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봐야 한다며 집을 나선 할머니를 찾아 삼거리극장까지 흘러든 소녀가 있다. 할머니 사진이 박힌 전단지를 돌리며 매표소에서 표도 팔던 그녀 소단이는 어느 밤 홀로 객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요란하게 차려입은 유랑극단의 혼령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쇼가 시작된다. 부천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관객을 만났고 11월24일에 개봉하는 <삼거리극장>은 쇼도 보고 노래도 듣고 무책임하게 황당한 이야기도 겪는 뮤지컬영화다. 삼거리극장 사장 우기남이 젊은 시절 만들었던 영화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 그 영화에 출연했고 지금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극장에 붙어 있는 유령 배우들, 할머니를 찾아야만 하는 소단이. <삼거리극장>은 이러한 굵은 주춧돌 몇개를 놓아두고선 춤추듯 부유하듯 그 사이를 마구 오가는 영화다.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아도 틀림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뮤지컬영화의 역사가 거의 없는 한국에서 어떻게 이 느닷없는 영화가 튀어나왔을까. 이름도 범상치 않은 전계수 감독을 만나 첫 번째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그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물어보았다.
하나 더, 몇년 동안 매만진 시나리오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묻어 있을 것이기에 <삼거리극장> 스틸 사진 어딘가에 그를 누벼넣어보았다. 유령들 사이에서 보통 사람이 있다면 그가 더 이상해 보일 터. 이상한 그 사람이 바로 전계수 감독일 것이다.
삼거리(里)에 있는 삼거리극장은 쓰러져가는 단관극장이다. 매점 아줌마만 들어가도 가득 차는 작은 매점과 그 옛날 바둑판 무늬 우레탄 바닥이 옹색한 삼거리극장은, 손바닥에서 내려놓으면 일만 군대의 막사가 된다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술 천막처럼, 밤이면 길잡이가 필요할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미궁이 되곤 한다. 조선 여인과 데이트를 하다가 맞아 죽은 일본 군인, 음유시인을 따라나선 마지막 공주님, 검은 마스카라와 드레스로 고스록의 여신처럼 차려입은 왕년의 기생, 출신도 정체도 불분명한 광대. 삼거리극장의 주인은 60년을 떠돌고 있는 이 유랑극단의 혼령들이지만, 미궁의 입구와 출구를 알고 있는 이는 그 주인이 아닌, 그 설계자뿐일 것이다. 스스로 영화가 너무 산만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무정형의 에너지를 즐기는 듯했던 <삼거리극장>의 다이달로스 전계수 감독. “단편영화 하나 찍고 돈도 떨어지고 암울하던 시기에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그룹 데빌 돌의 음악을 듣다가” 음산하고도 귀여운 <삼거리극장>을 지었다는 그는 차가운 비가 내리는 밤거리부터 소머리 괴물이 연인을 향해 걸어가는 바닷가까지 곡절 많은 판타지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곡절의 사연을 영화로 이끈 건, 여행과 무대
처음엔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와 스머프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구상했던 전계수 감독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처럼 80년대 한국사회의 폐부를 안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옮겨갔고, 다시 60년 전 일제 강점기로 도약했다. 그리하여 2002년 여름부터 2년 남짓되는 시간 동안 양공주와 봉제공장 시다와 운동권 대학생은 유랑극단의 가수와 기생과 천민 출신 유학생으로 직업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이라는 영화 속 영화와 “우기면 되지”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영화감독이자 삼거리극장 사장 우기남의 트라우마까지 끼어들었다. 여러 번 시나리오를 고치며 분주하게 시대와 사연들 사이를 뛰어다녔던 전계수 감독이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길 또한 그처럼 멀고도 산만했다.
방학이면 쪽지 한장 남기고 무전여행을 떠나곤 했던 전계수 소년은 “왠지 멋있어 보여서” 철학과에 진학했지만, 삭발을 하고 발목에 털 달린 노인용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그가 마음을 붙인 곳은, 강의실이 아니라 연극 동아리였다. “아버지가 철학과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와 다투다가 가출을 하셨다.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선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재능없는 예술혼만큼 서글픈 것이 있으랴. 전계수 감독은 연기가 잘되지 않기에 춤 동아리도 만들어봤지만, 군대에 갔다와선 극작과 연출을 겸하며 다른 방식으로 연극 동아리에 정착하는 듯했다. 그는 대학로에까지 나가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때는 IMF였고, 아버지가 객사하고 어머니가 쓰러지는 드라마 같은 상황을 맞은 전계수 청년은, 부팅도 할 줄 모르면서 외국계 컴퓨터 회사에 취직을 했다.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지만 난반사로 흩어지는 전계수 감독의 삶에서 드물게 변하지 않은 것을 찾아낸다면 아마도 여행과 무대일 것이다. 프로젝트 매니저 일이 너무 재미없어서 다시금 대학로를 기웃거리던 전계수 감독은 회사의 일본 지사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일본어도 모르는 채 요코하마로 떠났다. “IMF 직전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에 갔던 것도 여행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였다. 열심히 살고 싶어서 영어와 일어를 배웠다기보다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언어를 배워서 살아남으려고. (웃음) 그런데 일본인은 어찌나 건조한지 2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회식을 딱 네번 했다.” 그 건조한 나날에서 그를 구해준 천사는, 대학친구의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써주었던 일을 제외하면 딱히 인연이 없었던 영화였다. 그는 비디오 가게에 가서 여덟개들이 박스 하나를 일본영화 몇편과 외국영화 몇편과 혼자 사는 남자의 필수품인 AV 한편으로 채워오곤 했고, 막무가내로 보던 영화에서 차츰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또다시 떠났다. 2001년 한국으로, 회사원 전계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돌아왔다. 누구의 첫 번째 영화가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삼거리극장> 또한 이처럼 지난했던 세월을 응축하고 있는 셈이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온 <삼거리극장>의 유랑단원 중에서 완다가 잠깐 봉제공장 시다 노릇을 했던 것도 전계수 감독이 밟아온 인생 여정 어느 한 대목 때문이었다. 다섯째 이모가 운영하는 봉제공장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간 전계수 감독은 원단을 나르고 천을 재단하는 시다를 했고, 기업홍보영화를 찍었고,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실시간으로 축구기사를 번역하는 “가장 짭짤했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주변엔 언제나 유령처럼 영화가 맴돌고 있었다. 한겨레 영화학교에서 단편영화 수업을 받고 <싱글즈> 연출부를 했던 그는 미래 세계의 슬럼가에서 고철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가 등장하는 SF음악영화를 비롯해 몇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중에서 <삼거리극장>은 저예산으로 제작이 가능한데다가 1년 사이를 두고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을 두번 받아 끝까지 살아남은 시나리오가 되었다. “처음에 독립장편영화 지원금 3천만원을 받았다. 1억원을 투자받아 스탭과 계약을 하려고 했는데, 바로 전날 투자자가 가출을 했다. 그 다음해에 HD영화 지원금 3억원을 받고 안 가본 충무로 제작사가 없을 정도였다. LJ필름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회사였는데 거기서도 거절당하면 정말 3억원으로 만들자고 결심했었다.” 그처럼 아슬아슬하게 밤의 유랑극단과 홀로 객석에 앉은 관객 소단이와 시대로부터 외면받아 슬픈 영화감독 우기남이 탄생했다.
넘어졌다 일어나면 또 다른 모양새가 나오는 영화
“재미도 느꼈지만 연극보다는 상대적으로 윤택해 보이는 것도 있어” 영화를 시작한 전계수 감독은 전혀 윤택하지 않은 나날을 보내던 도중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이미 죽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매우 암울한 가사를 60분 동안이나 부르는” 데빌 돌의 음악으로 <삼거리극장>을 구상했다. 그러므로 <삼거리극장>은 그늘이 짙은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록키 호러 픽처 쇼>의 천진하고 아름다운 창조물 록키가 서글픈 운명을 타고났듯, 허술한 세트에서도 팔짝거리며 좋아하는 <에드 우드>가 가엾어 보이듯. 게다가 “난장판을 만들자”는 단일한 목표에 집중했던 <삼거리극장>의 초고는 조금이나마 응집된 서사를 갖고자 환골탈태하면서 애수마저 품게 되었다. 텅 빈 극장에서 하염없이 쇼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유랑극단 혹은 유령극단과 어찌나 한이 깊었던지 세월마저 멈추어 세운 우기남 혹은 그의 분신인 괴물 미노수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에리사가 이끄는 유랑극단은 창고 속의 골동품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명과 박수를 받아야만 빛이 나는 예인이지만, 한낮의 햇살 속에 떠도는 먼지마저도 공중에 정지해 있는 듯한 삼거리극장에선, 누구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죽어서 더이상 기억이 진행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혼령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릴 때였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노래하지 않을 때도 그 느낌을 이어가라고, 더할 나위 없이 오버하라고(웃음) 말했다. 과잉의 느낌을 원했다.” <삼거리극장>은 그처럼 과잉되어 차고 넘치는데도 엔카의 선율처럼 애잔한 느낌을 놓지 못하는 영화다. 무시무시한 노래를 불러도 잔뜩 부풀린 깃털 아래 앙상한 육체가 드러나는 듯하고, 쾌활한 노래로 소단이와 즐기면서도 가지 말라고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는 듯하다. 마구 내달리다 충돌하여 넘어졌다가 일어나면 또 다른 모양새가 나오는 영화. “대학에서 연출했던 연극도 이미지 중심이었고,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대사를 썼던” 전계수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도 이상한 세계에의 통제력을 능란하게 유지했다. 그것은 헛되이 풍성한 제작비를 꿈꾸기보다 낯선 장르의 영화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납득하고 그에 어울리는 형식을 찾아 썼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계수 감독은 인터뷰 도중 “그런데 그 예산으로는 도저히…”풍의 끝맺음을 자주 썼다. 다만 그 말은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한탄이나 변명이라기보다 차근한 설명에 가까웠다. 예를 들면 이렇다. “<시카고>는 뮤지컬로 장면을 여는 경우가 많다. 그게 정통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스펙터클이 필요하다. <삼거리극장>은 이야기하던 것을 뮤지컬로 정리하는 느낌인데, 그런 방식이 경제적이었다.” 그러나 소단은 혼령들을 오직 밤에 만나기에 꿈처럼 혼미한 기억으로 간직하므로, 뮤지컬로 하룻밤을 마무리하고 넘어가는 <삼거리극장>은 정서적으로도 어울리는 방식을 택한 것일 거다. “아직 못다한 일들이 남아 있는데 이게 꿈이라면 사라질까 두려워”라는 가사는 밤을 맞이하기보다 배웅하는 순간에 더욱 적당하다. 배우들도 비슷했다. 예산 9억원으로 캐스팅할 수 있는 스타는 거의 없다시피했으나 전계수 감독은 원래 에리사의 박준면과 히로시의 조희봉 같은 <삼거리극장>의 배우들을 좋아하여 함께 일하고 싶어했다. 무대를 장악할 줄 아는 그들은 과장된 연기와 마치 박수를 기다리며 잠시 여백을 두는 듯한 호흡을 당연한 것처럼 소화했다. 고향인 무대나 마찬가지인 삼거리극장 낡은 스크린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배우들과 좁은 공간이더라도 자유롭게 흘러다니는 카메라.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최대한 극장 안에 머무르는 <삼거리극장>은 외벽은 그대로이되 실내만 무한히 팽창하는 판타지를 창조해낸다. 겉에서 보기엔 초가삼간만도 못하지만 일단 들어서면 그 많은 남매들이 뛰어놀 수 있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위즐리 가족 천막이 떠오른다.
전계수 감독의 꿈도, 꿈을 위한 준비도 여전히 현재진행형
근검절약하고자 소단이 삼거리극장에 찾아드는 도입부를 과감히 생략한 전계수 감독이었지만 우기남의 야심작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의 대미마저 실내에 가두어둘 수는 없었다. “피맺힌 한은 육체를 얻어 우리 앞에 사지를 드러내 극장은 화염지옥으로 변하고 오직 나만이 살아남아 평생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았노라.” 우기남이 부르는 <야만의 환영>은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했기에 빛도 보지 못한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을 애도하는 동시에 이 영화를 삼거리극장에 파묻은 세상을 저주한다. 배우들을 극장에 붙잡아두고 우기남을 사장실에 유폐한 영화. 그러므로 한번만이라도 미노수는 넓고 넓은 바닷가에 나가 오직 사랑했던 한 소녀 아랫네를 오래오래 안아볼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소금물인 탓에 얼지는 않았지만 살을 베어내도록 추웠던 1월 바닷물에라도 걸어들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마저 생략의 아픔은 남아 있다. 전계수 감독은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 부분을 지금보다 훨씬 길게 썼었고 우기남과 미노수가 서로 인터뷰하는 장면도 넣었었다. 만일 전계수 감독의 소망대로 <삼거리극장>이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전계수 감독과 오랜 선후배 사이인 김동기 음악감독이 시나리오가 완성되기도 전에 작곡해둔 다른 노래들과 더불어 소단이 삼거리극장까지 짚어가는 골목길과 미노수 독점 인터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잘하지는 못하지만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필요할 것 같아” 노래까지 미리 배우고 있는 전계수 감독의 좀더 산만해진 삶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