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다큐 PD가 영화감독으로 인생의 자리를 옮긴 이유
사회의 순정을 믿는 이 감독이 새삼 궁금해졌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새로 소개하고 아는 사람에게는 환기시킬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스스로를 “단순무식하다. 겁이 없고, 뻔뻔하고, 통속적이고, 신파적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할 수 있는 거다. 의외로 계산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혹은 “원래는 진짜 생날라리다. 방송사 들어가면서부터 의식적이 된 것 같다. 내가 나를 어떻게 알겠나. 남들이 보는 내가 다 나겠지”라고 소탈하게 말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방송사 프로듀서를 12년이나 하고 나서야 충무로 감독이 되었다. 중앙대 영화학교를 나왔으니 학교를 졸업하고 충무로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였겠지만 그러질 못했다. 대학원에 떨어지고 나서 군대에 끌려갔고, 제대 한달을 남겨놓은 무렵 학교 선배인 강제규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를 준비 중인데 시나리오도 같이 쓰고 조감독도 하련?”이라는 제안이었다.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방송사에 들어갔다. 방송사에 들어가고 나니 국장님께서 말하기를 “너는 내성적이니 교양쪽에 가서 교양을 쌓아라” 해서 교양 프로그램 일을 하기 시작했고, 기획 특집부에 배치되어 프로듀서를 그만둘 때까지 다수의 프로그램을 했다.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그중에는 메인 프로듀서 데뷔 프로그램인 <한밤의 TV연예>도 있고, 경인 방송국 시절 영화방송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 뒤로도 각종 교양 및 휴먼 다큐멘터리인 <우리 집 이야기> <여섯 명의 여자> <추적 사건과 사람들> <제 삼의 눈> 등을 거쳤다. 그때를 박진표 감독은 이중의 느낌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때 얻은 많은 자료들을 갖고 있다. 정말 수천명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고, 싫다는 사람 붙잡아놓고 인터뷰하기도 했고, 남을 도와주겠다는 의도 아래 또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이 밑바탕이 되어서 지금 내가 있는 거니까 감사한 경험이다. 그것들이 내가 만드는 영화의 밑거름이 된다. <죽어도 좋아>도 <너는 내 운명>도 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들의 주인공들이지 않나.” 그러나 방송 다큐멘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갈망은 식지 않았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그런 시각을 갖고 있되 결국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 극영화”라고 판단했다. “물론 엄청난 책임을 느끼기는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이나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나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 좋았다”는 것이다. 그게 방송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박진표가 영화감독 박진표로 인생의 자리를 옮긴 이유다.
감독이 밝힌 ‘내 영화 속 오마주 퍼레이드’
새삼 모르던 사실들도 알게 되는데, 박진표 감독이 밝히는 내 영화 속 오마주 퍼레이드가 그것이다. “<그놈 목소리>에서 김영철씨가 벌거벗겨져서 버려져 있는 건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오마주다. 그리고, 설경구가 주기도문 외우면서 막 뛰어가는 장면 있지 않나. 사실은 시나리오 다 써놓을 때까지 몰랐고, 나중에 (설)경구가 말해줘서야 알게 된 건데, 그건 <오아시스>의 한 장면하고 비슷하다. 무의식의 오마주라고 해야 할 거다. 아니, 시나리오 써서 이창동 감독님에게도 보내드렸는데 그때 모른 척하셨더라. 나중에 경구한테 들었더니 그 영화에서 경구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막 뛰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잘 안 들려서 그렇지 그것도 주기도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모르긴 했는데, <너는 내 운명>에서 면회실 장면은 의도적으로 <오아시스>에서 종두가 나무 위에 올라가는 장면을 생각했었다. 하나 더 말하면, <그놈 목소리>에서 설경구가 범인에게 밥먹고 30분 뒤에 통화하자고 하는 건,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에 대한 오마주인 거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오마주에는 별 애착이 없어 보이는 박진표 감독이 자기 영화 속 오마주를 열거할 때 일단은 그걸 듣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 영화의 장면들에 존경을 바치고 싶었다는 뜻으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열거한 영화들이 맺고 있는 일종의 지형에 자신의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듣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가 열거한 영화들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윤리의 얽힘과 때로는 사회적 순정의 실패에 대해서 각자 자기 방식대로 표현한 영화들이다. 박진표 감독은 지금 그중 하나로서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는 걸 우회하여 설명하는 셈이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회가 보인다
그런 영화들일수록 영화 스스로 혹은 감독 스스로 던지는 질문들이 많게 마련이다. 나는 왜 이 소재에 끌린 것일까. “그 질문? 매번 한다. 왜냐하면 정말 괴로우니까. 나 스스로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교양국에 입사하면 가자마자 교육받는 게 기획안을 만드는 거다. 그게 통과가 되어야 돈도 나오고 프로그램도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작업을 내 이름을 걸고 몇 십편을 했으니까 퇴짜 맞은 아이템까지 포함하면 100여편도 넘을 것 아닌가. 그 기획안을 쓸 때 윗사람들이 가장 집요하게 물어보는 게 왜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내 나름의 논리를 만들지 못하면 일단 통과가 안 된다. 그렇게 한 12년 하니까, 지금도 어떤 영화를 만들고자 할 때 스스로 단순명쾌하게 물어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대답을 못하면 스스로 통과가 안 된다. 그냥이라는 게 통과가 안 되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쉼없이 말하고 나서 옆사람에게 묻는다. “정말 나 왜 그러는 거지? (웃음)”
대답은 다시 본인이 한다. “기왕 영화 하는 거 남들 안 하고 하기 싫어하는 이야기, 남들이 못하는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한명쯤은 있어도 될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회가 보일 것 같다. 사람이 보이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거다. 음… 이럴 때 (말 잘하는) 박찬욱 감독님은 뭐라고 하실까?” 박진표 감독이 추구하는 건 <그놈 목소리>에도 버젓이 나와 있다. 주인공 한경배의 가훈 “끝까지 폼나게. 아님 말고”는 그의 신조이기도 하다. “나는 폼나게 살고 싶다. <달콤한 인생> 메인 카피가 끝까지 폼나게인가 뭐 그렇다. 그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내 인생의 모토로 삼기로 했다. 폼나게 산다는 건 내가 후회없다라는 뜻이지 않나. 뭘 하고 살아도. 내가 후회가 없고, 두려움이 없어야 폼나는 거잖나. 거기다가 찬욱이 형의 ‘아님 말고’를 붙여서 아님 말고! 그것도 역시 나는 후회없어라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것에는 엄청난 책임감이 따르겠지만….”
어떤 말 뒤끝이었을까. 박진표 감독은 불쑥 이게 영화 속 소품으로 나왔던 형호의 사진이라며 동그랗게 오려 지갑 안에 지니고 다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만지지도 못하게 슬쩍 뒤로 뺀다. 마치 유품을 신중하게 모시듯이. 그걸 보니 그가 대상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언뜻 스친다. “한국 감독들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전부 영화가 사람하고 똑같이 나오는 것 같다”는 그 자신의 말에 박진표 감독은 스스로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자신도 영화만큼 투명하고 싶다는 뜻일 수 있겠다. 이 짧은 박진표 스토리로 아직 그를 다 이해하기란 힘들지만, 역시 그의 말에 빗대어보면 이렇다. “사람은 모두 백인백색이고 남들이 보는 나도 나”일 테니, 오늘이 1가지 소개라면 앞으로 99가지 그에 대한 소개가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