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베를린 천사의 시>를 가지고 몬트리올영화제에 참석한 빔 벤더스는 그곳에서 본 한 젊은 감독이 만든 영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시상식장에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질 상금은 바로 그 젊은이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벤더스를 매료시킨 이가 바로 당시 두 번째 장편영화 <패밀리 뷰잉>을 막 선보이고 있던 스물일곱 나이의 아톰 에고이얀이었다. 에고이얀을 알아본 벤더스의 눈은 정확한 감식력을 갖고 있었던 듯싶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에고이얀은 시네필들의 신망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작품들만을 만들어내며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시네아스트들의 만신전을 향해 성큼성큼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에고이얀은 주로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장벽, 성적인 일탈 행동, 관음증, 강박관념 등과 같은 인간 심리의 재료들을 가지고 아주 폐쇄적인 영화세계를 지어 올리는 시네아스트이다. 에고이얀의 그런 (특히 초기의) 영화세계는 충분히 유혹적이지만 종종 자폐적 유혹, 혹은 유혹적인 자폐 안에서 자족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들이 성적인 강박증을 자주 다루면서 그것의 미스터리에 좀더 깊숙이 다가가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그저 닮으려고만 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영화평론가인 조너선 로젠봄은 에고이얀의 영화들을 가리켜 “벌거벗은 영혼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정신적인 스트립티즈”라고 은근슬쩍 비꼬기도 했다. 그럼에도 로젠봄은 에고이얀의 영화적 재능을 높게 평가하는 쪽에 속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재능, 독창성, 지성의 측면에서 오늘날 아톰 에고이얀에 필적할 만한 젊은 영화감독은 거의 없다.” 로젠봄의 평가를 그대로 믿기로 한다면, 그가 이렇게 쓴 것이 95년의 일이니까 그뒤 <달콤한 내세>와 <펠리시아의 여행> 같은 걸작들을 자기 필모그래피 안에 추가한 현재의 에고이얀이 세계 영화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은 더이상 드러내놓고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다.
빔 벤더스가 반한 27살의 신인
1960년 여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난 에고이얀은 부모가 모두 그림을 그렸던 탓에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것이 자기 삶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첫 희곡작품을 쓴 것이 겨우 5학년 때. 그때 쓴 <카나리아에게 희망은 없어>라는 제목이 붙은 이 희곡은 한 무리의 소년들이 광산의 갱도에 갇혀 죽음의 공포에 떤다는 내용을 그렸다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부조리한 폐쇄적 세계에 대한 에고이얀의 관심이 꽤 오래 전에 형성된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그렇게 일찍부터 희곡 쓰기에 관심을 가졌던 에고이얀은 토론토대학에 다니면서 자기가 집필한 희곡을 대학의 희곡협회에 제출했다가 반려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겪는데 공교롭게도 이건 그로 하여금 번듯한 첫 영화를 만들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홧김에 그는 ‘그럼 영화로 만들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작에 들어간 에고이얀의 첫 16mm 단편영화인 <특히 하워드는>(Howard in Particular, 1979)은 캐나다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대학 졸업 뒤 에고이얀은 극단에 들어가 희곡을 집필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가 자신의 몸을 맡긴 곳은 영화계였다. 첫 장편영화인 <근친>을 시작으로 만드는 영화마다 열렬한 비평적 주목을 받아온 에고이얀은 현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함께 캐나다에서 나온 최고의 영화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느려터진 리듬이 낳은 긴장감
“나는 영화에서의 지지부진한 페이스라는 게 정말이지 유혹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에고이얀 자신의 말처럼 그의 영화들은 아주 느려터진 리듬을 과시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내러티브상의 정체감(停滯感)을 통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에고이얀 영화의 이런 굼뜬 페이스가 스토리상의 지극한 일면성이나 단순성보다는 오히려 복수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고이얀은 서브 플롯들을 여러 갈래로 증식시켜나감으로써 완만한 리듬을 생성해낸다는 것이다(사실 그의 어떤 영화는 메인 플롯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따로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예컨대 <스피킹 파츠> <엑조티카> <달콤한 내세> 같은 영화들은 모두가 네 군데나 그 이상의 지점에서 동시 병렬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다수의 인물들을 보여주지만 그 영화들은 그들의 동기는 물론이거니와 서로간의 관계나 심지어 직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데도 아주 인색하다. 그러니 에고이얀 영화와 마주한 우리가 할 일이란 여러 개로 조각조각난 단편들을 인내심을 갖고서 퍼즐 맞추듯 세심하게 맞춰보는 것이다. 그러면 <엑조티카>에서 교복을 입은 스트립댄서, 하루 걸러 클럽에 들러 그녀의 춤을 유심히 쳐다보는 중년 남자와 클럽의 DJ처럼 도무지 서로 관련이 되기는 하는 것일까 의심이 드는 인물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고리로 엮어지는 것처럼 ‘보상’이 찾아온다. 물론 그 보상이라는 게 남김없는 설명일 거라고 속단하면 곤란하긴 하지만.
당연히 에고이얀의 영화는 ‘미로’에 비견되곤 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일종의 ‘호텔’로 보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각자만의 생활을 간직하는 곳으로서의 호텔, 또는 드나듦이 자유로우면서도 폐쇄적인 모습을 가진 우주로서의 호텔. 에고이얀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호텔에 머물고 있는, 부유하는 사람들의 단면들을 흘끔 흘끔 조금씩 훔쳐보는 것과 같아 보인다(실제로 호텔은 에고이얀 영화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공간일 듯하다. <스피킹 파츠>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둘은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어서 영화는 많은 시간을 호텔이란 공간 안에 머물고 있으며 <어져스터>의 주인공인 화재보험 사정인은 자기의 고객들이 잠시 머물고 있는 공간인 모텔을 제 집 드나들 듯 왔다갔다 하는 인물이다. 이런 면은 아마도 에고이얀이 10대 후반에 호텔에서 잡역부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듯한데, 심지어 그는 영화 만들기라는 것이 ‘환상’을 창조하는 데 대한 사전작업이란 점에서 호텔 룸을 정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까지 말한다).