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할리우드발 TV행 엑소더스
2007-01-25
글 : 김도훈

제리 브룩하이머, 지나 데이비스, 마이크 피기스 등… TV 방송국으로 몰려드는 인재들

성격파 배우 제임스 우즈의 2000년대는 우울했다. 기억에 남는 영화라고 해봐야 <겟 쇼티>의 지지부진한 속편 <쿨!>과 패러디영화 <무서운 영화3> 정도가 전부였다. 들어오는 대본이 점점 뜸해지는 건 참을 만했다. 그러나 대본들의 질이 갈수록 형편없어지는 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우즈는 B급 비디오 직행 영화계의 수렁으로 발목을 잡아채는 할리우드를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장소를 환갑의 나이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브라운관의 세계다. “지난 몇년간 영화 산업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지켜보며 비통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TV는 달랐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할리우드 사람들은 TV를 멸시했다. 요즘은 TV를 켤 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흥미진진한 시리즈를 매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우즈는 <CBS>의 새로운 법정드라마 <샤크>에 출연하기로 결심했고, 드라마는 꽤 짭짤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우즈의 재능을 수백만 시청자들에게 다시 증명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시든 꽃, TV를 마시고 다시 피다

제임스 우즈는 최근 몇년간 일어난 ‘할리우드발 TV행 엑소더스’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 중 한명이다. 그간 TV와 영화 사이의 엑소더스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만 이루어져 왔다. 시드니 루멧과 아서 펜 등 50년대 미국 TV의 황금기가 배출했던 걸출한 작가들의 사례는 예외로 치더라도, 비교적 최근인 80년대와 90년대 경향은 강한 자본과 창의력을 무기로 내세운 할리우드가 검증된 TV계의 재능들을 스크린으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짐 캐리를 비롯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코미디언들과 조니 뎁, 조지 클루니 등 수많은 배우들이 TV의 성공을 발판으로 할리우드 스타덤에 안착했고, 감독과 작가들도 브라운관이 인정할 때 즈음 짐을 챙겨 할리우드로 떠났다. 그건 이유를 되물을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 TV의 혁명을 계기로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엑소더스를 위한 해류가 조금씩 역류를 시작한 것이다.

<커맨더 인 치프>

이 같은 변화에도 한계는 있다. TV로 귀환하는 배우들은 절정에 오른 톱스타가 아니라 한물간 옛날의 청춘 스타들이거나 배역을 낚기 힘들어진 중견 배우들이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씹다 뱉어낸 재능들이 브라운관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모습은 묘하게 뭉클한 데가 있다. <커맨더 인 치프>의 지나 데이비스와 <24>의 키퍼 서덜런드, <제리코>의 스킷 울리히처럼 전성기를 넘겨버린 젊은 배우들이 TV를 통해 꺼져가는 스타덤의 불씨를 되살렸고, <늑대와 춤을>의 매리 맥도넬과 <좋은 친구들>의 로레인 브라코 같은 연기파 중견 여배우들은 각각 <배틀스타 갈락티카>와 <소프라노스> 같은 우아한 드라마들을 통해 할리우드에서는 도통 주어지지 않던 천혜의 배역으로 당당하게 복귀했다. 그래서 “<?>처럼 내게 영감을 안겨주는 영화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소프라노스>의 한 시간짜리 에피소드들은 요즘 상영되는 영화 한편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로레인 브라코의 말은, 할리우드에서 배역을 얻지 못해 어쩔 수 없이 TV에 만족하고 사는 중견 여배우의 삐딱함으로 오인받을 염려가 없다. 귀환의 리스트는 배우들에게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마이크 피기스와 <졸업>의 마이크 니콜스, <페이퍼 문>의 피터 보그다노비치처럼 할리우드가 돈줄을 대지 않는 중견 감독들은 <HBO>와 손잡고 (영화였더라면 오스카를 받아내고도 남았을) 걸작 TV시리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TV가 주는 고정수입에 취하고

하지만 귀환의 엑소더스호가 기회를 잃어버린 중견들에게만 탑승을 허하는 것은 아니다. <본 아이덴티티>의 더그 라이먼과 <미녀 삼총사>의 맥지 같은 젊고 쿨한 감독들 역시 <THE OC> 드라마의 에피소드들을 감독하고, 여전히 왕성히 활동 중인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 형제는 <CBS> 드라마 <넘버스>를 창조한 뒤 이미 영화화된 적이 있는 마이클 크라이튼 소설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을 사이파이 채널과 손잡고 시리즈화할 예정이다. 지금 가장 화끈한 할리우드 스타 조지 클루니 역시 친정으로 돌아와 시드니 루멧의 걸작 <네트워크>를 리얼리티 드라마의 포맷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이미 TV계의 거물이 된 머리좋은 장사꾼 제리 브룩하이머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같은 TV행 엑소더스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당연하게도, 돈이다. 영화계 인재들이 TV로 몰려드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빠르게 현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물급 스타와 감독들에게 TV가 보장하는 수익은 푼돈에 불과하겠지만, 보통급의 배우들과 감독, 작가들에게 TV가 제공할 수 있는 수익은 할리우드의 불안정한 수익보다 훨씬 단단하고 달콤하다. 예를 들어 시트콤 <프레이저>의 주연인 켈시 그래머가 시리즈를 통해 벌어들이는 돈은 한해 4천만달러에서 7천만달러에 육박한다. 어떻게 TV 탤런트가 그토록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냐고? 이제 TV계 사람들은 회당 출연료와 한정된 광고수익 따위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드라마는 시즌이 종료되는 즉시 수만장에서 수백만장의 DVD를 판매하고, 일단 한번 히트 친 시리즈는 무한정 시즌을 확장하거나 ‘스핀오프’라는 황금알을 낳는 새끼를 깔 수도 있다. 최근에는 아이포드 다운로드 등 인터넷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까지 가세했다. 배우와 감독, 작가들에게 떨어지는 수익도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회당 출연료나 연출료, 작가료야 할리우드영화에 비할 바 아니겠지만, 몇년 동안 정기적인 수익으로 고정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들이 저마다 TV시리즈의 파일럿판 연출에 뛰어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TV의 적극적인 질적 발전에 물들다

물론 돈만 많이 준다고 모두가 TV로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TV로 옮겨가는 순간 한물간 인생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할리우드의 오랜 생리다. 그 같은 편견을 서서히 희석시키고 있는 것은 최근 몇년간 눈에 띄게 달라진 TV시리즈의 질적 진화다. TV와 영화가 보여주는 기술적인 차이점은 여전히 명확하게 남아 있다.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어느 날 갑자기 <스타워즈>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최근 들어 급격하게 좁혀지고 있다. 최고의 기술진과 스탭들, 섬세하게 짜인 미장센, 다양한 로케이션과 무시무시한 제작비(<로스트> 파일럿의 제작비는 무려 1천만달러였다)는 TV를 점점 영화처럼 변화시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또렷이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끊임없이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숙련된 작가층의 존재다. TV작가들은 십수명 이상이 함께 모여서 토론을 거친 뒤 시리즈를 창조하고 오랫동안 수많은 이야기의 가지를 만들어나간다. <CBS> 대표 데이비드 스타프트 역시 이 같은 장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공동작업의 형식은 작가들이 더 나은 것을 쓰게끔 도와준다. 작가들은 하나를 붙들고 방황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일년에 22개의 작은 영화들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런 가운데 스스로의 작가적 기술 또한 연마해나가는 것이다.” 게다가 TV가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TV는 더이상 영화에 비해 가볍고 말랑말랑한 소재만을 다루는 매체가 아니다. 선각자 격인 <HBO>가 <퀴어 애즈 포크>와 <섹스 & 시티> <소프라노스> 등의 시리즈를 통해 TV의 검열에 도전한 이후, 미국 TV에서 섹스와 폭력에 대한 경계심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 미국 TV는 문화·사회적인 공방이 오고가며 새로운 팝 컬처가 끊임없이 도입되는 신세계다. 드라마뿐만이 아니라 시사와 교양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와 포맷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TV의 질적·양적 발전은 더이상 TV를 한물간 할리우드 스타와 감독의 도피처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더이상 ‘가오’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데이비드 카루소의 귀환이 의미하는 것

지난 1994년, 압도적인 인기를 모으던 시리즈 <뉴욕경찰 24시>(NYPD Blue)의 주연 데이비드 카루소는 TV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대중의 인기에 도취한 그에게 TV세트는 너무나도 볼품없어 보였다. “나는 내 자신을 <ER>의 조지 클루니 같은 동료 TV 스타들을 위한 개척자로 여겼다. 내가 할리우드행 배 위에 올라탔을 때는 아무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별로 주어지지 않았고, 기대했던 윌리엄 프리드킨의 영화 <제이드>는 재앙으로 드러났다. 5년간 사람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해버린 그는 2000년에 드디어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지난 5년간 내가 맡은 첫 번째 메이저 영화다. 이 기회가 또 다른 좋은 기회들을 몰고 올지는 나로서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렇기만을 바란다.” 불행하게도, 그 기회는 러셀 크로와 멕 라이언 주연의 또 다른 재앙 <프루프 오브 라이프>였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부활의 기회는 친정에서 왔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데이비드 카루소에게 <CSI>의 스핀오프인 <CSI: 마이애미>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했고, 카루소는 기꺼이 넥타이를 매고 마이애미로 날아갔다. 호레이쇼 반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데이비드 카루소는 지난 10여년간 벌어진 할리우드와 TV의 관계 역전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사례다. 한때 인재들을 가득 싣고 할리우드로 향하던 엑소더스의 배는 이제 TV로 귀향하고 있다. 역류는 딱 알맞은 속도로 흐른다. 어쩌면 진짜 엑소더스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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