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봄은 다시 찾아오고, <여름이 가기 전에> 배우 김보경
2007-01-25
글 : 장미
사진 : 이혜정

거친 사내들을 제압하던 그 카리스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랑, 오직 사랑에 목매던 <여름이 가기 전에>의 소연을 보고 있노라니 저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친구>의 진숙으로 이름을 알렸다는 사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연극이 끝난 후>를 뽑아내던 강하지만 가녀린 목소리로 각인된 김보경. 경상도 ‘싸나이’들의 진득한 우정담 속에서 빛을 발하던 홍일점 진숙은 그해의 또 다른 발견이었다. “사실 연기를 안 할 생각도 있었어요. 조급한 마음이 앞서 이게 마지막 오디션이다 했는데 선물처럼 역을 맡게 됐죠.” 덜컥 받아안은 두 번째 출연작으로 청룡영화제 신인여우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니 하늘이라도 날 듯 신났을 테지만 그녀는 외려 차분한 목소리로 당시를 회상했다. “그땐 연기를 너무 쉽게 했고 고민도 별로 안 했어요. 워낙 신이 작았잖아요. 뭐, 철이 없었죠. (웃음)” 스포트라이트의 짜릿함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로선 독특한 기획에, 큰 제작비를 들였던 <아 유 레디?> <청풍명월>이 흥행에 참패했고 일제시대 탄생한 ‘조선 1호’ 비행사를 그린 <창공으로>는 소리소문없이 간판을 내렸다. 그 사이 <어린 신부>, 베스트극장 <잘 지내나요, 청춘> 등을 통해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관객은 더이상 그녀에게 환호하지 않았다. “힘들면 왜, 감정이 바닥까지 내려앉잖아요. 저는 끝까지 가봤어요. 그렇지만 제가 찾은 답은 역시 연기를 하자는 거였어요. 작품이 1년에 하나 들어오든 5년에 하나 들어오든 꾸준히 연기를 해야겠다. 그런 다짐을 한 게 지난해? 올해? 얼마 안 됐어요.”

그 와중에 선택한 작품이 성지혜 감독의 데뷔작 <여름이 가기 전에>. “제가 느꼈던 감정을 담고 있어 좋았어요. 제 얘기 같았을 뿐 아니라 사랑을 해본 여자라면 모두들 자기 얘기라고 생각할 거예요.” 잔인하고 사실적인 대사가 압권인 이 작품에서 김보경은 이혼 경력이 있는 외교관 민환(이현우)에게 휘둘리는 29살 소연을 연기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한국 유학생 소연은 방학을 맞아 고국을 찾고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민환과 재회하며 옛 감정에 젖어든다. “저는요, 이 여자 보면 되게 한심했어요. 지금 그렇게 살라면 안 살겠지만 꼭 옛날의 제 모습 같았거든요. 이건 몇년도 때 감정이야, 이건 몇년도 때 누구를 만날 때 감정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웃음) 똑같은 경험은 없지만 너무 쓸쓸한 거야, 너무 외로운 거야. (웃음)” 전화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한점에 부산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옮기고 물을 사오라는 싱거운 요구에 왔던 길을 돌아가는 소연을 보며 누군들 한숨을 내쉬지 않으리. 감정을 좇는 연기에 익숙했던 김보경은 그런 소연의 감정에 폭 빠져 있던 터라 촬영 중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고 털어놨다. “공항에서 헤어지는 신이었어요. 이 남자가 12월이 되면 얼마나 기억할 날이 많으냐며 갑자기 챙겨주는데 너무 슬펐어요. (웃음) 그땐 참 외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감동을 느낄까 했거든요. 소리를 내면 안 됐는데도 공항에 들어가서 혼자 꺼이꺼이 울었어요. (웃음)”

‘만년소녀’ 같은 솔직한 배우. 지난 인터뷰 기사 속에서 비슷한 단어들로 묘사됐던 김보경은 지금도 쾌활하게 웃고 쉽게 눈물 흘린다. 그런 까닭에 사진 촬영이 진행되던 중 돌연히 눈물을 찍어내 기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여름이 가기 전에>가 계기가 된 만큼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고 싶었어요. 민환을 바라보던 시선과 감정을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도 참 씁쓸하네요. (웃음)” 감수성이 풍부해 ‘감성의 여왕’이라 불린다는 매니저의 귀띔을 듣고나니 천생 배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눈이 내리면 눈이 온다고 주위 소중한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요. 제 문자를 계기로 잠시나마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태도 때문에 그 별명이 붙은 것 같고요.” 데뷔작 <까>부터 <여름이 가기 전에>까지 연기경력 9년에, 6편의 영화 출연작을 거느린 그녀는 이제 막 연기가 뭔지 삶이 뭔지 알았다고 말한다. <여름이 가기 전에>에서 선보인 연기가 한층 더 성숙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이 먹은 게 더 좋아요. 이제야 인생이 조금 보이는걸요.”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김보경은 현재 반향을 일으키며 방영 중인 MBC 드라마 <하얀거탑>에 출연하고 있다. 외과의 장준혁(김명민)의 애인이자 와인바를 운영 중인 지적이고 섹시한 강희재 역할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기로워지는 와인처럼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해 날마다 전진하는 그녀를 앞으론 더 자주 목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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