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로마>부터 정정훈 촬영감독의 <24>까지
미국 드라마의 놀라운 변화는 영화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충무로 영화인들 역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인 10명으로부터 자신이 좋아하고 지지하며 즐겨보는 미국 드라마와 그 이유에 관해 들어봤다.
영화는 불가능한 거대 서사의 힘
<로마>(Rome) SBS 목요일 밤 1시30분, DVD 출시
TV를 안 본 지 4년째 되는데, “요즘은 할리우드영화보다 미국 TV시리즈의 완성도가 좋다”는 프로듀서의 강압에 못 이겨 보게 됐다. 그런데 막상 DVD를 플레이한 뒤 그 자리에서 12부를 모두 볼 수밖에 없었다. 졸려 죽겠는데 다음 디스크를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그게 <로마>였다. 우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거나 역사적 사실을 조금씩 뒤트는 재미가 대단했다(이를테면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나온 아이의 비밀). 그리고 영화가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서사가 주는 힘 또한 엄청났다. 긴 러닝타임 속에 다양한 인물과 성격, 그 인물의 관계와 이면, 맞물려 진행되는 사건의 의외성 등을 풍부하게 담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영화가 따라잡을 수 없는 TV시리즈의 매력이니 말이다. 특히 초반 3부는 마이클 앱티드라는 손재주 좋은 영화감독이 만들어서 그런지 밀도가 굉장히 높다. 또 로마시대를 재현해놓은 세트의 스케일도 대단하고 당대 성풍속도도 매우 충격적으로 묘사하니 꽂힐 수밖에. 이 드라마가 다음 영화에 영향을 끼칠 것 같냐고? 황지우 식으로 답한다면 “내 대갈통 속의 로마시대와 내 대갈통 밖의 통일신라시대가 만나는 접점이 안 보인다는 점이렷다”.
류승완/ 영화감독·<짝패> <주먹이 운다>
아니, 이렇게 거침없을 수가!
<카니발>(Carnivale) 국내 미방영, 시즌1, 2 DVD 출시
그놈의 DVD 재킷이 문제였다. 공황시대의 서커스단의 기괴한 모습을 보면서 이게 도대체 뭘까 하는 마음에 사서 보게 된 것이다. 흠, 그런데 에피소드들을 연출한 감독의 면면이 수상했다. <리버스 엣지>를 만든 팀 헌터, <나인 라이브즈>의 로드리고 가르시아 같은 인디영화계 재주꾼들이 참여한 것이 아닌가. 공황시대 유랑 서커스단과 한 초능력자, 신부 등을 내세워 온갖 오컬트 현상을 다루는 이 드라마는 과감한 표현으로 소문난 <HBO> 시리즈 중에서도 파격적인 묘사와 거침없는 전개로 유명하다. 성기 노출도 빈번하니까. 토드 브라우닝의 <프릭스>와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픽스>의 기묘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드라마는 이야기의 전복성뿐 아니라 플래시 포워드를 자주 사용하고 인물 내면의 의식의 흐름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등 한마디로 거침이 없다. 그렇다고 추상적인 실험영화도 아니다. 대중영화 문법의 경계에 있지만 좀더 보편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대단하다. 영화, 정말 열심히 만들어야겠다. 대중적인 포맷인 미니시리즈가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데 하물며 영화라면 더 편하고 쉬운 길에 투항할 수 없지 않은가. 아, 제작자님, 그렇다고 제가 어려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건 아니고요….
임필성/ 영화감독·<헨젤과 그레텔>(제작 중) <남극일기>
전문성과 사람 이야기의 완전한 봉합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 KBS2 일요일 밤 11시25분, 채널CGV 수·목 오후 8시40분, 시즌1 DVD 출시
병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면 두 가지 패턴이 있다. 감동 또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거나 아예 공포스러운 이야기 말이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그 두 가지 모두 아니면서도 자신만의 일정한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 이 드라마는 의학적 지식, 의사와 환자의 관계, 그리고 의사들 사이의 관계를 치우치지 않게 담으면서도 밀도있는 드라마를 구성한다. 지난 1월7일 시청한 에피소드에는 손가락 골절상을 입은 고등학생 아이스하키 선수가 나왔는데, 이 친구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대학 진학이 걸린 중요한 시합에 나가기 위해 손가락을 절단한다. 하지만 세균에 감염돼 봉합은 불가능한 상태다. 아주 짧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의사의 냉정함과 환자의 처연함, 의학적인 전문성까지 포함돼 있다. 또 되풀이되기는 해도 레지던트와 전문의 또는 그 전문의의 아내인 또 다른 전문의, 그리고 레지던트와 레지던트 사이의 미묘한 애정관계가 상당한 밀도가 있다. 프로듀서라면 누구나 소재의 확장을 고민하는데, <그레이 아나토미>는 병원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참신하고 촘촘하게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자극을 준다. 공간이 병원이 아니라면 어떤가. 통념이나 장르적 관습에 빠지지 않는 깊은 밀도의 이야기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말이다.
윤상오/ 프로듀서·싸이더스FNH 이사
심리적인 액션을 위한 최고의 참고자료
<CSI>(CSI: Crime Scene Investigation) MBC 일요일 밤 12시25분, OCN 수시 방영
아니, 왜 <CSI>냐니. 그 말은 마치 왜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다크 엔젤> 같은 액션물을 좋아하지 않느냐는 말로 들리는데…. 하여간 <CSI>다. 원조 <CSI>뿐 아니라 <CSI: 마이애미>나 <CSI: 뉴욕>까지 모두 좋아한다. 우선 과학적인 분석과 추리가 상상을 뛰어넘는다. 시신을 파먹는 벌레 한 마리에서 유전자를 찾아내 사건을 해결한다든지, 비행기 조종사가 총상 비슷한 것을 입고 죽었는데 알고 보니 볼트가 튕겨져 나오면서 관통된 것을 밝힌다든지, 놀라운 상상력과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추리가 입을 쩍 벌리게 한다. 또 하나, 캐릭터들의 매력이다. 에피소드마다 나오는 인물들인데 그들 사이의 드라마를 끊임없이 엮어내고, 수사관의 차가운 이미지를 인간미로 바꿔내는 능력 또한 참신하게 다가온다. 자, 그럼, 무술감독이 왜 <CSI>냐고? 액션도 내 나름대로 멋있게 했다고 생각해도 관객은 의외로 재미없다고 말하기도 하며, 그저 이리저리 빠져서 만든 액션이 때때로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퍼포먼스로서의 액션보다는 심리적인 액션이다. 결국, 이 논리적이고 탄탄한 드라마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도 다 설득력있는 액션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정두홍/ 무술감독·<중천> <뚝방전설>
숨어 있는 카메라가 눈부시다
<24> 슈퍼액션 금요일 밤 12시, 폭스 채널 수시 방영, 시즌1~5 DVD 출시
<24>에 관해 말하기 앞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촬영’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다면, 그건 드라마와 함께 가는 촬영이다. 촬영 혼자 도드라지는 것은 눈에 거슬리며 드라마를 결국 침해하게 돼 있다. 개인적으로 그 대표적인 경우가 <CSI>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24>는 매우 훌륭한 촬영을 보여준다. 촬영의 기술적 테크닉 드라마의 흐름이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 <24>를 보고 있노라면 촬영이 눈에 띄지 않는데, 덕분에 불필요한 감정의 왜곡이 발생하지 않는다. 핸드헬드와 고정된 카메라의 차이라는 면에서도 <24>는 모범적이다. 이 드라마는 사건과 인물에 따라 핸드헬드인지 고정인지를 명확하게 가름해놓는다. 나는 <24>를 보면서 철저하게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촬영을 새삼 느끼고 배운다. 게다가 조명이 매우 현실적인데다 약간은 거친 느낌의 핸드헬드 촬영이 많은데 그 또한 내 취향이니 이 드라마, 도무지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적으로 봐도 정해진 시간, 그러니까 1시간 안에 주어진 이야기를 모두 풀어내야 한다는 점 또한 매우 영화적이라는 생각이다. 거의 실제 진행시간과 비슷한 시간이 진행되고 그게 모여서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된다니, 이것 참 신통하지 않은가.
정정훈/ 촬영감독·<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친절한 금자씨>
드라마는 즐겁구나 산 넘어 산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 국내 종영, 시즌1 DVD 출시
어느 날 형이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다면? 거기다 누명을 벗길 사이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참 미안스럽게도 손수건 옆에 끼고 울거나 10년 만에 다시금 교회를 찾아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겠지만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은 얼굴도 잘생긴데다 뭔 능력도 그리 뛰어난지 교도소의 설계도에 탈출계획의 ABC까지 모두 몸에 문신을 새겨서는 불가능 100%의 탈옥을 감행한다. 대략 45분의 방영시간 동안 화장실은커녕 손에 든 감자칩 한 조각도 입에 넣을 여유가 없게 만드는 탄탄한 긴장감, 종일 14편을 연속 시청해도 성에 차지 않는 괴물 같은 중독성을 겸비한 <프리즌 브레이크>. 결국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손뜨개질로는 엄두조차 못 내는 꽉 짜인 구성에다 ‘산 넘어 산’ 식 내용 전개라고 해야 할까.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사건들과 끼어드는 인물들 속에서 그렇게도 바라는 탈옥은 좀체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성마른 내 성격을 고려하면 울화통이 터져 수십번이라도 보는 걸 때려쳤을 법한데, 계속 다음회 플레이 버튼을 연신 눌러대는 것을 보면 이놈의 드라마엔 뭔가 설명하기 힘든 자학적 쾌락이 숨어 있는 듯싶다.
민동현/ 영화감독·<눈부신 하루> <지우개 따먹기>
캐릭터, 캐릭터, 캐릭터의 힘
<소프라노스>(The Sopranos) SBS·드라마플러스 수·목 밤 11시10분, 시즌1~5 DVD 출시
역시 캐릭터다. 주인공인 토니 소프라노는 집 밖에서는 조폭, 그러니까 폭력적인 마피아지만 가정 안으로 들어오면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삶을 성실하게 꾸려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밖에 나가선 조직 걱정, 사업 걱정을 하지만 집에 들어와서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딸의 교육을 근심해야 하는 남자인 것이다. 이 얼마나 절묘한 캐릭터인가. 폭력적인 질서로 구성된 공적인 삶과 감정적인 사생활이 뒤얽혀 왔다 갔다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어떤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갱영화를 교묘하게 뒤튼 이 드라마는 결국 토니 소프라노란 인물을 통해 지금 미국사회가 겪고 있는 고민을 보여주는 듯하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신작을 준비하고 있는 감독으로서의 나에게도 고민거리를 준다. 이번에 준비하는 영화는 나로서는 처음으로 폭력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나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발현되는 폭력을 다루려 하는데 그 속 인물 또한 힘과 폭력, 그리고 정서적 끈끈함으로 얽혀 있다. 어휴, 하여간 참 오랜만에 영화를 만들게 된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만들었던가….
이현승/ 영화감독·<시월애> <그대 안의 블루>
카지노는 넓고 손님은 많다
<라스베가스>(Las Vegas) 국내 종영
<CSI>가 하드코어라면 <라스베가스>는 소프트코어다. 라스베가스라는 도시는 <CSI>에서처럼 강력 범죄만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호텔 레스토랑 바닷가재 도난 사건(시즌2 에피소드4) 같은 아기자기한(!) 범죄들도 공존하는 곳이라고 <라스베가스>는 주장한다. 유아독존 <CSI>와의 차별화는 후발주자가 불가피하게 택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에피소드당 3개의 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되고 그중 하나가 범죄사건의 수사과정을 다루는데, ‘수사드라마인 척’하는 1/3보다는 호텔을 드나드는 다양한 군상을 그린 나머지 2/3가 이 드라마의 진짜 매력이다. 특히 매회 1/3씩 책임지는 특이한 사연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혼할 아내에게 위자료를 주기 싫어서 전 재산을 날려버리려고 카지노에 온 남자(시즌2 에피소드5), 평생 모은 돈을 룰렛 한판에 걸고 유명해진 이(시즌2 에피소드19) 등. 화끈한 맛이 없어서일까. ‘<CSI> 폐인’은 들어봤어도 ‘<라스베가스> 폐인’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게 <라스베가스>의 진정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프렌즈> 폐인’이었던 나로서는 드라마에 종속된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제 알기에.
김현석/ 영화감독·<광식이 동생 광태> <YMCA 야구단>
오직 미국만이 만들 수 있는 드라마
<히어로즈>(Heroes) 국내 미방영
<히어로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히어로즈>에 비하면 영화 <엑스맨>은 초능력 엘리트들의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을까? <히어로즈>는 인물들의 일상적인 딜레마와 초능력을 연결시키며 매회 영화를 능가하는 시각적인 자극과 특수효과로 물량공세를 퍼붓고 있다. 오직 미국만이 만들 수 있는 드라마! <히어로즈> 캐릭터들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들이 처해져 있는 환경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치어리더 클레어는 입양아이고 다행히도 절대 다치지 않는 몸을 가졌다. 늘 회사 책상에 앉아 있는 샐러리맨 히로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능력을 가졌다. 지독한 마약 중독자 화가인 아이작은 환각상태를 통해 미래의 모습을 보는 능력이 있다. 매력적이지만 나약한 가정주부 니키는 잔인하고 포악한 또 하나의 인격을 가졌다 등등. 이렇듯 그들의 환경이 그들에게 진화의 능력을 주게 되었다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가끔 다윈의 진화론이 언급되곤 한다. 슈퍼맨의 능력은 우주에서 왔고 <엑스맨>에서는 돌연변이라고 설명했었던가? 아무튼 이제 시즌1이 끝난 현재로서는 아직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표면적인 스토리로는 역시나! 미래에 벌어질 뉴욕의 거대 핵폭발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색다른 매력들로 무장된 11명이나 되는 초능력 캐릭터들이 결국 마음에 무엇을 얻게 될까? 그게 내가 시즌2를 기다리는 이유다.
정재은/ 영화감독·<태풍태양> <고양이를 부탁해>
21세기형 니키타의 액션과 패션
<앨리어스>(Alias) 폭스 채널 수·목 밤 11시, 시즌1~4 DVD 출시
<앨리어스>의 총감독인 J. J. 에이브럼스가 메가폰을 잡은 <미션 임파서블3>는 솔직히 말해 <앨리어스>의 극장판이나 다름없다. <미션…>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면 그건 이미 <앨리어스>에서 다 선보였던 거다. 개인적으론 적은 제작비를 아이디어로 돌파한 <앨리어스>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앨리어스> 역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전신인 TV시리즈 <제5전선>의 영향을 받은 작품임을 고려하면, 역시 트렌드는 돌고 돈다). <미션…>에서 ‘토끼발’이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앨리어스>에 중독될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감히 말하겠다(<로스트>의 총감독이기도 한 J. J. 에이브럼스는 단연 맥거핀 활용의 천재다). ‘21세기형 니키타’라 할 주인공 제니퍼 가너의 액션과 패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하며, 또, 레나 올린, 로저 무어, 룻거 하우어, 크리스천 슬레이터, 에단 호크, 쿠엔틴 타란티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등의 반가운 얼굴들이 적재적소에 카메오로 등장하여 시리즈를 빛내준다. 아쉬운 점은 시즌이 거듭되면서 당혹스러운 반전이 속출, 다소 김이 빠진다는 것인데, 이건 꼭 <앨리어스>에만 해당되는 얘긴 아니므로 패스.
유선동/ 영화감독·<미스터 주부퀴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