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의한, 게임팬들을 위한 영화
크리스토프 강스가 <사일런트 힐>의 영화화를 꿈꾸었던 것은 지난 2001년이었다. 프랑스에서 <늑대의 후예들>을 만들던 강스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순간 영화화 판권을 구매해야만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오랫동안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진정으로 독창적인 이야기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사일런트 힐>을 플레이했을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스크린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회사 고나미로부터 판권을 구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스는 수많은 전화와 편지와 이메일을 고나미에 보냈지만 단 한번도 답신을 받을 수 없었다. 곧 두 번째 게임이 발매되었고, 전편보다 향상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게임은 다른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시작했다. 파라마운트, 미라맥스, 샘 레이미가 판권을 얻기 위해 달렸고, 톰 크루즈 역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고나미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강스를 구원한 것은 <크라잉 프리맨>을 감독하면서 일본인들과 일해본 경험이었다. “일본인들에게 존중과 예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나는 누가 판권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판권을 요구하느냐가 문제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내가 얼마나 영화화를 원하는지를 37분짜리 비디오로 찍고 일본어 자막을 붙여서 보냈다.” 그로부터 딱 2달 뒤, 판권은 강스의 손에 들어갔다.
판권을 손에 넣은 크리스토프 강스와 로저 에버리, 그리고 제작자인 새뮤얼 하디다는 게임을 각색하는 것이 책을 각색하는 것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출발했다. “책을 각색할 때 당신은 책을 읽는 동안 지닌 감정을 토대로 이야기를 새롭게 쓴다.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당신은 버추얼 월드에서 가졌던 당신의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든다.” 세명은 각자가 지닌 게임의 기억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며 하나의 집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려 했다. 강스는 게임을 각색하기 위해서는, 게임의 설정 자체가 아니라 각각의 게이머들이 저마다 가진 버전들을 탐구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게임은 무엇보다도 인터랙티브하고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을 따라하는 것만으로 정상적인 극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일까. <사일런트 힐>은 놀라울 정도로 게임과 닮았다. <레지던트 이블> 같은 영화들이 게임을 완벽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각색한 것과는 달리 <사일런트 힐>은 게임의 전개 과정과 비주얼을 빠짐없이 따른다. 그래서 <사일런트 힐>은 사려깊은 게임광이 스크린에 펼쳐놓은 원작의 오마주처럼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다. 괴물이 다가오면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음. 손전등과 라이터에 의지해서 앞을 보아야 하는 상황들, (게임에서는 기술적인 한계를 가리기 위해 설정했던) 짙은 안개, 게다가 로즈가 처음으로 괴물과 마주하는 장면은 카메라의 움직임마저 게임을 그대로 복사해낸 듯하다. 심지어 “게임의 시선으로 보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강스는 사일런트 힐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는 게임의 시선을 따라하기 위해 수많은 장면을 거대한 크레인을 이용해서 찍어냈다.
확실히 <사일런트 힐>은 관객뿐만 아니라 게임팬들을 위한 영화다. 각본가 로저 에버리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게임으로부터 영화가 될 만한 요소들을 재빨리 뜯어내고 싶어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둠>은 실망스러웠다”고 말한다. “어드벤처 게임 <둠>에서 게이머가 행성에 도달하는 순간, 검은 하늘과 괴물이 소리를 지르며 당신을 향해 달려온다. 그것이 바로 <둠>이다. 복도에서 좀비를 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에서의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문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게이머가 게임으로부터 얻는 것이 그저 속도감과 음향효과라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화되는 순간 게임의 진수는 모조리 삭제되어버린다.” 크리스토프 강스에 따르면 좋은 게임은 게이머의 손가락 속도가 아니라 지성과 상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게임 <사일런트 힐>에서 당신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스스로 상상을 해야만 한다. 게임은 계속해서 당신의 상상력과 플레이를 하려고 든다.” 물론, 그것은 좋은 영화가 지닌 장점과도 똑같은 것이다.
게임을 감상하라, 영화를 플레이하라
사실 비디오게임 원작 영화는 할리우드가 가장 최근에 발견한 장르다. 몇몇 일본산 게임들이 수억달러를 쓸어담은 90년대에 들어와서야 게임 원작 영화의 발전은 시작됐다(박스1 참조). 본격적인 시작은 닌텐도의 대명사 <슈퍼마리오>가 개봉한 1993년이다. 밥 호스킨스와 존 레기자모를 이탈리아 형제로 만들어놓은 <슈퍼마리오>는 블록버스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게임을 영화와 결합시키고 싶어한 할리우드의 첫 번째 시도였다. 1995년 대전 격투 게임을 영화화한 <모탈 컴뱃>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자 할리우드는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닌텐도와 세가와 캡콤의 게임들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관객과 게임팬들을 동시에 실망시켰다. 게임 원작 영화들이 비평적, 흥행적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게임과 영화의 차이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탓이다. 할리우드는 게임이 또 하나의 톰 클랜시나 존 그리샴이라고 여겼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수천만 게이머들이 빠져든 게임의 장점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떤 게임은 도무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종종 무시됐다.
<사일런트 힐>이 지난 10여년간 할리우드가 저지른 실수를 답습하지 않은 이유는 제작진들이 게임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덤벼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일런트 힐>이라는 게임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어드벤처 게임은 게이머가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를 따르는 동시에 각각의 다른 가지를 스스로 찾아서 다른 결말에 이를 수 있는 장르다. 이를테면 게임 <사일런트 힐>은 할리우드가 한때 영화의 미래로 제시했던 인터랙티브 시네마(Interactive Cinema)의 초기 단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사일런트 힐>은 인터랙티브 시네마의 일종인 게임 그 자체를 닮아가려는 특이한 노력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그저 어깨너머로 누군가의 플레이를 따르는 수준이지만, 크리스토프 강스는 게이머들과 순수한 관객이 두 장르의 상충하는 부분을 충분히 받아들이리라 믿는다. “영화는 매우 수동적인 경험이다. 게임의 인터랙티브함은 다른 경험이다. 게이머들은 극장에서 컨트롤을 쥐는 것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강스는 덧붙인다. “그러나 나는 영화와 게임이 완벽하게 다르다고 생각지 않는다. 게임이 단지 콘솔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라 여기는 것은 바보짓이다. 게임은 그보다 훨씬 숭고한 경험이다.”
<사일런트 힐>은 <시카고 선타임스>의 로저 에버트 같은 숙련된 비평가들을 함정에 빠뜨린다. 로저 에버트는 이미 지난해 개봉한 <둠>을 두고 “게임이 영화 같은 예술이 되기란 불가능하다”는 글을 쓰는 바람에 게임팬들에게 엄청난 항의를 들은 경험이 있다. 게임계는 이미 <슈퍼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을 만든 일본의 미야모토 시게루처럼 일종의 ‘작가’들이 존재하는 장르이며, 수많은 서브 장르와 컬트 게임들이 서로 다른 성향의 팬들을 위해 매해 생산된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젊은이들의 새로운 유희다. 로저 에버트처럼 나이든 비평가들에게는 낯선 세계다. 각본가 로저 에버리의 말처럼 “게임을 플레이해본 적도 없는 늙은이들은 더이상 거기에 대해 글을 쓸 수도 없는 시대”를 열어젖힐 만큼 이상한 장르다. 하지만 로저 에버트는 여전히 “예술이 될 수 없는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영화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사일런트 힐>을 “호러영화라기보다는 실험·아트영화”라고 짤막하게 평가하며, 영화의 본격적인 분석은 극장을 나오던 중 자신과 대화를 나눈 일곱살짜리 아이의 말에 맡겨버렸다. “이건 영화를 이해하고 싶다면 플레이를 꼭 해봐야 하는 비디오게임 같은 거예요.”
하지만 <사일런트 힐>은 이미 에버트 세대의 촉각이 드리워질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게임광들이 만들어낸 ‘팬보이’(Fanboy)영화 <사일런트 힐>은 기실 영화와 게임의 경계가 무너지는 전개 과정에서 생산된 멀티미디어 공산품의 극점이다. 할리우드는 ‘어떻게 게임을 영화 문법으로 갈가리 찢어 고쳐야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대신, 영화의 문법을 닮아 있는 게임을 찾아서 충실하게 복사하는 방법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그래서 관객이 영화를 감상하는 대신 하나의 세계를 ‘플레이’했다는 기분을 느끼도록 만드는 <사일런트 힐>의 읊조림은 무슨 예언처럼 들린다. “이 지도를 봐. 그리고 외워둬. 기억력이 당신을 살릴지도 몰라.” 영화는 게임을 닮아가고, 게임은 영화를 닮아간다. 로저 에버트는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저 늦었을 뿐이다.
게임팬들이여, 스크린을 주목하라
현재 제작 중인 유명 게임 원작 영화들
2007년/ <레지던트 이블3: 익스팅션>(Resident Evil: Extinction) <왕의 이름으로: 던전 시즈 테일>(In the Name of King: Dungeon Siege Tale) <포스탈>(Postal) <피어 이펙트>(Fear Effect) <캐슬바니아>(Castlevania) <철권>(Tekken)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Alice) <스플린터 셀>(Splinter Cell) <서퍼링>(Suffering) <맥스 페인>(Max Payne)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들>(Prince of Persia: Sands of Time)
2008년/ <귀무자>(Onimusha) <레인보우 식스>(Rainbow Six) <클락타워>(Clock Tower) <콜드피어>(Cold Fear) <파 크라이>(Far Cry) <헤일로>(Halo) <메탈 기어 솔리드>(Metal Gear Solid)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유명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확실하게 선보일 영화만도 현재로서 20여편에 달한다. 가장 성공적인 게임 원작 프랜차이즈인 <레지던트 이블3: 익스팅션>은 이미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다. 감독은 <하이랜더> 시리즈 이후 기억 속에서 잊혀진 호주 감독 러셀 멀케이. MTV는 괴물 창조의 대가인 스탠 윈스턴과 손잡고 <레지던트 이블> 스타일의 호러 게임 <서퍼링>을 영화화할 계획이며,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과 <홍번구>의 당계례 감독은 거부의 딸을 괴물들에게서 구하려는 용병들의 활약을 다룬 게임 <피어 이펙트>를 영화화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2008년은 밀리터리 액션 게임팬들의 스크린 나들이 원년이 될 가능성이 짙다. 밀리터리 액션 장르의 대표작인 <레인보우 식스>는 <새벽의 저주>의 잭 스나이더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이며, 또 다른 걸작 밀리터리 액션 게임 <스플린터 셀>과 <메탈 기어 솔리드> 역시 2008년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전 게임들의 영화화 움직임도 있다. 한국에서는 <악마성 드라큘라>라는 제목으로 80년대 후반부터 잘 알려진 <캐슬바니아>는 <레지던트 이블>과 <모탈 컴뱃>의 폴 W. S. 앤더슨에 의해 스크린에 옮겨질 예정이고,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들> 역시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사일런트 힐>로 게임팬들의 환심을 얻은 크리스토퍼 강스는 최근 인터뷰에서 일본 전국시대를 무대로 사무라이와 악귀들의 결투를 다룬 3D 액션게임 <귀무자>를 블록버스터로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게임팬과 영화팬들이 동시에 기다릴 만한 프로젝트는 아마도 <헤일로>와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일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게임기 엑스박스의 첨병이었던 SF 액션게임 <헤일로>는 피터 잭슨이 영화화의 총제작지휘를 맡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팬들을 흥분상태로 몰고간 프로젝트다. 하지만 최근 유니버설과 폭스가 1억달러가 넘어서는 제작비 상승을 감당하지 못해 하차하면서 프로젝트는 잠시 허공에 떠 있는 상태. 그간 루머로만 떠돌던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의 영화화는 더이상 지체되지 않을 듯하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지옥판이라 할 만한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는 정신착란증적인 이야기와 기괴한 비주얼로 소수의 게임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온 게임. 애초에 감독으로 내정됐던 웨스 크레이븐이 물러나며 프로젝트의 향방에 먹구름이 꼈지만,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마커스 니스펠 감독이 바통을 물려받고 <미녀와 뱀파이어>의 사라 미셸 겔러가 앨리스 역으로 출연을 확정지으면서 영화화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한국의 온라인 게임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역시 블리자드와 워너브러더스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감독 우에 볼은 여전하다. 우에 볼은 지난 3년간 <하우스 오브 더 데드> <얼론 인 더 다크> <블러드 레인> 등 명작 게임의 판권을 구매해 쓰레기 필름 더미로 재창조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게임팬들의 원성을 사온 인물. 이미 우에 볼은 제이슨 스타뎀과 버트 레이놀즈 등의 배우를 데리고 롤플레잉 게임 <던전 시즈>를 바탕으로 한 <왕의 이름으로: 던전 시즈 테일>의 촬영을 끝마쳤으며, 현재는 동명 게임을 원작으로 한 <포스탈>을 촬영 중이다. 우에 볼은 “<펄프 픽션>과 <폴링 다운>이 합쳐진 작품이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밝히고 있지만 ‘우에 볼 안티사이트’(www.uwebollsucks.com, 최근 문을 닫았다)까지 운영하며 제작 중단을 촉구해온 게임팬들의 신뢰는 이미 떠난 지 오래다. 자신의 악명을 잘 알고 있는 우에 볼은 최근 들어 <파 크라이>를 마지막으로 게임에서 손을 떼겠다는 말로 게임팬들을 회유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소시지 만드는 사람이다. 소시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크리스토퍼 강스 감독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우에 볼이 소시지 만들기에 다시 뛰어들지 않으리란 보장은 결코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