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달 동안 협상을 한 끝에 이오지마 방문 허가를 받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검은 모래로 덮인 해변에 앉아보았다. “해변에는 자그마한 일본군 분대와 미국인 비행사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해변에 앉아 있노라니 섬으로 상륙해오는 군대와 폭력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오지마, 한자 발음으로 유황도(硫黃島)는, 1945년 2월16일부터 한달 남짓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되었고 전후(戰後) 일본군 2만명이 묻힌 성지로 여겨지는 섬이었다. 비행기와 전함을 이용해 사전폭격을 퍼부었던 연합군은 상륙만 한다면 며칠 안에 그 섬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일본군은 거의 모든 병사가 전사하거나 옥쇄할 때까지 저항했고, 전투는 쿠리바야시 중장이 최후의 300명을 이끌고 옥쇄나 마찬가지인 돌격 작전을 감행한 3월26일에야 끝이 났다. 연합군까지 2만8천여명에 달하는 군인이 유황 냄새에 휩싸인 채 전사한 그 섬의 전투.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이오지마 모래밭에 묻힌 목숨들을 기억하며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까지도 돌아보는 영화다.
두편의 영화가 탄생한 건 철저한 자료조사의 결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이스트우드는 제임스 브래들리와 론 피어스가 저술한 <아버지의 깃발>을 읽고 판권을 탐냈다. 제임스 브래들리의 아버지 존은 이오지마의 스리바치산에 성조기를 세우는 사진으로 유명해진 군인 중 한명이었지만 그 기억에 관해서는 한번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죽었다. 브래들리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했고 “모두가 그 사진에 대해 알고 있지만 누구도 그 이야기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사진에 찍힌 여섯 군인들- 그중 셋은 이오지마에서 전사했다- 은 40년이 지난 뒤에야 혼돈과 죄의식 속에 버려진 젊은이들의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이스트우드는 바로 그 점에 매혹됐다. “그 책엔 다양한 스토리라인이 존재했다. 군인들은 그저 깃대를 세웠을 뿐이지만 그들을 찍은 사진은 1945년의 아이콘과도 같았다. 그들은 갑자기 전쟁터 밖으로 나와 영웅으로서 홍보 여행을 했다. 열아홉, 스물 무렵의 젊은이들이라면 감정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이스트우드보다 앞서 판권을 샀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여 노장에게 원작을 양보했고, 이오지마 전투는 40년의 세월을 거슬러 검은 모래밭 사이로 스민 핏자국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의 시나리오작가 폴 해기스는 “이스트우드는 자료조사하는 일을 정말 좋아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이오지마 전투에 관련한 온갖 책을 다 읽었다”고 말했다. 이스트우드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묵묵히 산속을 파고들어가는 또 한편의 영화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이오지마 사령관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당시 일본군 고급장교들과 다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해변에 참호를 파거나 해상에서 포격을 할 줄만 알던 지휘관들과 다르게 유황과 소금기를 무릅쓰고 29킬로미터에 이르는 지하터널을 파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명예로운 옥쇄가 아닌, 끝까지 살아남을 것을 명령했다. 이오지마 전투를 조사하던 이스트우드는 쿠리바야시에게 흥미를 느꼈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고 영리한 방법으로 이오지마를 지켰는지 궁금해졌다”. 이스트우드는 쿠리바야시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사령관이 보낸 그림편지>를 읽으며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보낸 <사령관이 보낸 그림편지>는 쿠리바야시가 스케치와 함께 적어보낸 다정한 사연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그 편지들이 보여주는 쿠리바야시는 미국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을 아꼈고,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 이스트우드는 그가 친구로 여겼던 미국인들과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당시 이오지마에서 복무했던 니시 다케이치 중령도 그런 인물이었다. LA올림픽 승마 금메달리스트였던 니시는 ‘바론 니시’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오지마에 상륙했던 미군 장교 중에도 친구가 있었다. 게다가 일본 군대는 본토 공략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이오지마에서 죽어야 한다고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이스트우드는 나이 어린 젊은이들이 느닷없이 영웅이 되어버린 미국에서의 모순과 함께 일본에서의 아이러니도 발견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누구나 전사할 수 있지만 무사히 집에 돌아갈 거라고 믿곤 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렇지 않았다.” 사방으로 뻗은 터널 안에 갇혀, 포성을 들으며 무서워했을 어린 군인들. 이스트우드는 해변에 세웠던 카메라를 돌려세워 이오지마 근해를 둘러싼 함대를 보여주며 그들의 공포를 함께 느끼도록 해준다.
참전 군인처럼 폭격의 공포를 느낀 미군 배우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유황 가스가 새어나오는 외로운 섬을 떠나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남서쪽에 위치한 반도 레이캬네스로 향해야만 했다. 일본 정부는 성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하루 동안 촬영을 허가했기 때문에, 이스트우드는 발굴단이 군인들의 유물을 발견하는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도입부만을 찍을 수 있었다. 유황을 뿜어내는 7월과 8월 레이캬네스는 다행히 2월의 이오지마와 기후가 비슷했지만 지형은 달랐다. 아트디렉터 잭 테일러 주니어는 “일본군이 이오지마 해변에서 몸을 숨겼던 벼랑을 다시 만들기 위해 검은 모래 약115만세제곱미터를 퍼날랐다. 그리고 230여미터에 걸쳐 약4.5미터에 달하는 모래를 쌓아올려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고원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브래들리와 동료들이 성조기를 세우는 순간의 배경, 와이드하게 펼쳐지는 폭격장면 등은 CG를 사용해 이오지마의 능선을 쌓아야만 했다. 그 위에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작곡한 서글픈 노래를 불러주었다. “바이브레이션을 전혀 사용하지 말고, 마치 군대 나팔소리처럼.” 단순한 연주를 고집했던 이스트우드는 새미 소사와 줄 스타인의 분위기를 차용하여 아련한 향수로 이오지마 해변을 추억한다.
“판타지보다는 내게 중요한, 내게 다가오는 현실”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는 이스트우드는 배우들에게도 직접 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라이언 필리페를 비롯한 미군 배우들은 해병대 캠프에 가지 않고, 기초 훈련만 받은 채 곧바로 전쟁터에 투입된 군인들처럼 준비되지 않은 폭격에 직면해야만 했다. 필리페는 “우리는 어느 방향에서 폭약이 터질지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군인들이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공포를 체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지가 잘려나가는 동료들을 지켜보고 방향도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오는 총탄과 폭격을 직면해야만 했던 군인들에게 그러한 공포는 어쩌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모두 호평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금을 울리는 리뷰 중 하나는 켄트 존스가 <필름 코멘트>에 쓴 리뷰일 것이다. “1946년, 나는 길을 걷다가 문득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모르는 사이 나는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적을 위해 울었다. 내 아버지가 분노 섞인 혼란에 휩싸여 노트에 남긴 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것을 발견했고, 이 두편의 영화, 참을성 있으며 비겁하게 외면하지 않고 감상적이기도 한 두편의 영화에서, 그 울림을 들었다.” 이스트우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모든 아버지들의 아들에게 아버지가 세웠던 깃발과 과거로부터 날아온 편지를 전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