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상상과 모험의 세계,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왕국
2006-12-0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의 숲은 현실과 전설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파시즘 정부에 저항하는 게릴라들은 산등성이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 아래 산기슭에는 기원 이전의 물건인 듯한 석상이 당연하다는 듯이 양치식물 사이에 피있다. 오솔길을 따라가면 이끼로 뒤덮인 아치 너머 미로 동굴이 있어 오래전에 닫혀버린 지하 왕국의 입구로 인도한다. 햇빛 사이로 어둠이 깃드는, 참혹한 전쟁터이면서 서글픈 마법에 걸린 숲. 이 공간을 창조한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블레이드2> <헬보이>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사이사이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처럼 사적이고 신비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스페인 내전을 작은 숲으로 축소하여 세상 모든 이가 타협하여도 홀로 타협하지 못했던 소녀를 감싸안는 <판의 미로…>는 그 이란성 쌍둥이 버전인 <악마의 등뼈>처럼 불가해한 존재를 믿는 상상력으로 야만의 세상을 견딜 수 있다고 말해주는 영화다. 그러므로 41살인 기예르모 델 토로 또한 신비로운 인물일 것이다. 어릴 적 어둠과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던 존재들을 이제 모두 잊었는데, 그는 아직도 돌벽 너머 유령의 한숨소리를 듣고, 꽃가루 사이로 손을 내밀어 요정을 불러들인다. 11월30일 개봉하는 그의 역작 <판의 미로…>를 기회로 삼아 장난감과 그림책을 잔뜩 모아두고 산다는 이 귀여운 감독의 발자취를 훑어보았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어둠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미로 같은 하수도를 탐험하면서 고향 과달라하라를 가로지르곤 했던 그는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아 카타콤처럼 느껴졌던” 땅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밥을 먹었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면 시각이 퇴화한다는데, 그리 살던 델 토로도 어둠밖에는 보지 못하는 지하 생물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무슨 이유로 눈이 나빠져 안경을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델 토로는 태양과 인공 조명 아래에서만 세상을 지켜보았던 많은 이들과 다르게,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숱한 피조물과 새하얀 햇빛 가운데 도사린 어두운 자국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크로노스> <미믹> <블레이드2> 등에서 어둠에 잠긴 사물만이 가질 수 있는 희미한 빛을 발견했던 그는 이제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에 이르러 횃불조차 들지 않고 인간의 발길이 닿아본 적 없는 지하로 내려간다. 기억과 온기를 빼앗는 지상의 빛이 아닌, 파랗게 얼어붙은 소녀를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감싸안는, 진정한 빛의 세계로. 2006년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델 토로의 신작 <판의 미로…>는 그림 형제의 숲처럼 무섭고 위험한 대지를 건너 어둠의 심장에서 빛의 샘물을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는 이미지이자 형식, 형식이 곧 내용"

1960년대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멕시코 할머니는 바쁜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를 키우면서 지금과 같은 현재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자 기예르모가 신앙심 깊은 남자로 자라기를 원했지만, 그 아이에게 가톨릭은 “보라색 상처투성이에, 눈동자없는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성상들”로 각인된 기괴한 억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델 토로는 가톨릭 신앙과 죽음의 무도가 뒤얽힌 멕시코에 뿌리박은 감독이고, 잭 커비를 비롯한 미국 만화책과 영국 해머 영화사가 제작한 공포영화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스스로 멕시코적 감수성이라 부르는 고향의 흔적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멕시코에서 태어났기에 죽음과 살인을 유희로만 즐기지는 못한다. “나는 멕시코인이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죽음을 바라본다. 나는 사람들이 산 채로 불에 타고 칼에 찔리고 목이 잘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멕시코는 아직도 매우 폭력적인 나라다.” 어쩌면 델 토로가 할리우드와 스페인어권에서 만든 영화들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느끼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즐기는 시간과 체험하는 시간이 달랐던 멕시코 소년 델 토로는 불멸의 삶을 회의하는 장엄한 고딕풍 호러에서 시작하여 살인을 회의할 틈조차 없는 슈퍼히어로의 만화적인 세계를 경유하는 기묘한 여정을 밟아왔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던 델 토로는 <엑소시스트> <대부> <택시 드라이버> 등의 분장을 맡았던 딕 스미스로부터 분장과 시각효과를 배우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된 가옥에서 도플갱어와 마주친다거나 하는 소년 시절 단편영화들을 떠올린다면 델 토로는 비디오카메라 작동법을 익힌 순간부터 이미 영화를 시작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처럼 거의 전생(全生)을 영화와 더불어 살아온 그에게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미지였고 형식이었다. “나는 형식이 내용이라고 믿는다. 먼저 색채와 형태와 세트의 짜임새를 고려하지 않고는 영화를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조각과 그림을 배웠고, 카메라 앞에 놓인 그 어떤 작은 물체라도 모두 계산에 넣어야만 한다. 그것이 단추 한개나 세트의 한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그 때문에 골동품 상점의 선반을 천천히 둘러보는 <크로노스>의 카메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무심하게 긴장을 드러낸다. 박해받는 그리스도상과 갱지로 포장된 자그마한 조각과 햇빛을 절단하여 통과시키는 유리창은 우아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하여, 영생을 약속하는 연금술사의 기계와 곤충처럼 탈피를 겪는 뱀파이어의 존재를, 곧이곧대로 믿도록 이끈다. 마음에 붙박히는, 그리하여 최면을 걸 듯 빗물에 젖어가듯 악몽의 세계를 불러내는 이미지. 델 토로는 한장의 스케치나 오래된 삽화만 두고도 조그만 서사시를 상상해내는 어린아이처럼 영화를 만들곤 하는 사람이다. 읽는 법을 배우기도 전부터 미국 만화책에 빠졌던 델 토로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가능한 델 토로의 개방형 미로들

거대 자본에 매여 만들었기에 델 토로를 다시 멕시코로 귀환하게 만든 <미믹> 또한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벌레의 이미지로 먼저 떠오르는 영화였다. 그 자신 또한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미믹>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는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내 예전 영화부터 차례로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모든 영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미믹>은 델 토로가 집착하는 곤충이 원없이 돌아다니고, 그가 반드시 만들어보고 싶었던 축축한 하수도가 주된 배경이고, 무엇보다도 미로의 영화다. 델 토로의 미로는 같은 방향으로만 모퉁이를 돌면 반드시 출구를 만나게 되는 폐쇄형이 아니다. 함정에 빠지면 도전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서바이벌 게임의 장소도 아니다.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지옥의 문을 여는 <헬보이>의 테슬라 게이트처럼 예측 불가능한 델 토로의 개방형 미로에서 함정을 피해가는 것보다 중요한 과제는 함정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일이다. 그 때문에 그는 호러영화를 사랑한다. “삶의 목적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배우는 데 있다. 그것은 호러영화의 주된 목적이기도 하다. 안전한 방식으로 두려움을 경험하게 하여, 저 바깥세상에 존재하는 진짜 공포의 백신을 맞게 하는 것.” 델 토로가 멕시코로 돌아가 만든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는 사나운 세상에 던져져 찢기지만 그 모든 상처를 이기고 살아남는 아이들의 영화다. 아무리 무서워도 달아나지 않고 진정한 공포를 견디어 이제야 눈물을 닦는 아이들의 영화다.

<미믹>
<악마의 등뼈>

델 토로는 만화가 원작인 <블레이드2>도 자신만의 감성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블레이드2>는 뱀파이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퇴락해가는 세계, 거의 절망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을.” 먼지가 쌓여가는 감촉, 손끝에서 바스라지는 고서(古書)의 책장, 바탕과 얼룩의 색이 점차 비슷해져가는 낡은 옷감. 그러한 느낌들이 퇴락이라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종(種)으로부터 위협받는 뱀파이어들의 분투보다는 쓸쓸한 독백으로 시작되는 <악마의 등뼈>가 내비치고 있을 것이다. “유령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반복되도록 운명지어진 끔찍한 순간? 흐릿한 사진처럼, 호박 속에 갇힌 곤충처럼, 오랫동안 연기된 감정?” 스페인 내전이 끝나갈 무렵, 고아원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을 다루는 <악마의 등뼈>는 슬픈 유령들이 출몰하는 괴담이다. 살해당한 소년은 다른 아이들을 구하고자 경고를 전하지만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호박 속에 갇힌 곤충처럼” 굳어져가는 창백한 피부는 친구들을 물리친다. <악마의 등뼈>의 유령들은 시간에 포박당했다. 이 영화는 아주 잠깐 얻어낸 유예기간에 안주하고 싶었지만 느닷없이 죽고 만 노인들과 험한 세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대비하며 남겨진 것들의 슬픔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악마의 등뼈>는 조금쯤 진취적인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파시스트에게 부모를 잃고 서로를 의지해야만 하는 고아들은 어린 게릴라들처럼 전술을 세워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아이들을 지켜주고자 했던, 유령이 되어서도 보호하고자 했던 어른들은 하나씩 죽어가지만, 아이들은 손을 꼭잡고 가방을 든다. 서부영화의 지평선에 인상파의 색채를 덧입힌 듯한 황무지. 그 너머에 무엇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걸어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악마의 등뼈>는 다소의 희망과 다소의 슬픔을 함께 지닌 채 끝을 맺는다. 등을 떠밀려 세상에 나선 아이들은 아직도 싸움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고, 유령들은 아직도 고아원에 머물러 있을 것이므로.

진실과 관계 맺기 위한 델 토로의 상상의 세계

델 토로는 본디 <악마의 등뼈>의 배경을 멕시코 혁명으로 생각했었다. “배경을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옮기자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멕시코 혁명은 많은 정파가 공공의 적과 싸운 전쟁이었지만, 단순하게 보자면, 스페인 내전은 좌파가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으므로 좀더 선명했다.” 스페인 내전은 이상할 정도로 고립된 상황에서 진행됐고 세계사의 흐름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지만, 유럽의 모든 좌파가 스페인에서 싸웠다. 국경 안에 국한되었으면서도 세계적이었던 전쟁, 한때 빛나던 기억이 있어 더욱 쓰라린 패배. 델 토로가 전쟁을 세계와 운명의 은유로 사용하고자 했다면 스페인 내전은 가장 적당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5년의 시간 차이를 두기는 해도 <판의 미로…>도 스페인 내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얀 잠옷을 입고 파시즘의 냉기에 맞서 싸우는 소녀의 이야기인 <판의 미로…>는 델 토로가 쌓아온 상상의 세계가 차가운 볼에 맺힌 더운 눈물 방울로 응결된 듯한 영화다. 델 토로는 “나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상상력과 희망으로 버티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상상은 도피가 아니다. 진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고 믿고 있다. 그의 믿음처럼 오필리아는 사마귀와 닮은 곤충을 보고도 금세 그 존재가 요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본다. 그것이 이 작은 아이가, 혹은 델 토로가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다. 세상은 잔인하고 모진 곳이어서, 아픈 딸을 위해 토끼 사냥을 나갔던 아버지는 총을 쏘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고, 해머와 망치로 고문받다 못해 “아주 조금 이야기한” 게릴라 청년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도록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차마 독약을 주사하지 못하는 의사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바늘을 밀어넣는다.

델 토로는 이처럼 어른들조차 무너지고 마는 1944년 암흑의 스페인 숲속에 오필리아를 홀로 세워두었다. “진실은 야수와도 같아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와 주인공과 피조물은 누구보다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한낮의 야만과 한밤의 모험. 내전에서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가 감당해야 하는 두 가지 가혹한 운명은 세 번째 열쇠가 걸린 과제에 이르러 하나가 되고, 영생도 타협도 거부한 소녀는 기어이 살아남고야 만다. 그러나 싸늘한 돌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아이가 좋아했던 자장가를 불러주는 여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어른이 되면 요정 같은 것은 믿지 않게 된다”고 말하는 가정부 메르세데스는 착하고 강인하고 곧은 여인이지만 시선이 닿지 않는 미로의 중심으로는 다가가지 못한다. 델 토로는 그 같은 사실을 슬퍼한다. “정말 시급한 일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나는 내 영화들이 믿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믿음의 능력을 잃지 않았던 소녀는 자장가 멜로디에 감싸인 채 황금의 옥좌로 다가간다. 지상의 어둠을 버리고 황금빛에 몸을 담근다.

델 토로의 상상력의 결정체, <판의 미로…>

논리적으로는 해피엔드임에도 안쓰러운 감정이 넘쳐나는 <판의 미로…>는 쓰라린 현실을 기묘할 정도로 인공적인 세계 안에 담았다. 델 토로는 상징주의 화가 카를로스 슈바베와 아놀드 뵈클린의 화풍, 요정 일러스트로 유명한 아서 래컴의 그림을 참고하여, 모든 공간을 세트로 만들었다. 신화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하왕국 입구의 폐허, 고야의 그림과도 같은 게릴라 은신처, 20세기보다는 빅토리아 시대 금욕의 흔적이 더욱 짙은 침실. 그것은 어쩌면 인공적인 세계라기보다 마음속의 세계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델 토로는 요정 이야기가 담긴 동화책과 할머니가 목격했다는 흰옷의 유령과 어둡고 기괴한 멕시코 신화가 방마다 들어찬 기억의 궁전을 헤집어 <판의 미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판의 미로…>는 다시 한번, 델 토로의 상상력의 결정체다. 어둠과 빛이, 상상과 현실이, 서로 등돌리지 않고선 굳은 관계를 맺고 있는 델 토로의 상상력이 이 아름다운 영화를 창조했다. 그는 밤에만 찾아드는 악몽이 낮에 상처입었던 마음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마음속에서 건져낸 세계가 현실의 뒷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빌어먹을 전깃불이 어째서 필요한지 모르겠다. 낮은 낮이고, 밤은 밤이다.” 아마도 델 토로는 밤이 되어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암흑을 더듬어가는 그 눈길 끝에서, 수백년 동안 죽어 있던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쏟던 소녀가 토닥거리는 손길을 얻고, 지하왕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릴 것이다. 믿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그 문으로 들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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