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리메이크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1]
2006-11-21
글 : 김나형

마틴 스코시즈가 유위강, 맥조휘의 홍콩 누아르 <무간도>를 자기 식대로 되만들었다. 한국영화 <시월애>는 얼마 전 <레이크 하우스>라는 제목의 미국식 사랑 이야기로 변신했다. 지난해, 할리우드 리메이크 붐을 일으킨 일본 호러 장본인 <주온> 시리즈는 곧 <그루지2>로 관객을 찾는다. 할리우드는 <괴물> <장화, 홍련> <정사> 등 한국영화들의 리메이크를 계획 중이다. 명성 높은 아버지를 둔 아들의 처지와 비슷한 리메이크. 원작과 비교되며 욕먹기 십상인 험로를 굳이 가려는 이유는 뭘까? 또 그 길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근래 리메이크된 영화들을 통해 되짚어본다.

자신의 스타일로 바꾸어라

<무간도> vs <디파티드>

흥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유위강, 맥조휘의 영화를 마틴 스코시즈가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말이다. 속해 있는 공간도 스타일도 다르지만, 이들은 확고한 자기 색이 있는 감독들이다. 예술영화를 만드는 거장이 아니라, 장르영화를 만드는 스타일리스트로서.

<무간도>
<디파티드>

<무간도>는 주윤발로 대변되는 옛 홍콩 누아르를 21세기에 제대로 살려냈다. 조직에서 길러져 경찰 내 스파이로 잠입한 건명(유덕화)과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극비리에 조직에 심어진 영인(양조위). 두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숙명’이다. 세상을 통째로 속이고, 자기 자신까지 속여야 하는 무간 지옥에 산다.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배반하는 삶. 그래서 둘은 ‘고독’하고 슬픈 눈을 하고 있다. 인간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멋진 남자가 갱이나 킬러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홍콩 누아르의 주요 레퍼토리다. 그에게는 뜨끈한 ‘우정’을 나눌 멋진 남자와 순수한 ‘사랑’을 줘야 할 청초한 여자가 있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 운명을 짊어지고 멋지게 죽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 고독, 숙명, 우정, 사랑 같은 키워드가 멋있을 수 있는 건 ‘홍콩 누아르’라는 범주 안에서만이다. 그 아우라를 벗어나는 순간, 저 모든 것은 쉽게 유치찬연해진다. 때문에 홍콩 누아르를 다른 세계에서 다시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이클 만이 아닌 스코시즈가 <무간도>를 리메이크하기로 작정했다면, 그가 주목한 것은 저 이외의 것이었을 터다. 굵은 눈썹의 음숭스런(음흉한??) 노인네는 자기 속에 이미 다른 무게중심을 잡아두었던 것이다.

스코시즈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비극적이다. 그의 영화에도 걸출한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종국에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홍콩 누아르 식의 우아하고 멋진 죽음이 아니라, ‘몰락’이라 불러도 좋을 종류의 ‘파국’을 맞는다. 그들의 면모도 그리 영웅적이지 못하다. 애초에 결핍되고 나약했으나, 악으로 깡으로 딛고 일어서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에비에이터>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스코시즈는 주인공의 ‘비극적인 본성’이라는 표현을 한 적 있다. 다시 말하면, 스코시즈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비극적 숙명이 아니라 비극을 만들어내는 ‘본성’인 셈이다.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도 같은 맥락에 있다. 설정과 스토리는 거의 같지만 분위기는 판이하다. 숙명을 짊어진 멋진 남자는 사라지고, 얄궂은 삶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하는 처량한 두 남자가 있다. 건명 캐릭터에 해당하는 설리번(맷 데이먼)은 리플리(맷 데이먼)의 다른 버전을 보는 듯하다. 더 나은 것을 움켜쥐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영리하지만 이기적인 ‘찌질이’ 과다. 영인과 맞닿은 콜린(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시 폼나는 인생과 거리가 멀다. 그의 삶은 언제나 모질어서, 다만 근근이라도 살아보려는 것뿐인데 심하게 버둥거려야 한다. 영화 속의 영인처럼 고독을 멋지게 감수하기란 쉽지 않아 ‘인간 콜린’은 점점 늙고 초조하고 발작적인 얼굴이 되어간다.

세상의 선의를 덥석 믿지 않는 스코시즈는 선인보다 악인의 어깨에 무게를 싣고, 호의보다 적의로 주인공을 에워싼다. <무간도>가 힘을 실은 것은 멋지구리 경찰 간부인 황 국장(황추생)이었다. 조폭 두목 한침(증지위)은 악당이 있어야 하니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나 <디파티드>에는 그 ‘황 국장’이 없다. 대신 퀸넌과 디그냄이라는 아저씨들이 등장하는데, 퀸넌은 ‘세상이 어디 호락호락하더냐’고 체념한 중산층 꼰대 같고, 인간의 생식기와 관련된 모욕적 언사를 줄기차게 토해내는 디그냄은 믿음직한 상사라기보다 차라리 한 마리 말에 가깝다. <디파티드>의 실세는 한침의 자리를 이어받은 코스텔로(잭 니콜슨)다. 음지에서 피어난 미친 버섯 같은 그는, 이제껏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갖은 악당을 모조리 버무려 놓은 듯한 지랄발광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아, 그래서 <디파티드>는 보지 말아야 할 영화냐고? 아니, 그래서 재미있는 영화다. 한 스타일리스트의 영화를 다른 스타일리스트가 자기 식대로 풀어낸 결과물을 본다는 것,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유명한 영화를 골랐다면 각오를 단단히

<혹성탈출> vs <혹성탈출>

팀 버튼 역시 할리우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스타일리스트다. 그가 프랭클린 J. 샤프너의 1968년판 <혹성탈출>을 새로 만들겠다 했을 때,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일어났다. ‘팀 버튼의 그림이 기대된다’와 ‘원작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겠느냐’ 정도로 요약하면 되겠다. 우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워낙 오래전 영화이긴 하지만 1968년판 <혹성탈출>은 당시 메가톤급 인기작이었다. 음침한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 비행사는, 말도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과 그를 지배하는 원숭이 무리와 마주친다.

<혹성탈출>(1968)
<혹성탈출>(2001)

문제는 이 영화가 괴팍한 B급 상상으로 먹고사는 옛 SF물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숭이 집단은 인간의 특성- 폭력과 종교, 권력과 부패, 다른 종족에 대한 잔인성 같은- 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 밑에서 저능한 짐승으로 다뤄지는 인간의 현재와 “탐욕에 눈이 멀어 유희로 신의 창조물을 죽이나니,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살해하도다. 그러니 번식하게 하지 말라. 자신과 너희의 집을 파괴할 테니. 그는 죽음의 사자다” 같은 인간의 과거는 금즉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원숭이들로부터 도망쳐 행성을 헤매던 주인공은 해변 모래톱에 반쯤 묻혀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한다. 그가 도착한 원숭이 별이 미래의 지구라는 무서운 예언이다. 전쟁을 일삼는 인간이 싫어 지구를 떠나온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멸망을 자처한 인간의 미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무거운 메시지는, 엉덩이에 쫙 달라붙는 우주복과 철밥통 같은 가방, 우주선에서 시가를 벅벅 피우는 등의 엽기적 광경을 모두 무화시켰다. 외려, 화려하지 않은 그림이 영화를 더욱 묵시록적으로 느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팀 버튼은 이를 리메이크하면서 암울한 미래보다 원숭이와 인간의 화해에 주목했다(모래밭에서 밝혀지는 비밀도 약간 변형시켰다). 원숭이와 인간을 이분하는 대신, 개개의 캐릭터를 차별화하고 군데군데 유머도 삽입했다. 현란하고 화려한 볼거리는 두말 할 것 없다. 그러나 썩 괜찮은 흥행 성적을 거둔 팀 버튼은, 동시에 마음 상하는 비난도 받아야 했다. ‘팀 버튼의 색깔이 안 드러나 실망, 할리우드의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영화’라거나 ‘원작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게 여기서 교훈 하나. 매끈하게 만드는 건 좋지만, 원작이 워낙 걸출하면 웬만큼 잘돼도 뺨이 석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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