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지적은 감점요인이 되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예외다. 영화 버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앞에서 지적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소설보다 낫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인공 앤드리아 삭스가 훨씬 성숙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영화의 앤드리아는 소설의 앤드리아보다는 덜 징징거리고 더 노력하고 더 이해심이 깊고 더 관대하며 더 성실하다. 한마디로 사람이 더 됐다. 영화 속의 패션 세계와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더 관대하게 그려진 것도 기본적으로는 영화의 앤드리아가 그 세계를 이해하고 그와 소통하려하고 두 가지가 모두 완전히 성공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세계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앤드리아는 어떤가?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게 없는 주제에 화만 머리끝까지 나서 “엿 먹어라, 미란다 프리슬리! 엿 먹어라, 패션 세계!”를 외치며 뛰어나온 게 전부다. 그러고 나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근사한 제목을 떠올리고 거기에 맞추어 회고록을 썼겠지. 그 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성급하게 쓴 책에서 남을 만한 건 자기가 그렇게 저주했던 미란다 프리슬리의 캐릭터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다.
영화를 보다보면 앤드리아의 기본 입장에 동의하기가 소설보다 훨씬 어렵다. 예를 들어 앤드리아가 자기 눈에는 비슷해 보이는 두 벨트를 보고 열을 올리는 잡지사 사람들을 보고 킥킥 웃는 장면을 보자. 그 뒤에 이어지는 차분하지만 무시무시한 미란다 프리슬리의 답변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관객은 앤드리아가 그냥 무례한 속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앤드리아가 패션 세계의 얄팍함과 공허함을 놀려대고 싶어해도, 그 세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밥벌이 도구를 제공해주고 그를 위해 번뜩이는 창의성과 피땀어린 노력을 퍼부어야 하는 생산적인 시스템이다. 보스의 괴팍함을 놀려대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사람에겐 시스템 전체를 번지르르한 바보라고 비웃을 자격은 처음부터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영화 속의 앤드리아가 <런웨이>와 패션 세계에 빠지고 그 사람들과 좀더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타락하거나 타협하는 게 아니라 그냥 깨달음을 얻고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일급 패션 잡지 편집자의 비서가 되려면 드마르슐리에의 세례명이 파트릭이라는 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세계에 어울리는 패션 센스를 기르는 것 역시 일의 일부인 것이다.
그 사실을 와이즈버거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영화는 새로운 각색을 통해 노골적으로 원작자를 배반한다. 새로 쓰여진 클라이맥스에서 영화 속의 앤드리아가 배운 건 “엿 먹어라, 미란다 프리슬리! 엿 먹어라 패션 세계!”가 아니라 그냥 자신이 패션계의 마키아벨리적인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란다를 비난하는 대신 자신에게 맞지 않는 그 세계에서 떨어져나와 자기와 좀더 어울리는 새 직장을 찾는다. 작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일반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권다툼과 배반과 권력 암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그 순진무구함이겠지만. 하긴 어쩌겠는가. 다들 그런 식으로 배우며 살아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