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보랏..> 1세계인의 오만과 무지에 치가 떨린다
2007-02-08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보랏…>에 숨어 있는 유대계 영국인의 정치적 자의식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는 미국에서 흥행에 이어 평단의 극찬을 받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불공정해짐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으로 공정해지는 종류의 영화’(<씨네21> 587호 55쪽)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흔히 <보랏…>의 조롱이 소수자(유대인, 동성애자, 여성, 제3세계인)를 경유하여 궁극적으로는 미국 중심 사회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로 호평을 내리며, 소수의 평자들이 미국 중심 사회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일어나는 소수자에 대한 조롱을 불편해하며 ‘양날의 칼’이자 ‘무차별적인 방식의 조롱’이라며 비판을 덧붙이는 추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보랏…>의 현실정치적 맥락은 그보다 훨씬 심오(?)하다. 조롱은 (무차별적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며, 온갖 비하발언 속에서 오직 유대인만이 ‘고상한 피해자’로 영광스럽게 부활한다. 결국 <보랏…>의 정치성은 놀랍게도 ‘유대주의’이다. 이는 비현실적 기표 ‘보랏’ 속 현실적 기의 ‘샤샤’의 정치적 지평- 유대계 영국인 이성애자 남성- 에 완벽하게 일치하며, 미국 평단의 이례적인 호평(미국 저널리즘계의 유대인 파워는 기지의 사실이다)과도 잘 부합된다.

유대인 샤샤의 (반유대주의를 우회한) 유대주의

유대인 샤샤가 반유대주의자 보랏이 되어 유대인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미국인들을 떠본다. 일종의 가면놀이를 통해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포착하겠다는 것. 일찍이 영화 <신사협정>(1947)은 비유대인이 유대인으로 가장하여 여러 가지 차별을 경험하는 것을 그려 ‘우리(미국) 안의 파시즘(반유대주의)’을 고발한 바 있다. 그런데 <보랏…>의 가면극은 균형점을 지나 반대편을 향해 달린다. 보랏의 ‘반유대주의’는 카자흐스탄의 전통이데올로기로, 유대인은 ‘알을 낳는 괴물’ 쯤으로 표상된다. 반유대주의는 유구한 것이지만, 작동 방식은 시대와 조응하게 마련인데, 보랏의 유대인 편견은 20세기 나치즘은 물론 루터나 셰익스피어 시대의 것보다 훨씬 올드하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보랏의 ‘반유대주의 편견’은 현재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효과를 갖지 못하며, 이를 통해 강변되는 효과는 그저 ‘유대인의 무고함’뿐이다. 보랏은 총기상에 가서 “유대인을 죽이는 데 적당한 총이 뭐냐?”고 묻는다. 보랏의 혐오 발언에 적극적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으면, ‘반유대주의자’가 되는 유도심문을 거는 것이다. 총기상이 “48구경”이라 답하는 순간 그는 극악한 ‘반유대주의’ 동조자가 되고 만다. 유대인 샤샤가 보랏의 가면을 쓰고 위악(僞惡)의 그물을 쳐서, 상대를 ‘반유대주의자’로 옭아매는 것인데, 이러한 혐오와 적대의 자작극을 통해 유대인은 광범위한 적대의 표적으로 재승인되며, 계속 희생자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 그런데 왜 ‘희생자 되기’가 필요할까? ‘보랏’은 ‘9·11 테러가 유대인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말한다. 미국사회에서 9·11 테러는 흔히 아랍인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는 명백한 반어이다. 그런데 이 반어는 더 깊은 맥락을 지닌다. 9·11 테러의 원인이 된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거나 미국의 대테러전쟁 중 벌어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레바논 침공에 대한 비판들 속에서 유럽에서 새롭게 논의되는 ‘반/유대주의’적 경향은 ‘9·11을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가학을 가장한 피학’의 언사 속에 난파되고 만다. (21세기 국제정치의 장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위치를 논하지 않고, 계속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자 경험을 되새김하는 유대인들처럼), <보랏…>은 90년대 이후 (유대인이 주류로 인정받으면서) ‘반유대주의’가 전면에 드러난 적이 없는 미국에서 ‘반유대주의-피해의식’을 새삼 소환하는 방식을 통해, 9·11 이후 유럽의 현실정치 맥락 속에서 차츰 거론되고 있는 ‘반/유대주의’를 격퇴시킨다(이는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비판을가하자,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졌던 최근의 정치현실과 부합한다). <보랏…>에서 유대인은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들과는 전혀 다른 취급을 받는다. 혐오 발언 등으로 조롱당하면서도 인정투쟁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들과 달리, 유대인은 온전한 재현 기회를 갖는다. 보랏과 아즈맛의 우스꽝스러운 망상에 대비되어, 가장 온화하고 교양있는 존재로 재현된 유대인 노부부는 ‘유대인의 무고함’과 ‘고결함’을 확신시킨다.

이성애자 샤샤의 게이-혐오증

게이혐오주의자인 보랏이 동성사회적(homo-social) 친근함으로 남자들과 입맞추려 하자, 미국인들은 기겁한다. <보랏…>은 ‘기겁의 제스처야말로 호모-포비아가 아니냐’고 꼬집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게이문화에 대해 무지하여 경계와 거리낌이 없는 보랏은 (자연스럽게 게이문화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게이의 행동을 가장 혐오스럽게 재현함으로써 게이혐오를 극대화한다. 보랏은 퍼레이드에서 게이들을 여럿 만나지만, 그들이 뭔지 몰라,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랏…>은 게이들의 목소리를 담지 않으며, 그들을 보랏의 항문을 파열시킨 자들로만 그린다. <보랏…>은 나아가 역겨운 씨름장면으로 게이 섹스를 연상케 하고, 두 남자가 벌거벗고 호텔 이것저곳을 뛰어다니는 장면을 통해, ‘어글리-게이’의 누명을 씌운다. 영화는 관객이 게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아름답게 보일 리 만무한 행동들을 펼쳐 보이면서, 관객이 ‘눈살을 찌푸리면 호모-포비아, 덤덤하면 가식, 웃으면 동의하는 것’이라는 딜레마에 몰아넣는다. 카메라의 입장은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데, 이 시선은 그들의 행위가 ‘악’이라는 것을 전제로, 그들의 무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애초에 비판하려는 듯했던, 미국사회의 ‘호모-포비아적 몸조심’은 오히려 복권된다. 삼가고 경계하지 않을 때 펼쳐지는 괴상망측한 꼴을 통해, ‘게이(문화)에 대한 단호한 선긋기’가 필수적임을 역설하는 셈이다. 영화가 게이(문화)에 대해 생생한 화면으로 재현하는 바는 ‘추악하다’이며, 이러한 편견은 (유대인의 경우와 달리) 터무니없음으로 인해 저절로 붕괴되거나, 멀쩡한 게이의 출현에 의해 바로잡아지지 않는다. 미국사회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유대인 차별보다 심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정치적 공정함’으로 지양되지 않는다.

남성 샤샤의 여성비하

보랏이 여성을 만나는 모든 방식은 성적 관계이며, 성관계와 성매매와 성폭행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고향은 강간과 매춘의 왕국이고, 미국에서 운전하는 여성들은 강간의 대상이며, 실제 맺어지는 여자는 흑인 창녀이다. 그는 여성단체를 인터뷰하거나, 식사예절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섹시한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그 기준에 의해 가장 높이 평가되는 파멜라 엔더슨에게 반하지만, ‘처녀가 아님’을 알고 좌절하고, 다시 용서(?)하여 최상의 선물, 납치(보쌈)를 강행한다. 혹자는 흑인 창녀와의 결혼을 따뜻하게 보기도 하지만, 실은 여전히 남성 우월주의적 방식의 결합이다. 미국인인 그녀를 자신의 ‘이상한 나라’로 데려와 사는 것을 대단한 수혜인 양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모든 성차별주의의 책임을 카자흐스탄이라는 제3세계로 돌린다. 이러한 전략은 1세계 남성들에게 이중으로 유효하다. 비서구사회의 전통문화를 방패삼아, 1세계의 페미니즘을 ‘유별난 것’으로 상대화해 평가절하하고, 3세계를 ‘여성-지옥’으로 표상함으로써 1세계의 도덕적 우월함을 확증하는 것이다.

유럽인 샤샤가 바라보는 미국 주류사회

<보랏…>이 그나마 정치적으로 공정해 보이는 측면은 미국 주류사회에 대한 비판 때문이다. 로데오 경기장에서 그는 ‘이라크전을 지지하며, 씨를 말리기를 원한다’고 웅변하며, 미국 국가에 ‘카자흐스탄 최고’라는 노랫말을 붙여 부른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 잘 이루어진 장면이다. 그런데 과연 비판의 주체는 누구인가? 90년대 이후 구소련과 동구권이라는 ‘공동의 적’을 잃은 유럽과 미국은 더 이상 동맹체가 아니다. 영국까지도 견제되지 않는 미국의 팽창주의에 거북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유럽 주류사회의 정치적 감수성이다. 미국 주류사회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오순절교회 장면에 있다. 80년대부터 미국 서남부를 중심으로 급성장하여, 공화당의 신정(神政)정치의 토대가 되기도 하는 이 교회에서 창조론을 강변하고 방언을 읊는 미국인들은, 서구 지성의 적자임을 자부하는 서유럽인이 보기에 천박하고, 유대인이 보기엔 (언제 ‘반유대주의’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뜨악하다. 위 두 장면은 미국 주류사회에 대한 비판이긴 하나, 그 시각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 전반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괴상한 졸부의 나라’에 대한 유럽인의 냉소로 읽을 수 있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이자 몰라도 되는 나라 카자흐스탄?

첫 자막부터 ‘카자흐스탄 정보통신부 제공’으로 나오며, 마지막 크레디트까지 구소련 국가의 관제영화 흉내를 내는 이 영화는 시종 ‘카자흐스탄영화’임을 위장한다. 물론 위장 자체가 나쁜 것 아니다. ‘스리랑카에서 온 블랑카’가 타자의 목소리를 빌려 한국사회를 비판하였듯, ‘카자흐스탄인 보랏’이 시선의 역전을 통해 미국사회의 비판을 수행했더라면, 훌륭한 풍자코미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랏은 자신의 온갖 저열한 행동으로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자신의 저열함을 ‘카자흐스탄’의 이름을 빌려 정당화한다. 위악(僞惡)의 알리바이이자, 반문명(反文明)의 참조사항으로 끌어들여진 ‘카자흐스탄’이라는 오명(汚名)은 끝내 복권되지 않는다(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 최근 인종차별문제가 불거진 영국 리얼리티 쇼 <빅브러더>에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국인 ‘샤샤’에 의해 미국 속으로 던져진 ‘카자흐스탄’이라는 화두는 수많은 미국인들 사이를 떠돌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고 질문되지 않은 공백으로 남았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 ‘제국’을 표방하는 그들에게 ‘카자흐스탄’은 아무도 모르는 나라이자 몰라도 되는 나라이다. 1세계인들의 오만과 무지와 사악함에 치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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