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석탄재가 흩날리는 탄광촌에서 빨간 술이 달린 복장의 소녀들이 훌라춤을 춘다. 사라져가는 탄광의 어두운 그림자 뒤로 눈물을 머금은 소녀들의 훌라 공연이 펼쳐진다. <69 식스티 나인> <스크랩 헤븐> 등 주로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던 이상일 감독이 1965년 일본의 3대 탄광촌 중 하나인 이와키시로 돌아가 감동과 눈물의 사연을 스크린에 재현해냈다. 다섯 번째 작품 만에 일본의 관객과 비평의 지지를 동시에 받은 이상일 감독, 그리고 그 주인공 <훌라걸스>. 2006년 일본 영화계를 사로잡은 영화 <훌라걸스>의 인기 비결을 살펴보았다. 더불어 영화 홍보차 한국을 찾은 이상일 감독과의 인터뷰를 전한다.
재일동포 이상일 감독의 신작 <훌라걸스>가 2006년 한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씨네콰논이 4억5천만엔의 순제작비로 만든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씨네콰논 체인 극장을 중심으로 100개관에서 상영됐고, 상영이 끝날 때가지 100개의 스크린 수를 그대로 유지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개봉 첫주가 지나면서 스크린 수가 크게 줄어드는 것과 달리 <훌라걸스>는 입소문을 타고 높은 좌석 점유율을 끝까지 지켰다. 총 흥행수익은 15억엔. 일본의 영화평론가 오타카 히로오는 <훌라걸스>를 2006년 일본영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들며 “오랜 공을 들인 기획과 적정한 규모의 예산, 감독의 연출이 조화를 이룬 성공작”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2007년 일본아카데미영화상 11개 부문 수상을 비롯해서 일본의 영화전문지 <키네마준보>가 선정한 ‘일본영화 베스트10’ 중 1위에 선정됐고, 일본 영화기자들이 선정하는 블루리본상에서도 작품상, 여우주연상(아오이 유우), 여우조연상(후지 스미코) 등을 수상했다.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평균 이상의 성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는 이상일 감독의 전작 <69 식스티 나인>과 <스크랩 헤븐>이 흥행과 비평에서 신통치 못한 반응을 받았던 것과 대조되는 점이다.
친숙한 화법으로 대중과의 거리감 좁힌 이상일 감독
<훌라걸스> 이후 이상일 감독은 확실히 일본 영화계의 주요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듯 보인다. <키네마준보>는 ‘일본영화 베스트10’ 선정 발표와 함께 밝힌 논평에서 <눈에게 바라는 것>의 네기시 기치타로 감독과 함께 <훌라걸스>의 이상일 감독을, TV드라마 연출자 출신의 감독이 양산되는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 주목해야 할 감독이라고 설명했다. <훌라걸스>가 2007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의 일본영화 대표작으로 출품된 것도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일 감독은 재일동포의 문제를 담은 데뷔작 <청> 이후 소외된 자들을 주인공으로 사회의 불안과 가치관의 충돌을 그려왔다. <훌라걸스>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은 영화다. 다만 이상일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전작과는 다른 색채의 화법을 구사한다. 친숙한 이야기 구조, 유머와 눈물이 조화를 이룬 감정의 균형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좋든 나쁘든 이상일 감독의 영화가 일본의 대중과 좀더 가까운 위치에서 소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훌라걸스>는 이상일 감독이 성취한 새로운 영화적 정점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훌라걸스>의 비평적 성공 뒤에는 현재 일본 영화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대작, TV, 드라마, 트렌드’라는 요소들의 반대효과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평 안에서도 이질적인 논점들이 다양하게 얽혀 있고, 대중적 성공 뒤에는 역설적이게도 트렌드에 대한 적절한 편승효과가 결합되어 있다. 네기시 기치타로 감독이 작품 자체로 순수하게 주목받는 감독이라면, 이상일 감독은 이전과는 다른 작품의 입지 안에서 ‘다시 주목받는’ 감독인 것이다.
영화는 1965년 일본의 탄광촌 이와키시에서 시작한다. 에너지의 흐름이 석탄에서 석유로 이동하면서 이곳의 탄광도 위기에 처한다. 1950년 6·25전쟁 특수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던 탄광이지만, 1962년 이후 시작된 에너지정책의 변화가 탄광촌에 크나큰 혼란을 몰고온다. 2천여명의 광부가 정리해고되고, 이와키시는 레저산업 발전계획을 발표한다. 무너져가는 지역산업을 풍부한 온천을 이용해 이겨내겠다는 것이다. 1964년 조반유모토온천관광주식회사가 설립되고, 다음해인 1965년 조반음악무용학원이 문을 연다. 1966년 1월15일에는 조반하와이안센터가 오픈한다. 석탄을 캐며 하루하루를 살았던 주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삶에 적응하거나 도태된다. 기회가 좋아서 레저 관련 회사에 재취업한 사람들은 그렇게 새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지만, 아무런 대답없이 해고통지서를 받은 이들은 막막한 하루를 시커먼 탄광 속에서 보내야 한다. 과거와 미래, 시대의 비극적인 딜레마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낸 이들도 있다. 하와이안센터에서 모집한 훌라댄서에 지원한 소녀들. 당시 훌라댄서는 ‘발가벗고 춤추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인식과 하와이안센터는 이와키 탄광의 모든 걸 앗아간 존재라는 오해를 등 뒤로 소녀들은 자신의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오해와 갈등, 시련과 극복이 깊은 굴곡을 이루는 실화가 영화 <훌라걸스>의 모태다.
눈물, 따뜻한 이야기, 아오이 유우 댄스의 흡입력
1960년경 지방도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훌라걸스>는 <박치기!>를 연상시킨다. 소녀들이 서로 힘을 모아 하나의 목표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힘냅시다>와 <스윙걸즈>가 떠오른다. 영화평론가 모리 나오코가 평한 것처럼 <훌라걸스>는 “좋게 말하면 ‘맛있는 것들의 조합’이고, 나쁘게 말하면 ‘약삭빠른 안전빵’”이다. 소외된 자들의 성공담이 도식적인 이야기틀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차례대로 진행된다. ‘훌라걸스’의 주축이 되는 인물 기미코(아오이 유우)를 중심으로 나름대로 사연을 간직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무난하게 흘러간다. 따라서 다소 광범위한 이야기의 흐름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훌라댄스 장면과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에서의 눈물은 관객을 위한 서비스로 느껴진다. 실제로 일본의 영화전문비평 사이트 ‘초영화비평’은 이 영화에 100점 만점 중 60점을 주며 “탄광촌의 여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완전히 다른 산업에 뛰어드는 용기담은 상쾌하지만, 연출은 조금 산만한 인상을 준다”고 평했다.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점에 대해서는 “군상극이라고 하기엔 가볍고 캐릭터의 성격도 어중간하다. 경쾌한 코미디로 나아가야 할지, 중압감있는 군상 감동극으로 나가야 할지, 헤매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영국의 ‘패자부활전류’의 영화들과 비교하면 조금 서투른 솜씨”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훌라걸스>는 어떻게 일본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이는 최근 일본영화의 흥행 경향인 ‘울리는 휴먼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2004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흥행 이후, 일본에서는 눈물이 있는 따뜻한 이야기가 하나의 흥행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겨울연가> 이후 시작된 한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2006년 30억엔 이상의 수익을 올린 도호의 흥행작 <눈물이 주룩주룩>도 동명의 애창곡을 모티브로, 노스탤지어가 강한 눈물 드라마였고, 2007년에 개봉할 예정인 영화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그때는 그에게 안녕>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등도 눈물을 겨냥한 멜로드라마다. ‘초영화비평’은 <훌라걸스>의 울리는 대목에 대해 “한국영화 수준의 장황함으로 점철되어 있고, 영화 중반 이후 1시간을 계속 그렇게 지속한다. 극중 사용된 음악도 그야말로 ‘울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이상일 감독이 대중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발판이다. 이에 대해 이상일 감독은 “눈물을 강요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게 어렵지만, 대부분 생리적인 밸런스 감각으로 연출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극중에서 기미코가 하와이안센터에서 멋지게 솔로 댄스를 해내는 장면에 대해서도 ‘초영화비평’은 “춤을 잘 추는 아오이 유우의 원맨쇼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멋지게 장식했지만, 그 시간이 쓸데없이 길고, 너무 나아갔다”고 평가했지만, 동일한 장면에 대해 우쓰미 요코는 “정면에서, 위에서, 옆에서, 여러 각도에서 아오이 유우의 훌라댄스를 보고 있으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저절로 그녀의 엄마에 대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훌라걸스>는 단순한 성공 이야기를 넘어 엄마와 딸의 승리를 담은 영화”라고 호평했다. <훌라걸스>의 댄스장면은 어떤 의미에서 과시의 정도가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 이상일 감독의 말처럼 “영화적인 필연”이거나, “보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장면”의 연출일 수도 있다.
세심한 고증과 손맛, 이상일의 첫 기획영화
반면 <훌라걸스>가 비평계의 환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세심하게 공을 들여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고증과 준비 뒤에 영화를 찍기로 유명한 야마다 요지 감독은 모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훌라걸스>는 젊은 감독이 역사적 이야기를 세심하게 고증하고, 완성해낸, 손맛이 묻어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일본의 일반적인 영화 촬영기간은 1개월에서 1개월 반이지만, 야마다 요지 감독은 촬영에 3∼4개월을 소요한다. <훌라걸스>의 촬영기간은 약 2개월이다). <훌라걸스>는 유명한 원작을 바탕으로, 인기있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TV방송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TV채널을 통해 영화의 홍보에 몰두하는 최근의 일본영화와 방향을 달리한다. 씨네콰논의 이봉우 사장이 기획한 이 영화는 2004년 구상에 들어가 완성까지 2년이 넘게 소요됐다. 1965년 혼슈 지방의 조반 탄광을 재현하기 위해 영화의 제작진은 당시의 자료와 사진은 물론 타 지역의 집을 탐방하고 그 소재를 이용했다. 이상일 감독은 “현재 혼슈 지방의 탄광촌에는 주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도호쿠 지방에 가면 주택가가 더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사정상 촬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호쿠 지방의 집을 한채 해체하고, 그 재료를 가져와서 다시 집을 구성했다”며 경비가 허용하는 한 최대한 리얼하게 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하나와 앨리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킬 빌> 등의 미술감독 다네다 요헤이는 <훌라걸스>에서 하와이와 탄광촌이라는 두개의 극적인 공간을 ‘쇼와 40년’이라는 동일한 세계관으로 연결시킨다. 당시 알루미늄 섀시, 인조잔디 등이 부재했다는 사실을 고려, 주택이나 연습실 등을 전부 목재와 자연소재로 완성했다. 동시에 영화를 구성하는 인물들의 환경도 당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적으로 새롭게 구성됐다. 쇼치쿠가무극단인 SKD 단원을 모델로 한 ‘훌라걸스’의 선생 마도카(마쓰유키 야스코)가 대표적인 인물. 마도카 선생의 실제 모델은 현재 조반음악무용학원의 최고 고문직을 맡고 있는 가레이나니 히야카와다. 어린 시절 발레의 경험을 바탕으로 1956년 하와이에서 폴리네시안 민족무용을 배우고, 1965년 조반하와이안센터의 초청으로 훌라 쇼의 구성과 연출, 안무를 맡았다. 하지만 이상일 감독은 마도카를 부모님의 빚을 갚기 위해 도쿄에서 내려온 댄서로 설정했다. 진부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함이다(제작사인 씨네콰논은 일본을 제외한 나라에서 상영하는 필름을 120분에서 110분 버전으로 편집했고, 여기서 마도카 선생의 과거에 해당하는 부분이 대부분 삭제됐다). 훌라댄스를 위해 3개월간 훈련에 돌입했던 여자 배우들의 수고도 영화의 ‘손맛’을 위한 당연한 준비였다.
이상일 감독의 영화에는 소외된 자들이 등장하고, 시대가 충돌한다. <훌라걸스> 이전까지 그 방식은 내성적인 읊조림에 가까웠다. 물론 혁명의 시대를 축제의 유희로 풀어보려는 <69 식스티 나인>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데뷔작인 <청>, 해체된 가족의 경계에 선 자들을 그린 <보더라인>,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꿈틀거리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 <스크랩 헤븐>은 그의 영화적 세계를 회색톤으로 색칠했다. 그래서 이상일 감독의 영화엔 결말이 애매모호하다. “마이너한 인물들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지만, 그 시선의 방향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정체성도, 정치적 문제도, 세대간의 갈등도 미결된 채로 봉합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기획영화 <훌라걸스>는 다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전히 소외됐고, 이전 세대와의 갈림길에서 혼란에 빠져 있으며, 그 결말도 흐지부지하지만 <훌라걸스>의 소녀들은 도전과 희망이란 이름의 춤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노무라 마사유키는 이에 대해 “<훌라걸스>를 보고 <스크랩 헤븐>과 너무 달라 놀랐다. 과연 같은 감독의 작품인가, 생각하게 됐다. 과연 이 감독은 영화작가를 꿈꾸는 것일까, 아니면 직업으로서의 감독을 꿈꾸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남겼지만, 이는 <훌라걸스>가 이상일 감독의 영화라기보다는 씨네콰논의 기획영화라는 점에 더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훌라걸스>에 담긴 이상일 감독의 터치도 무시할 수 없다. <청> 이후, “재일에 대한 문제는 이제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겠다”고 한 감독의 의도가 잠시 기획영화란 틀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스크랩 헤븐>과 <훌라걸스>, <훌라걸스>의 성공과 그 뒷면 사이에 이상일 감독의 내일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