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그랜트의 매력을 설명하기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천연’(天然)이라고 할 수밖에. 눈앞의 난처함에서 도망가려는 듯 수시로 깜박이는 눈꺼풀, 아무리 쓸어넘겨도 책받침이라도 문댄 것처럼 금세 부스스하게 뜨는 머리카락, 손가락으로 잡아내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살짝 처진 눈꼬리와 큰 각오를 하겠다고 앙다물기에는 너무 얇은 입술은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곤란합니다, 곤란해요, 정말 믿을 수 없어요”라는 식의 소극적인 대답을 기대하게 만든다.
고의가 아닌데도 꼭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이 구제불능의 남자는, 그래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큰 사고를 연달아 만들어낸다. 젊어서는 로맨스 소설을 각색한 영화들에 출연한 적도 있는 이 귀족적인 영국 남자는, 한때 창백할 정도의 피부색과 다소 거만해 보이는 말투, 포커페이스 같은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헤집고 다녔다. 홍안의 젊은이였던 그 시절의 그와 지금의 휴 그랜트의 간극은, 추락이라고 해야 할까, 변신이라고 해야 할까, 성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그랜트와 같은 난처한 표정으로 만들어놓는다.
그가 받는 개런티의 액수가 급증한 사실로만 치면 성공이지만, 로맨스의 주인공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주인공이 된 사실은, 나이를 먹으면서 그의 카리스마가 얇은 머리카락으로 증발하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우려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니 그의 ‘천연’은 공교롭게도 연기 생활을 하면서 그가 만들어낸 모습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면서 눈에 힘 주고 포효할 수 있는 연기를 선택하는 대신, 건들거리며 여자에게 치근대고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가벼움을 선택했다.
“휴 그랜트는 대단하다. 그랜트의 재능은 그 가벼움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종류의 재능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에서 휴 그랜트와 호흡을 맞춘 콜린 퍼스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국산(産) 로맨틱코미디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영화들에 줄줄이 출연했으면서도, 휴 그랜트는 출연작들에서 비슷비슷하게 게으르고 세상사에 시큰둥하고 얼마간 경박하며,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복제하는 듯한 인물들에 출연해왔다. 연기력은 그의 연기를 논하는 기준이 된 적이 없지만, 그 발가락이 닮은 연기들은 영화를 거듭해도 질리는 법이 없다. 실제로 그의 출연작들이 한결같은 휴 그랜트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휴 그랜트 연기의 전환점은 뭐니뭐니해도 <브리짓 존스의 일기>였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나인 먼스> <노팅힐> 등의 작품들에서 휴 그랜트는 로맨틱코미디의 ‘착한’ 남자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로 치면 다아시 씨에 가까운 역할들로 그는 로맨틱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역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로맨틱코미디의 ‘나쁜’ 남자로 변신한다. 이전까지 지나치게 평범하고 소박하고 소심해서 남자친구 감으로 꺼려지는 면이 있던 역할들을 주로 맡았다면, 그 뒤로는 몹시 뺀질거리고 느물거려서 남자친구로 믿고 만나기엔 꺼림칙한 역할들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변신에 대한 휴 그랜트의 말은 단순하다. “그맘때 나는 착한 남자 역할이 좀 지겨워졌고 세상 사람들도 착한 남자 휴 그랜트에게 약간씩 위장에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악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는 10대와 대학 시절, 사회생활에 걸쳐 머리 좋고 매력있고 유머감각이 있는 인기있는 남자였을 거다. 그러니까 여자들을 사귀기도 쉬웠을 것이고. 하지만 그에게도 삶의 가을이 온 거다.”
불치병에 걸려 평생 단 하나뿐인 사랑을 부르짖거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불면의 밤을 지새며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심장 벌렁대는 운명적 페르소나는 그의 것이 아니다. 그저 여자를 끝없이 웃게 하고, 때로 열받게 하며, 그러면서도 결국 사랑하게 만드는 귀여운 남자가 바로 휴 그랜트의 숙명이고, 그가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로맨틱코미디의 대명사로 사랑받는 이유다.
숫자로 보는 휴 그랜트
개런티 추이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10만달러
<미키 블루 아이즈> <노팅 힐> 750만달러
<투 윅스 노티스> 1250만달러생년월일 1960년 9월9일
키 180cm
배우로 출연한 총 작품 수 50편
카섹스를 하다 LA 경찰에게 걸린 횟수 1회
당시 냈던 벌금 액수 1180달러
모델 출신 배우 엘리자베스 헐리와 사귄 기간 1987~2000년
<러브 액츄얼리>에 함께 출연했던 사촌 토머스 생스터와의 나이 차이 30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