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시간만큼 물심양면으로 진보하라
<킹콩> vs <킹콩>
위의 교훈을 보기 좋게 뒤집은 사람도 있다. 피터 잭슨이다. <킹콩>이 어찌 <혹성탈출>만큼 유명하지 않았으랴마는 그는 이 전설의 괴물을 되살려 전세계적인 흥행과 호평을 일궈냈다. 어색하게 가슴을 두드리던 옛 킹콩은 피터 잭슨의 마술 손 아래 생생한 숨결을 얻었다. 커다란 콧구멍과 멧돼지 같은 이빨, 개구리 같은 눈두덩에 초코볼 같은 눈알을 하고 있던 야수가, 영롱하고 슬픈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로 진보한 것이다. 피터 잭슨은 야성의 괴물에게 인간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는 상냥하고 영리한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를 인간마냥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비극의 ‘남자’가 되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레골라스나 아라곤을 통해 검증된 바와 같이, 피터 잭슨은 멋진 남자를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킹콩을 사랑하고 감싸고 싶은 남자로 만들어낸 것은 물론이고, 단추 3개는 기본으로 풀고 다니던 마초 항해사 잭 드레스콜 역시 섬세하지만 용감한 극작가로 재창조했다. 헤퍼 보이는 얼굴에 야릇한 표정을 짓는 것이 특기인 앤 대로우(페이 레이)와 수다만 진탕 떨었지 뒤로 갈 수록 별 몫이 없는 영화감독 칼 던햄(로버트 암스트롱)도 피터 잭슨의 새 버전에서는 생생한 매력을 얻었다.
그리고 ‘스뻭따끌!’. 촌스러운 풀잎치마를 입고 코뚜레를 한 원주민들, 생긴 건 초식인데 육식을 일삼던 (대체 뭘 뒤집어쓴 건지 모를) 공룡들이, 막 눈앞에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실적인 모습으로 변모해 넋을 빼놓았다. 게다가 그들은 <액소시스트>와 <쥬라기 공원>의 약식 리메이크이기도 했던 터. 그래서 사람들은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외쳤다. “역시 피터 잭슨!!” 아들은 아비를 그렇게 넘어섰더라.
귤이 태평양을 건너면 오렌지가 돼야지
<링>, <주온> vs <링>, <그루지>
요즘엔 리메이크 바람이 바다도 건넌다. 짧은 시차를 두고 일본 공포영화 <링>과 <그루지>가 할리우드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오래된 영화도 아닌데 굳이 새로 만들어 개봉하는 이유는 정서 차이 때문이다. ‘귀신’의 존재를 믿는 동양권에서는 머리카락 끝자락만 나와도 땀구멍을 세우지만, 귀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서양에서라면 사정이 다르다. 늘 봐오던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실체도 없고 논리적 규명도 불가능한 존재를 내세운다는 게 쉽지 않아서다. 인내심을 요하는 나카다 히데오 스타일은 더욱 그렇다. 원인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분위기로만 느릿느릿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딱 한번 터지는 식이니까.
할리우드판 <링>을 만든 고어 버번스키는, 이방의 귀신 이야기를 진실을 추적하는 스릴러적 요소를 강조해 풀어냈다. 때문에, 기본 줄거리가 거의 일치하는데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오리지널 <링> 시리즈의 감독인 나카다 히데오가 할리우드판 <링2>의 감독을 맡아 원래와는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사마라의 존재를 느낀 사슴 떼가 차를 공격하는 장면이나, 사마라의 세계와 현실 세계의 연결고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장면들(비디오 속 세계의 우물을 닫아 사마라가 현실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든가)을 보면, 나카다 히데오가 자신의 귀신 이야기를 서양식 초자연 심령물로 바꿨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모성애와 아동학대의 코드를 미국스럽게 푼 것도 재밌다. 덕분에 할리우드판 <링> 시리즈는, 이미 보았지만 식상하지 않은, 세련된 공포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할리우드판 <그루지>는 그만큼 성실하지 못했다. 귀신을 재해석하려는 노력 대신, 낡은 오리엔탈리즘에 훌쩍 올라탄다. 일본에 유학 온 서양인들이 해석 불가능한 동양 귀신의 저주에 걸려든다는 설정이다. ‘동양이란 이런 괴상한 존재가 출몰하는 무서운 곳’이라며, ‘서양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땅에 홀로 남겨진 서양인은 얼마나 처절하고 외로울지 상상해보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의 여자는 사이코 스토커며, 남자는 살인자고, 아이는 통제 불가능하다. 이들은 통째로 귀신이 되어 파란 눈 금발의 안위를 위협한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주인공이 달라지는 순간 이렇게 달리 보인다.
사랑도 국가 이미지에 맞게 하라
<시월애> vs <레이크 하우스>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된 첫 한국영화는 <시월애>. 1997년을 사는 남자와 1999년을 사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서로 다른 시기에 같은 집에 산 적 있는 두 사람은, 시간을 건너뛰는 이상한 우편함을 통해 서신을 교환하게 된다. 전지현은 (역시나) 옛 애인을 못 잊어 청승떠는 (하지만 발랄하고 예쁜) 여자 역을 맡았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남자(이정재)는 달려가 만날 수 없음을 괴로워하면서, 아직도 옛 애인을 잊지 못하는 그녀를 지켜주기로 결심한다. 여자의 순정. 그를 바라보는 남자의 순정. 한국식 멜로의 전형인 셈이다. 손 한번 못 잡고 키스 한번 못했을지라도 어쨌든 사랑하는 건 ‘분명!!’하고, 그것은 운명이다. 마지막의 결정적 사건은 어긋나기만 하던 두 사람을 이어준다. “엉엉엉엉! 죽지마세요! 제에발” 이렇게 반성하면 “짜잔! 나 살아 있어!” 요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방식에도 ‘Made in ○○○’이 있다. 이런 식의 지고지순은 미국에서 팔리지 않는다. <시월애> 리메이크판인 <레이크 하우스>는 두 주인공의 연령대를 높이고(이는 타깃이 되는 관객층의 연령과도 관계된다) 케이트(산드라 불럭)의 직업을 성우에서 레지던트로 바꿈으로써, 원작에서 풀풀 풍겨나는 ‘사회 초년생의 대학 생활 탈피기’ 같은 인상을 확 없앴다.
과년한 커리어 우먼인 케이트는 현실적 연애와 이상적 연애 사이에서 갈등한다. 현재의 알렉스(키아누 리브스)는 미래의 케이트 대신 과거의 케이트와 자주 마주치면서 로맨틱한 순간을 만든다. <시월애>에서 집 이름으로 설정된 ‘일 마레’가 미국판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설정된 것도 코믹하다. 알렉스의 아버지가(그는 원로 건축가다)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 르 코르뷔제 등과 포커 친구라는 멘트는, 미국판에서만 가능한 재미난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