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영화에 관해서는 무엇이 남게 될까? 필자에겐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마음을 뒤흔드는 공리의 눈물 흘리는 얼굴 이미지가 남을 게다. 그것은 필자를 몇년 전으로 되돌려보낸다. 왜냐하면 우리 세대의 많은 영화광들은 <홍등>의 첫 장면,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공리의 눈물에서 아시아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바뀌었다. <홍등>에서 공리는 자신이 소실이 될 것이고, 남편의 집에서 마치 하나의 물건처럼 남은 생애를 갇혀 지낼 것을 알기에 눈물 흘렸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서는 반대로 그녀가 탄 배가 대양의 파란 사막인, 무한히 열려 있는 수평선을 향해 멀어진다. 즉, 마이클 만 감독은 말하자면 경계없는 세상을 그렸다. 적의를 느끼게 하지 않는 유연함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떠도는 등장인물들은 단지 위성 전화를 통해서만 연결될 뿐이다. 마이애미는 더이상 경계도, 정확한 지리도 없으며 도시는 다만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어진 고속도로의 분기점일 뿐이다. 산티아고든 우한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떤 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물들의 국적은 다양하고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다. 공리를 보면 중국 출신으로 히스패닉계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한다. 하지만 왜, 그토록 다른 맥락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그대로일까?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녀는 똑같은 버림받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용기있게 현실의 쟁점을 공격하면서, 2006년 영화, 특히 미국영화는 이 혼란을 표현했다. 더이상 새로운 세계는 없고 단지 거대하고 텅 빈 유일한 공간만이 있을 뿐이고, 따라서 사막을 떠도는 영혼의 정의로운 탐험가적 주인공을 더이상 창조하지 못한다.
심지어 코미디 작품에서 보랏(<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의 주인공)도 너무 광대한 세계에 던져진 이 종에 속한다. 올해 가장 멋진 주인공 중 한명은 <시리아나>의 조지 클루니였다. 침울한 첩자인 그는 가족, 국적, 정체성을 잃었고,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미군의 미사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죽게 된다. 흰 깃발을 손에 쥐고서, 그는 공리와 똑같은 혼란의 분위기를 드러낸다.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일본에서 또 다른 눈물에 젖은 얼굴을 찍었다. 한 사막에서 또 다른 사막으로 옮겨가며 모로코에서 캘리포니아까지의 깊은 밤에 잠긴 세계를 그린 작품 <바벨>에서 말 못하는 소녀 린코 기쿠치의 고독의 눈물은 동경의 밤에 담겨 있다. 이는 말리에서 자라 모스크바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파리에 정착한 모리타니 출신 감독 압데라만 시사코가 범인을 찾아내려던 것과 이어진다. 그의 작품 <바마코>에서, 그는 영화 제목이자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의 한 법정에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건다. 법정에는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평범한 아프리카인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중에는 피해자들조차도 이 소송에 관심을 갖지 않고 판결선고 역시 나오지 않는다. 이러는 동안에도 불법 이민자들은 사막에서 탈진해서 쓰러져 간다. 모든 것은 아마도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눈물 흘리고 있는 여성의 또 다른 얼굴로 요약된다. 그것은 아이샤 마이가의 얼굴이다. 바의 가수인 그녀는 자신의 모든 절망을, 자기 나라와 친지들의 절망, 이제는 지표 없는 세계의 절망을 마이크에다 쏟아 노래한다. 손님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고 노래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사막 한가운데의 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