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영화를 ‘즐감’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보면서 웃었다 울었다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젠가부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각성이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필터처럼 끼워지더니 이제는 그 ‘정치적 올바름’의 상투성이나 위선까지 감식함으로써 불경하기 짝이 없는 영화의 ‘전복성’을 끄집어내 열광할 수 있어야 진정 수준있는 관객으로 거듭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건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이나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그래서 내가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를 보고 곤혹스러웠냐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거 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선배가 제일 많이 웃던데요”라고 옆의 후배가 대꾸했으니 피해갈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전투적인 풍자정신과 전복적 성향에 환호했다고 둘러댈 만큼 내가 ‘위선적’인 건 아니다. ‘정말 그렇게 많이 웃었나, 내 웃음소리가 그렇게 튀었나’ 전전긍긍하던 나는 이 영화를 지난해 개봉작 10대 영화에 꼽았다는 <AFI>의 뉴스를 보고야 안도의 급한 숨을 내쉬었다.
고백하자면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홀딱 벗은 두 남자가 엎치락뒤치락 싸우다가 아즈맛의 거대한 엉덩이가 보랏의 얼굴을 깔고 앉았던 장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보랏의 코 바로 아래서 갈라지던 엉덩이 중앙부의 실루엣- 이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아즈맛에게 보랏이 던진 “아직도 내 입에서 네 똥구멍 냄새가 가시지 않아”라는 대사와 쌍을 이뤄서 말이다. 이 영화를 격찬한 외지들의 리뷰를 보니 이 장면을 언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 사샤 바론 코언이나 평론가들이 무엇을 봤건 나는 이 영화에서 슬랩스틱코미디와 궁극의 화장실 유머에 열광했던 것이군. 그럼 나는 저질 관객이고, 이 영화에서 풍자와 전복성을 읽은 관객은 수준있는 관객이 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매너고 어디부터가 진심이며, 어디까지가 불경이고 어디부터가 전복인지 가늠하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내게 <보랏…>이 그저 농담이 아닌 의미가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지난해 <가디언>에서는 이 영화가 공격하거나 놀리는 부류의 사람들- 유대인 작가, 학자, 흑인 저널리스트 등 근데 다 엘리트다, 물론 영국인이고- 을 대상으로 이 영화의 논란에 대해서 인터뷰했는데 모두들 여유있고 너그러운 답변을 해줬다. 반면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 영화의 상영에 반대하기 위해 부시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가 서구인들의 너그러운 반응에 한발 물러나 “코언을 카자흐스탄에 초청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계속 화를 냈다면 웃겼겠지만 입장을 선회하니 슬퍼졌다. 이 영화가 공격한 미국인들의 이중성과 교만함을 비웃기보다 상처받고도 별거 아니라고 웃어야 하는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카자흐스탄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